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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친일파재산 위헌법률심판청구’를 시작으로 리움박물관을 상대로 ‘현등사 사리구 반환’ 운동 등 반출된 불교문화재반환운동 참여. 2006년 동경대학 소장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반환운동 주도.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 앞장서며 2011년 일본정부로부터 불법반출된 1205점의 문화재 돌려받는데 공헌했다. 지은책으로는 <조선을 죽이다> <의궤-되찾은 조선의 보물>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등이 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대표로 잘못된 우리 문화재의 진실을 바로잡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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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주년> 봉선사와 광릉숲

글쓴이 : 혜문스님 날짜 : 2013-06-16 (일) 13:53:36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으로, 왕릉 조성이후 일대를 부속림으로 지정, 엄격하게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부터 임업시험림으로 엄격히 통제 관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릉에는 세조의 능침사찰인 봉선사가 자리해 역사를 함께해 오고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라고 하였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선사대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1551년(명종 6)에 이 절은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 주지 낭혜(朗慧)가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637년에 주지 계민(戒敏)이 중창하였으며, 1749년(영조 25)에는 재점(再霑)이 중수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나라에서 전국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5규정소(五糾正所)를 설치할 때 이 절은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 성암(誠庵)과 월성(月城)이 중수하였고, 1902년에 도성 안의 원흥사(元興寺)를 수사찰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삼았을 때 이 절은 16개의 중법산(中法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하였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교종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 글은 광릉숲을 500년 세월동안 지켜온 광릉과 봉선사를 중심으로 근현대사에 펼셔진 사회문화적 상황을 소개하고, 광릉숲의 가치를 인문학적 사건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광릉숲과 한국문학


 

가. 춘원 이광수와 광릉숲


 

<산에서>는 내가 봉선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의 일기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간 것이었다. 내가 봉선사를 숨을 곳으로 정한 까닭은 광동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내 삼종 운허당 이학수(耘虛堂 李學洙)를 의지함이었다. 아이들 작문장이나 꼬나주고 영어 마디나 가르쳐주면 밥은 먹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광수, <돌베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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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로,<무정><유정><꿈>등의 역작을 남겼다. 특히 <무정>은 한국최초의 근대소설로서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은 시대적인 거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광수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그와 육촌간이었던 운허스님이다. 운허스님은 이광수의 젊은 시절의 경쟁자이자 노년기의 정신적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친척집에 얻혀 살면서 가난과 설움을 깊숙이 체험했다.

 

이광수는 친척들 중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재당숙집에서 생활했는데,이 재당숙집안의 외아들이 바로 이학수였다.(훗날의 운허스님) 이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춘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조그마한 이야기책을 지어서 큰누나에게 보였으나 칭찬은 듣지 못하였고, 또 내 삼종제(운허스님)와 함께 노래와 고풍한시를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백이는 무엇에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꾸며짐없이 쭉 펴진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1921년 이광수는 상해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귀국한 뒤, 본격적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민족개조론>을 일으켜 민족진영에서 소외되고 변절자(變節者)라는 비난에 직면하던 시점, 이광수는 참으로 우연히 이학수와 재회한다. 1923년 8월 금강산 여행중이었던 춘원은 유점사에서 뜻밖에 승려가 되어있는 자신의 육촌 운허스님과 상봉한다. 운허스님은 변절자의 낙인(烙印)과 차남 봉근의 죽음 등으로 번민하는 춘원에게 몸소 <법화경> 한 질을 져다주어 법화경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 뒤로 춘원은 불교의 세계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법화행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1945년 경기도 사능에 칩거해 있던 춘원에게 그의 말대로 청천벽력(靑天霹靂)처럼 다가온 해방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도 운허스님이었다. 친일변절자로 낙인이 찍힌 춘원에게 해방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이광수 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이광수는 어디론가 피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춘원은 운허스님이 계시는 봉선사로 입산하게 된다.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므로 해방이후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춘원의 입산을 위해 운허스님은 봉선사 절 담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방 앞에는 추사체로 다경향이라고 액자가 걸려 있었으므로, 운허스님은 그 방을 다경향실이라 이름해 주었다. (이 집은 현재 헐리고 신축한 다경향실이 있다. 현재 조실스님채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춘원은 법화경을 탐독하며 죄인의 심경으로 돌베개를 베고 살았다. 그 때문에 입이 삐뚤어져 물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이 돌베개의 이미지는 진지한 내면의 고백을 쏟아내어 <돌베개>라는 수필집으로 엮어진다. 춘원은 1946년 운허스님의 주선으로 광동학교에 교편을 잡기도 하였는데, 그 때 그가 지은 교가는 현재까지 애용되고 있다.

