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32)
by 현승효노천희 | 21.06.01 11:29

고통은 우리의 사랑에 인화물이 된다

 



11월 17일 월. 1975년

나는 오늘 많은 글을 이 종이에 채워야 할 것 같다. 무척 좋은 글을 읽고

많은 느낌을 얻은 뜻깊은 날이다. 오랜만에 연대로 심부름을 갔다. 가다가

혼자 들판에 앉아 배에 숨겨 온 책을 읽다. 죽음에 관한 장이다. 여태까지 머리속에서만 맴돌던 상념이 비로서 나의 것으로 해결이 된다. 철학이란

죽을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라 했다.

사실 죽음을 우리의 悟性的 인식능력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다움,

하물며 사랑조차도 무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 한계정황으로부터

하는 탈피는 오직 철학적 사색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옳다. 동감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실 죽음이라는 한계정황에서 모든 것이 소멸하고 무로 돌아갈진대 죽음 그 자체도 결국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노야, 그렇지 않아? 죽음이란 것이 절대적 시간이라는 영역 속에서 한정되는 것이라면 시간이란 圓環的 시간과 직선적 시간으로 구분될 수 있다. 前者는 回歸에 의해서 末世에 의해서 설명되는 시간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의 시간이 아니다.

인간이 불사조처럼 영겁이 지난 후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고 오히려 새로이 시작되는 일회적이다. 그는 결코 옛적의 그의 기

억 사고를 동반하지 않는다. 삶이 일회적일 때 여기서 인간에게만 놓쳐 버릴

수 없는 결단이 가능하다. 즉 기회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으므로 결단이라는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사랑, 공동체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실존이다. 그것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기에 형이상학적이다. 여기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包括者에 접근하게 됨과 동시에 인간 자신이 포괄자의 포괄자가 된다. 여기서 영원성이란 개념이란 것, 그것은 시간적이며 동시에 무시간적인 것으로 즉 시간 속에서 오히려 시간을 거역하는 무시간적인 것과의 통일이다.

다시 말하면 무시간적인 비현실성과 시간적인 실재에 대립하는 영원한 현실이다. 그것은 실현이라는 형태로 결과된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것일지라도 실현이라는 것 속에는 영원성이 內在한다. <순간적인 영원성> 이것은 죽음 속에서 발견되는 不死性이다.

인간이란 모든 것의 소멸 속에서 절대적으로 자기를 이 모든 것에 전제한다. 그리고 암호라는 것도 우리에게 느껴짐으로써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철학적 모험과 투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초월자 속에서의 자신을 실존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록 죽을 수 밖에 없더라도 우리는 영원성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결단을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사랑 속에서 살 때 우리는 不死性 속에

서 우리를 실현하며 우리는 죽지 않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찬란하고 화려

하며 완성된 단계는 스스로 죽을 수 있음, 즉 죽음을 지불한 실현 속에서

그 영원성이 숨쉰다. 비로서 이런 결론이 나의 가슴에서 나온다. 기뻤다.

그렇게 앉아 있다 50원 짜리 팥빵을 어린애처럼 2개 사먹고 인사계 집에

가서 김치랑 밥을 얻어 먹고 늦게야 연대로 들어가니 찾아서 난리가 났다.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내가 거기 왔느냐고. 나는 항상 이래서 말썽이다.

나는 뭐래도 좋다. 좆같은 군대. 저 푸른 하늘 속에서 꿈결같은 구름 속에

서 노야나 실컨 안아 봤으면 좋겠다.

11월 18일 화 1975년

낮에는 별로 할 일 없는 이곳도 RCT 훈련 준비로 요즈음은 바쁘다. 그러나

나의 뱃속에는 항상 책이 있어 변소 갈 때나 어딜 갈 때나 1분의 짬만 있어

도 나는 그놈을 꺼내 본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의 집념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의 집착이다. 하긴 그런 정신으로 연앨 했지.

이곳 제일 고참놈은 악랄하고 인간이 되먹지 않아서 괴롭다. 잠을 못 자게

한다. 눈이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그것도 웃기는 일.

노야! 만약에 내가 나의 철학과 사상을 배반해서 살아왔다면 그래서 세상에

서 말하는 안일과 현명함을 지녔다면, 편하고 모든 상황과 역사와 진리와 양심 그리고 실존과 자유를 모르는 척 외면해 버리고 슬쩍 비켜버리고 뭐 세상이란 그런 거 아니냐 대다수 인간들처럼 슬쩍 비켜버린 소득으로 중위 계급장을 달고 그저 큰소리나 탕탕 치고 인화할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그런 기분으로 계속 지내고 아버님 어머님께는 얄팍한 효도로 노야 너에게는 걱정을 덜 끼치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정이 되었음을 요즈음 확신하고 있다.

노야, 내 사랑 노야, 나 자신이 부정되고 내가 나를 배신하는 그런 사람이 되

었다면 너의 사랑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 되었을까! 너는 내가

이렇게 묶여있고 바보처럼 욕먹고 얻어맞고 배가 고파 걸덕걸덕하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죄수처럼 이리저리 몰리고 이놈저놈 눈치때문에 몸둘 곳을 몰라

하며 앉지도 못하고 서서 그냥 불안한 심리상태로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회의를 느끼는가?

