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어렵고 딱한 사람들이 하는 부탁이나 구걸(求乞)에는 절대 지나치는 법 없이 도우려 하고 자신이 가진 경제적인 여유를 조금이라도 꼭 나누는 사람임을 잘 아는 터에 ‘어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 라고 탓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 흉한 도심 속의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인적도 별로 없었던 장소에서 현금 인출을 기다렸다가 남편이 건네주는 돈만 받고 순순히 사라져 준 것만을 차라리 감사해 하고 있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진짜 아르마니 옷은 아닌 것 같아’ 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행동이 미심쩍은게 몇 가지 있었다고 말했다. 헤어지고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보는 사이 그가 쏜살같이, 그것도 자신이 가르쳐 준 방향과는 정 반대로 길을 확 꺾어서 가던 것 하며, 옷을 주겠다고 차 문을 열었을 때 여행용 가방이 없었던 것 등등 아무래도 확실히 속은 것 같다며 화를 삭히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가죽 옷들이 명품이 아니어도 한 벌에 몇십불 씩은 다 넘을 테고 도둑 맞은 것은 아니니 억울해 할 것도 아니야. 나중에 이 옷 사이즈에 맞는 사람들 있으면 하나씩 선물로 주면 되지 뭐’ 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마무리를 했지만 선의의 친절을 악용한 그 이탈리아 청년이 한탕 했다며 횡재를 즐기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고 속이 상했다.
이후, 그 옷을 누구에게도 주지 못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도 가죽에서 나는 냄새가 어찌나 머리를 아프게 하던지 그 부피가 큰 옷들을 다 잘라서 버려야 했다. 자르는 과정에서 가죽이 아닌 비닐 옷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비싼 수업료를 물어가며 산 거액의 쟈켓이라며 기념으로 그나마 냄새가 덜 나는 검정색 쟈켓을 하나 남겼다.
그 밤의 해프닝이 서서히 잊혀져 가던 어느 날 운동을 하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길목에서, 이탈리아 억양을 구사하는 비슷한 청년이, 한 문장도 틀리지 않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차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을 꼽으라면 그 SUV 차량의 색깔이 흰색이 아닌 검정색 이었다는 것 뿐.
남편은 속으로 기절할 것 같았지만 단순히 못된 한 이탈리안 청년 한명이 푼돈을 바라고 사기를 친게 아니라 조직적인 범죄 집단이 연관되어 있을거란 생각이 들면서 못들은 척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후 어마어마한 규모의 ‘짝퉁 의류 사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남편은 운동 시간대도 바꾸고 가는 길목도 바꾸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안 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무조건 경계하게 되고 심지어 길에 누가 길을 묻는 질문을 해도 아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옷 사기꾼 하나로 해서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도매 값으로 ‘땡 처리’ 되는 풍경(風景)과 다름 아니었다.
엊그제 뉴스에 신분도용, 신용카드 사기, 융자 사기 등 이민법과 연방법을 어긴 중 범죄를 진 죄목으로 자그마치 50 여 명이 넘는 뉴욕 뉴저지의 한인들을 검거했다고 들었다. FBI와 지역 경찰국, 이민국 경찰국, 연방 경찰까지 합세한 3백여 명이 합세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 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그 파장이 어떠할지 걱정이 됐다.
앞으로 뉴욕 등 미국에서 한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달라질 것이며 그렇쟎아도 높은 문턱의 은행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 나아가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도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터이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기란 모름지기 그 피해가 직접 당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어마어마한 파장으로 다수의 선한 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겠는가.
앞서 소개한 그 짝퉁 옷을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거금(巨金)을 들인(?) 싸구려 자켓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구입한 가장 고급스런 옷이라며 웃는 여유도 생겼다. 이름하여 ‘지아니 아르마니’ 라는 브랜드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작년(昨年) 봄 뉴욕 공연을 한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님이 우리 집 저녁 초대를 받아 오셨는데 ‘아이구, 언제 뵈어도 남편 분께서 참 선하시다’며 칭찬을 하시기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그가 얼마나 순진하며, 선함이 얼마나 이 사회에서 악용되었는지 ‘지아니 아르마니’ 해프닝을 말씀 드렸다. 그 옷에 배인 나쁜 기억(記憶) 때문에 더는 입고 싶지가 않아서 당신의 글을 받고 싶다고 여쭈니 흔쾌히 옷의 등과 팔에 이렇게 써 주셨다.
경계(境界)가 없는 장사익 님의 유려한 필체로 쓰인 ‘봄 꽃 한 송이’ 와 ‘하늘처럼 높고 푸르소서’라는 글을 받고 보니 비로소 그 흉한 기억은 사라지고 대신 그 분의 소리가 담긴 구성진 노랫말이 담긴 옷이 되었다.
행여 그 옷을 입고 나설라치면 한국인 에겐 ‘언제 이런 글을 받았느냐’는 부러움으로, 미국인에겐 디자인이 훌륭하다며 관심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패션감각 넘치는 옷으로 지금은 아까워서 입을 수조차 없는 보물 1호가 된 것이다.
▲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님이 유려한 필체로 써 준 '봄 꽃 한송이'와 '하늘처럼 높고 푸르소서'. 우리가 가장 아끼는 보물 1호 쟈켓이 되었다. 비록 가죽이 아닌 비닐이라 할지라도. 굳이 브랜드 이름을 붙이자면 '지아니 아르마니' 가 되겠다.
‘짝퉁 명품 옷’을 통해 배우는, 결코 값싸지 않은 교훈은 오래도록 갈 것 같다. ‘조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가 아닌 바로 우리가 만든 브랜드 ‘지아니 아르마니’(Gianni Armani) 는 그렇게 탄생했으며 단순한 옷 브랜드가 아닌 허영심(虛榮心)을 시험 받을 때마다 일깨워 주는 좋은 브랜드가 되어 줄 게 틀림없다.
▲ 뉴욕 타임즈에 실린 '조지오 아르마니' 브랜드 광고. 옷에 대한 허영심이 '짝퉁 옷' 을 양산 시키고 사기를 조장하는게 아닐까 싶다.
17년 간 열리던 뉴욕패션위크의 패션쇼가 올해부터는 미드타운이 아닌 업 타운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2, 제3의 지아니 아르마니를 우리 동네 앞에서 만나는 일은 더는 없을 것 같다.
Ciao! Giani. (잘가게! 짝퉁 지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