 

6.25사변이 나자 서울 자택에 잠시 갔다가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로 소식을 모르는 터에 1975년 주요한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그와 연고가 깊은 봉선사에 기념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제의하였는데, 운허스님께서 허락하여서 그의 기념비가 당사 어귀에 서게 되었다.


 

나. 최서해 문학의 산실 봉선사


 

남북한 문학사를 통털어 “조선의 고리끼”라고 격찬받는 최서해(본명 최학송)는 1901년 함북 성진군에서 태어나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극한적인 궁핍과 간도 유랑 등으로 얻어진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하여 서해는 1920년대 문학사에 한 획을 장식했다. 식민지시대 일제의 통치기에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을 그림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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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문단을 이끌어 나가던 사람들은 주로 고등교육을 받고 외국유학까지 다녀왔던 지식인 작가 위주였는데, 이들은 <개벽>과 <폐허>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의 낭만적 애상이나 비관적 허무로 가득찬 인물들을 작품속에 투영했다.

 

서해는 이런 경향의 작가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궁핍(窮乏)의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모순을 폭로했기 때문에 항일의식과 사회변혁 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성과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탈출기>에서는 민중의 가난이 단지 본인의 무능과 나태함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기인함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1924년 10월 춘원 이광수에 권유로 봉선사에 와서 머리를 깎았고 행자수업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던 것이다. 그는 봉선사에 와서 불도에 정진하면서 문학을 새롭게 다지고 일신하는 계기를 가졌으며, <탈출기>를 비롯한 초기작품들인 <고국>, <매월>, <십삼원>, <박돌의 죽음> 등이 봉선사에서 집필되거나 구상되었다. 봉선사는 서해문학의 주요한 작품들이 되었던 산실이었던 것이다.


 

3. 봉선사와 항일의 전통


 

가. 운허스님과 봉선사

 




 

운허스님의 속명은 이학수, 법호는 운허이며 법명은 용하이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어린 시절 고향의 회헌재에서 사서를 비롯한 한문고전을 배우고,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 만주로 건너가 봉천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 교원으로 재직했고, 이해 6월부터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鼓吹)하였다.

 

1914년 3월부터는 봉천성 흥동학교를 설립해서 교포아동교육에 전념하였고, 1917 4월부터는 배달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까지 교포아동의 교육을 실시했다.

 

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는 독립군 기관지인 한족신보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그 뒤 국내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潛入)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했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되었고, 46년 4월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53년 애국동지원호회에서<한국독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일에도 참가했다.

 

불경을 번역하는 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되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천했고, 1962년 종교인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았고, 1978년 동국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18일 봉선사에서 속랍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사전>,<불교의 자비>,<불교의 깨묵>,<한글금강경>,<정토삼부경>,<대교지문> 등과 다수의 경전 번역물이 있다.


 

나. 운암 김성숙과 항일운동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1898-1969)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입하기 위하여 만주에 가려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 경기도 용문사 스님인 풍곡신원 선사를 만나서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 운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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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에서 2년쯤 생활하다가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했다.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친분이 있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같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또한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을 조직했고,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하였다. 단재 신채호,유우근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었다.

 

1926년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어 광동으로 갔으며, 거기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에도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문화 총동맹과 작가연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한편 주은래의 중매로 중국의 여성공산당원인 두영초와 혼인했다.

 

1936년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 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그후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6.25때 서울에 남았다가 공산당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루었고,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고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했다. 5.16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獄苦)를 치루게 되었다.