그리고 소위 오늘날의 저 동물적 본능생활의 양태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나를 바보로 어리석은 놈으로 평가할 때 순간적으

로나마 우리의 관계에 대해 회의를 품은 적이 있는가? 내 사랑 노야 너는 결

코 그렇지 않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나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나의 실존이 이 거대한 세계를 향해 부르짖는

주장 속에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며 영원성 속에 살고있다고 외치는 신념이

있다. 물론 나보다 더 많은 고난과 세상의 문제성에 짓눌려서 질식한 사람이

한 둘일까마는 나의 이 자유와 환희의 경지에서 그들도 후회없이 지내올 수 있었을까는 회의적이다.

나의 天使 노야! 나의 사상과 실체로서의 자유는 날이 감과 더불어 더욱 심

오해 지고 있다. 기뻐해 다오. 사실 한사람의 사상가 철학인이라는 것은 아

무런 현실적인 권력도 힘도 가지지 않는 약하디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

러나 그들은 개인 개인의 내면 속에서 그 인간의 의식을 전도시키며 궁극적

으로 세계를 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생활하는 철학인이란 어떠한 상황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자신

의 지성이나 학리를 확신하며 그것만이 절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인간의 진리란 단지 全眞理일 때 비로서 완전한 진리

가 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엔 全眞理란 존재치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철학인은 항상 자신의 진리를 비판과 모험 속에 두고 갈등하고 괴로워 한다. 그러나 이 경지를 통과해야만 비로서 자신의 내면적 비약이 가능한거야.

그동안 회의와 절망 속에서 나의 지성과 신념은 많은 부대낌과 회오와

끊임없는 반성 속에서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노여! 나는 이제 비약에 의해 새로운 확신 속에서 내가 옳았다는 것,

적어도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자위 속에서 나는 지금 행복감에 가슴

이 떨리고 있다.

 

이곳 군의관들 그리고 많은 상관들 속에서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구두를 닦아주고 발을 씻어주면서 그들에게 한없는 연민의 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 아! 저 인간이 어떻게 인간자신이 되는지도 꿈에도 모르는 군상들, 나의 이 기쁨을 그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

노야! 가슴을 펴라. 너와 나는 힘들고 괴롭더라도 우리 속에서 숨쉬며 살아

가는 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섬광같이 빛나는 환희 속에서 지내고 있지 않느냐. 네가 이 먼 길을 달려와서 낮은 풀밭에서 나누는 키스는 얼마나 황홀하고 우리는 행복에 겨웠던가.

노야 어제는 너에게 편질 썼다. 아직 그 편진 발송이 되지 않은 채 얌전히

있다. 지금은 한밤 너는 지금 곤히 자고 있겠지. 이제 모레면 RCT 훈련을

떠난다. 나는 용감한 병사로 먼 길을 떠날거다. 밖은 늦가을비가 겨울을 재촉하며 추적거린다. 날씨가 더욱 추워지겠지. 춥고 가슴이 쓰리다. 피곤해서 얼굴도 자주 붓는다.

그러나 시련을 거쳐서 상처 투성이의 투쟁을 거쳐서 이제야 하나의 인간으로 궤도에 올랐다는 기쁨이 나의 가슴을 충일시키고 있다. 나는 결코 나의 학문과 이성과 지성이 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허공에 뜬 공론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실천과 행위 속에서 자신을 투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밖은 계속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훈련이 많이 고달프겠지. 날씨가 풀려야 할텐데. 안녕 나의 악마!

 

11월 19일 수, 1975년

오늘부터 틈나는대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시작. 그에

의해 유명해진 engage란 말을 씹어 본다. gage에서 유래된 동사. 저당물

인질 보증이란 말이다. Engagerfks 구속되다 끌어넣어지다 즉 그의 근본명

제, 허공에 뜬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상황(역사, 사회 현실) 속에 참여시킨

다 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자신을 구속한다는 말이다. 첫 장면부터 그 시사

함이 비범하다. 오늘도 비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식기를 닦는데 손이

고아 애먹다.

11월 20일 목, 1975년

종일 눈치코치 속에 투쟁 계속. 밤엔 노얄 생각하다. 불침반을 서다 소변을

보러 나가다.

아! 노야 나는 급히 돌아 와 이 노트를 다시 폈다. 이제까지 내리던 진눈깨

비가 거짓말같이 그치고 하늘엔 하얀 달이 파란 별과 같이 초롱초롱 쏟아지

지 않는가! 노야, 저 하늘을 봐. 확 눈 앞에 다가오는 저 밝은 원에 나는 멈

칫 바보처럼 서버리고 말았다. 마치 노야가 내가 무심코 연 문 앞에서 예의

그 환한 웃음을 띠고 빨간 오바를 입고 목이 긴 부츠를 신고 팔을 벌리고

서 있을 때와 같은 착각에 빠져 문을 열어놓고 한참이나 멍하게 서있었다.

