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숲속 새 길을 갈 때, 대부님이
by 김지영 | 14.07.07 04:48


 

-최홍운 베드로 대부님께-


 

대부님과 제가 걸어온 ‘기자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매일 데드라인의 벼랑 끝에서 벌이는 사투(死鬪)로 정신과 육체는 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이라는 목표가 그만큼 숭고하기 때문이겠지요. 또 저로서는 진정으로 원하던 일이었기에 정말이지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고통스러운건,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1985년 ‘정부·여당 학원 안정법 추진’기사로 남산의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拷問)을 당하고는 1987년 민주화 뒤 ‘언론자유’를 기치로 출범한 노동조합에 자연스럽게 참여했습니다. 이어 경향신문사를 한화그룹이 인수할 때는 정부 압력으로 노조출신 기자 5명이 아무런 사유없이 해고됐습니다. 살아남은 저는 노조위원장이 되어 ‘해고 5인 복직 투쟁’을 벌였고요.


 

당시 일부 선후배들은 “일단 퇴사하면, 합작뒤 복직에 앞장서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새 체제가 되자 돌아보지도 않는 것은 물론, 해고기자들과 저를 모함(謀陷)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게 기자사회라면 그만 두자”고 마음먹었는데 한 선배의 적극적 만류와 권유로 해외연수를 떠나게 됐습니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고 도망가듯 떠나간 곳,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머나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한 교민이 제 등을 성당 문안으로 사정없이 떠밀었던 것입니다. 길고도 추운 클리블랜드의 겨울, 저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교리교육을 받았습니다. 배신하지 않을 분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부여잡고.



 

1995년 4월 세례(洗禮) 미사를 앞두고 대부님을 정해야 했습니다. 주위에 천주교 신자들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마음에 딱,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낮잠이 설핏 들었는데 ‘최홍운 선배’가 스르륵!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맞아!” 즉각 저는 서울의 최선배에게 전화를 했었지요.

 

 

 

http://www.hanyang.ac.kr/ <한양대 위클리한양>


 

제 집안은 유교 전통이 강했습니다. 자랄 때는 친가나 외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대부님은 대대로 독실한 교우 집안 출신에 신학교 출신. 초짜 대자로서는 얼마나 든든했는지요. 게다가 ‘기자 동지’에 저보다 앞서 노조위원장을 하셨고요. 고향이 경북 영천인 대부님 집안은 제 외가와 한동네 이웃이기도 했다면서요? 작심하고 맞춘다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대부님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신문출판협의회 회장일 때 저를 감사라는 직책으로 불러들이셨지요. 그날 이후 매사 대부님의 발자국을 밟고 가게 됐고요. 가톨릭신문출판협의회 회장, 가톨릭언론인 협의회 회장에, 신문사는 다르지만 노조위원장과 편집국장까지.(꾸르실리오 입소와 가톨릭산악회장직만큼은 대부님이 제 뒤를 이었습니다!)


 

길을 걷던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아름다운 숲속의 새 길’로 들어섰고, 대부님은 제 손을 이끌어주셨습니다. 어언 20년이군요. IMF사태 이후 무너진 가톨릭언론인회를 다시 세우자던 대부님을 따라 ‘초짜’인 저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일부터, 많은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갑니다. 진리의 품안에서 오가는 언론인들만의 자유로운 대화와 술잔은 그 얼마였는지. 그 기간, 저는 가슴 벅차게 몇 가지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사회교리를 처음 접하고는 ‘기자인 신자의 도리는 사회교리를 글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사형제 폐지’ 등 사회교리를 경향신문 논조에 반영하려고 애를 썼어요. 교회의 국제 뉴스가 있을 때마다 신문·방송들이 용어를 잘못 쓰는 경우를 보고 “미디어종사자들을 위한 용어집이 있었으면···”하고 염원했는데요. 결국 김민수 신부님 지도아래 대부님·임영숙 선배와 함께 까다로운 작업 끝에 주교회의 명의의 용어집을 펴내 전국 매체에 배포하게 됐지요.


 

고향인 영주 무섬마을의 큰집은 당호가 해우당(海愚堂),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입니다. “천주교를 박해한 대원군의 친필 현판 아래에서 미사를 드리는 날이 올까? 역사의 화해가 이뤄지는 감동일텐데··” 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60명의 가톨릭언론 성지순례산악반이 우리 동네 생긴 이래 처음으로 큰집 대청마루에서 성바오로 수도회 안성철 신부님 집전으로 미사를 드렸고, 그 감격에 제가 울었던 일, 기억나시나요?



 

더 감격스러운 일은 평생 ‘예수쟁이’를 싫어하시던 어머니가 병상에서 자청해 세례를 받은 ‘사건’이지요. 인천교구의 호인수 신부님이 지하철을 몇차례 갈아타고 멀리 죽전 요양병원에까지 와 주셨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님 등 여러 신부님과 수녀님·교우님들이 영전에서 미사와 함께 연도를 했더랬습니다.


 

대부님, 그 뒤 제 가족과 형님 가족이 모두 차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부님 집안과 같은 ‘신앙명문’은 아니지만 이제 갓 핀 작은 신앙의 싹에 큰 꿈을 걸고 있답니다.

 

 

 

 

최홍운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 이 칼럼은 계간 ‘평신도’ 2014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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