 

운암의 일생은 젊어서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후에는 반이승만 정권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다. 말년에는 가난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크게 고통 받았는데, 친지들의 주선으로 방 한칸을 마련하고는 파우정이라 이름했다 (봉선사의 파우정은 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4. 봉선사의 현재활동


 

가. 문화재제자리 찾기 운동의 태동


 

2005년 이후 봉선사와 남양주, 구리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식민지시기 일제에게 약탈(掠奪)당한 문화재의 환수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제일 첫 번째 운동의 목표가 되었던 것은 도쿄대학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47책의 환수운동이었다.

 



 

이 책은 봉선사가 시행했던 경기북부 27개 전통사찰의 문화재 일제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봉선사는 1927년 봉선본말사지에 기록된 주요 문화재의 소장현황을 현재와 비교대조, 유실현황을 파악하려는 취지에서 ‘문화재 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조 숙종때의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지도’를 비롯한 문화재들이 유실되었음이 드러났고, 추가 조사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1914년 기증형태로 도쿄대로 불법반출된 조선왕조실록의 유통현황이 파악되게 되었다.

 

그결과 2006년 3월 봉선사 주지를 공동의장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가 출범, 도쿄대와 3차례에 걸친 협상을 통해 2006년 7월 조선왕조실록을 반환받는 ‘민족사적 쾌거’를 이룩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궁내청 이른바 천황궁에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조선왕실의 주요문서가 보관되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구성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조선왕실의궤 등의 문화재는 2010년 일본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담화문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반환’을 약속했고, 이에 수반하는 조치로 2011년 12월 6일 조선왕실의궤 등 총 1205책의 도서가 민족의 품으로 안겼다.

 

65년 한일협정으로 ‘문화재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봉선사를 중심으로한 ‘환수위’가 6년간 50여차례의 일본 방문을 통해 끈질기게 반환을 요구한 끝에 이룩한 성과였다. 조선왕실의궤 등의 귀환은 65년 한일협정이후 최대 규모의 문화재 반환이었다.


 

나, 우리 식물 주권의 제자리찾기

 




 

광릉 수목원은 우리나라 식물의 약 30%를 기재한 일본 식물학자인 나카이가 촉탁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사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광릉 숲은 우리나라 식물분류 연구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일제가 시작한 식물학 연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나카이가 발견하고 세계식물학계에 보고 학명을 부여한 많은 식물 중에 가장 문제점을 지닌 것이 금강초롱이다.

 

금강초롱꽃은 우리나라 중부 및 북부 이북의 고산지대 깊은 숲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1902년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가 금강산 유점사 근처에서 발견, 식물학회에 보고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나카이는 이 식물을 조선공사였던 하나부사에게 헌정, 학명이 Hanabusaya asiatica nakai 로 정해 졌다.

 

2012년 4월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월 도쿄대를 방문, 직접 기준표본을 확인했다. 금강초롱의 기준 표본은 총 10매로 확인되었고, 최초 등재 이름은 Symphyandra asiatica Nakai 였으나, Symphyandra과 다른 새로운 속으로 분류하면서 Hanabusaya로 개명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금강초롱은 한반도 특산종으로 우리 식물 주권을 되찾는 다는 취지로 기준표본의 한국 반환, Hanabusaya란 명칭 개정운동 등을 펼칠 계획임)

 

나아가 식물 명칭과 관련, 식민지 시기의 오류가 지금까지 정정된지 않고 있는 또 사례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를 일본 적송(Japanese red pine)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소나무는 국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로 인식되어 있는 상황에서, ‘Japanese red pine’이라 표기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일본이 영문이름을 선점했다 하더라고 학명으로 등재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영문명(Common name)으로 쓰이는 것을 바로잡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더욱 문제인것은 우리나라의 식물도감, 영문 논문 등에 문제의식없이 ‘Japanese red pine’이라고 기재하는 것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출처] 광릉숲의 사회문화적 가치|작성자 모니노

 

http://blog.naver.com/doorskyj?Redirect=Log&logNo=120190820557 <혜문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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