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잡으러, 나를 잡으러 간 동해안
by 김지영 | 12.08.03 07:31

떠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찾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바로 잡으려고 자주 일상을 떠난다. 그렇듯이 신자들은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다지기위해 성지순례에 나선다.


지난 겨울 우리의 순례지는 동해안이었다. 40년전, 방황하는 이 땅의 젊음들이 “자- 떠나자”며 고래를 잡으러 가자고 했던 곳. 실상 고래는 ‘자아’였다. 동해안은 재작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로, 이번에 찾는 곳은 금광리 공소 등. 재작년처럼 금요일 저녁 8시반, 서울 덕수궁 앞에서 ‘고래를 잡으러’ 출발했다.


출발은 예정보다 다소 늦었다. 늘 이러면서 우리의 순례는 시작한다. 최홍운 회장과 안성철 마죠리노 지도신부님(성바오로 수도원 준관구장)의 인사말, 그리고 우리의 ‘구여운’ 중년 마스코트 오완수 바오로 총무의 일정 안내, 이어지는 103위 한국성인 호칭 기도. 그런데 오늘은 안 신부님과 오 총무가 안 보인다. 날씨가 매섭게 추운 탓에 피정(避靜)센터 호스트인 안 신부님은 오총무와 함께 이미 피정센터에 내려가 ‘불을 때고’ 있다는게 전언이다.

 


정호철 안드레아 형제가 대신 103위 성인 호칭기도를 선도한다. 이때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떤 때에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참혹하고도 거룩한 순교. 13세 어린 소년(유대철 베드로)부터 79세 노부인(유 체칠리아)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이르도록 견뎌낸 육체적 고통을 내 마음에 새기노라면 몸이 떨린다. 정말이지 이 기도를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마음은 진작 성인들의 포로(捕虜)가 된다.

 

▲ 금광리공소와 공소연혁비


한계령을 넘을 무렵 쏟아진 눈. 이때문에 무려 5시간 반이 걸렸다. 새벽 2시가 돼서야 피정센터 앞 해안도로에 도착했다. 24명의 형제·자매들은 녹초가 돼 어서 피정센터에서 쉬고 싶은 표정들이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진 밤바다. 멀리 대양에서 쉴새없이 몰려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다 백사장에 쓰러지는 파도, 먼 오징어잡이배 불빛, 밤하늘의 별과 파도소리, 바람소리. 어둠속에서도 온몸으로 느끼는 대자연에 모두들 아연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다. 곧장 숙소인 피정센터로 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발길들이 저절로 돌문어와 소주가 기다리고 있는 횟집으로 향한다.

 

그러고도 부지런한 이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피정센터 옥상이나 앞 해변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다. 바다와 태양은 언제나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비세속적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고, 하느님의 섭리를 느낀다. 아침 8시 미사에서 안 신부님이 행한 강론, ‘예수님의 평화는 두려움없이 맡기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바다와 일출이라는 대자연(스스로 自, 그럴 然)의 신비와도 맞닿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금광리 공소로 향했다.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417-5에 자리한 금광리 공소는 1887년 개설했으니까 역사가 125년이나 된다. 영동 지역 최초의 공소로 천주교 신앙의 싹을 틔운 곳이다.

 

▲ 금광리 공소

고종 3년(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서울·경기도·경상도 등지에서 피난온 교우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건립했다. 공소회장 김중철(76·필립보)씨의 경우, 증조부·증조모가 경주에서 박해를 피해 교우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 금광리 공소 마당 성모상


함석지붕에 시멘트로 지은 공소건물은 20평 남짓하다. 50년전 원래의 터에서 이사를 왔는데 마루바닥만큼은 그때 것 그대로다. 현재 신자는 4가구. 김회장은 “한때 신자가 100가구, 가르치는 소학교와 교리학교 학생이 각각 수십명이었다”면서 “사제와 수녀도 각각 2명씩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그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신앙심이 대단했다. 참혹한 순교의 역사는 없었지만 신앙을 지키고 가꾸어온 열정과 진지하고도 겸손한 삶의 역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어 세잔느나 모네의 그림처럼 아담하고 예쁜 주문진 성당을 방문, 문양기(다니엘) 주임신부로부터 본당과 영동지역 전교역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곧 오대산 소금강으로 향했다. 몹시 추울 것이라는 기상예보때문인지 등산객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적막할까. 겨울산은 천연색의 모든 치장을 떨치고 헐벗었다. 獨也靑靑(독야청청)한 소나무와 물소리· 바람소리뿐, 그 밖에는 모두 비운 수묵화다. 그러나 겨울산은 초라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골격만 드러낸 겨울산은 위엄과 절제·균형을 잃지 않는다. 죽음과 같은 가난과 침묵 속에서도 꼿꼿한 영성 하나면 된다고, 내년 봄 부활한다고,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겨울산에 오래 들 수가 없었다. 예정된 귀경시간 때문에 겨우 2시간여만에 산행을 마쳐야했다. 하산길에 나를 정리했다. “오늘 저 산을 넘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의 산은 어서 넘어야겠다. 그들과의 그만한 갈등을 넘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순교성인들처럼 참혹한 고통을 이길수 없더라도,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이만한 일이야···”


 

▲ 주문진 성바오로 수도회 피정센터 안성철 마죠리노 지도 신부님과

그리고 귀경전 주문진 수산시장안, 천주교 형제가 운영하는 해진 횟집. 사람은 풍경을 닮는지, ‘나’를 찾아 신앙의 역사현장과 바다·산을 거쳐, 먹고 마시고 정담을 나누는 회원들의 표정이 어느때보다 맑고도 밝다.

* 이 칼럼은 ‘참소중한 당신’ 2012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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