기운이 무척 많이 내려갔다. 지금은 언제나처럼 달빛에 비껴서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매서운 추위에 손이 곱고 입술은 터져서 퉁퉁 부었다. 요즘은

온기라곤 일점도 없는 찬 물에 세수를 하고 캄캄한 밤에 식기를 닦으려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진눈깨비마저 내릴 때면 더욱 괴롭다.

오직 노야를 향한 나의 끊임없는 사랑의 집념이 나를 녹여주는 유일한 열기

일 뿐. 노야! 나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성실하며 강인한 너의 사내가 되겠다.

나의 사랑 안녕 잘 자요.

 

11월 21일 금, 1975년

RCT 훈련은 점점 닥아오고 날씨는 더욱 차가와 진다. 이곳 내무반엔 난로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 때면 몸이 뻐득뻐득해진다. 잠을 자다 너무

추워 깰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럴 땐 그립고 애닳게 보고싶은 이는 노야

너다. 지금도 자다 일어나 너에게 글을 쓰고 있다. 너의 꿈을 꿀 때면 네가

더욱 그립다. 노야도 자다 깨어나는 날이 많다고 했지. 그땐 내가 얼마나 그리울까?

그리고 앉아서 앉아서 형님의 옥중생활을 더듬어 본다. 그 고통이야 어찌 여

기에 갖다 댈 수 있을까. 마루 바닥에서 회오와 울분과 고통과 원통의 눈물

을 얼마나 씹었을까? 얼음덩이같은 찬 밥, 차가운 마루 바닥.

그러나 노여! 나는 이제 어떠한 것이 정말 진정한 삶에의 의지인가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영원성으로 이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행복의 길을 아는 만

족감으로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약간의 고통은 오히려 우리의 사랑에 인화

물이 되고 그 속에서 더욱 진정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는 道場이 되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저 눈보라 몰아치는 산하로 나는 떠난다. 모두가 빠질려 하

고 울상이지만 오히려 나는 가슴이 뛴다. 이 세상의 새로운 암호, 새로운 초월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더 완성되어 가는 나의 실존을 저 눈밭에서 만나게 될거다.

노야, 가을하늘 같이 청명하고 불꽃처럼 강인한 나의 여자가 되어다오.

안녕!

11월 22일 1975년

곧 RCT 훈련을 나가면 새로운 일들과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새로

운 훈련을 위해 나는 떠나리라. 가슴을 펄럭이면서 그리고 하늘과 초월을 생각하면서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을 걷고 차가운 시내를 건느리라. 이름모를 저 山河가 나를 부른다.

오전에 2시간 동안 군장검열, 이제 모레면 출발이다. 땅, 차가워진 하늘,

구름 한점 없는 저 푸르고 싸늘한 하늘. 너무 신선하면 사람도 저렇게

싸늘해 질까?

노야! 내 모습을 한번 볼래? 우선 겨울내의 2벌에 상의, 그위에 야전 내피,

외피, 그리고 위장망, 탄띠. 수통, 배낭을 맨다. 그리고 머리엔 수없이 많은

풀을 단 철모에 방독면을 찬다. 장갑은 반피 수갑제에 벙어리 장갑까지 끼고

M16 소총을 어깨에 매고 또 십자완장, 구급낭.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풀을 단다. 그리고 일어서면 노얄 널 안고 다니는 것보다 더 무겁다. 군인은

비상시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물건도 최대의 내구제로 최대로 몸에

달라붙게 간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군더더기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모두 똑같은 차림을 하고 하나의 명령에 하나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군화소리, 철커덕거리는 군장소리. 노야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게 소름끼치게 무서운 것은 나 자신 조차도 무언가의 우월감, 잔인성, 도구화, 일체의 개인적 사유와 자유의 이탈감에 스스로 도취된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각계 각층에서 모인 사람들의 모임에서랴! 그래서 저들이 오도하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한 것 같다. 나도 남과 똑같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다. 옷차림도 몸짓도 하물며 사고방식과 해야 할 일도. 그럴 땐 사람은 누구나 일체의 개인적 속성을 불식하고 이세계의 다양성의 파악을 불가능하게 하며 오직 한 가지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동류의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왜 그것이 파괴적으로 움직이느냐 하면 軍이란 그 속성이 폭력적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량한 행진곡으로 위안을 받을 수도 일체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노야, 이제 곧 RCT 훈련을 떠난다. RCT 훈련이란 4년마다 한번씩

하는 사단 대 사단이 하는 모의 전투다. 직접 사격만 안할 뿐이지 물자, 인

원, 차량, 화기, 작전면에 있어서 실전 그대로라 한다.

내가 이렇게 추운 날씨에 안 가도 되는 이 훈련을 기대하고 기대하는 것은

간접적이나마 인간의 비밀인 전쟁이란 것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기간은 일주일이다. 그 고생이야 말로 할 수가 있겠나. 겨울에 개구리의 모

든 내적 기관이 비상사태하에 적응하듯이 나는 내 자신을 이 일주일 동안 적응시켜야 한다.

피곤과 추위에 내 입술은 갈가리 찢어져 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열기에

뛴다. 누구보다도 늠름한 모습으로 나는 출발을 기다린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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