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과 실재성
인식의 가능성은 감관과 오성에 주어진 선험적 능력이다. 이때 선험성은 감관과 오성에 관계하지만 그 자체는 별개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인식 기관과 인식을 떠나서도 그것을 분별하는 성질로서 변화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자유의지의 경우 가능성 그 자체는 자유이고 자유의지는 그 실현 능력이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실현인 실재는 변화하나 실현 능력인 자유의지의 가능성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가 어떤 유토피아를 건설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다. 정신이 존재와 결부될 때 그 활동 영역은 가능성과 실재성이다. 정신이 존재를 파악함으로써 일치할 때 그것은 실재성이 되고, 불일치할 때 그것은 가능성 속에 있다.
가능성은 불일치의 영역이며 실재성은 일치의 영역이다. 가능성과 실재성이 초래된 현존재의 장소에서 현존재의 정신성이라는 것은 그 본질적 속성상 실재성, 즉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때 가능성⟶가능성/실재성⟶실재성, 또는 불일치의 일치로의 진행경로가 형성된다.
그런데 현존재(가능성/실재성)의 완전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운동관점을 망각한 현존재가 현존재적 완전성을 찾았다고 믿더라도 이러한 완전성은 다만 불일치 속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無)로 된다. 현존재적 완전성은 몰역사적인 것이다.
가능성/실재성 속에 있는 현존재는 일치를 결여하고 있는데, 이 결여가 비극의 본질이다. 가능성이 유(有)라는 판단도 실재성과의 연관에 의해 가능하다. 가능성이 유일 때 실재성은 늘 과정 중에 있으며, 이때 가능성은 실재성에 대해 우세하다.
실재성이 가능성과 동등해지는 것은 가능성이 완전히 드러나 운동 과정이 종결될 때이며, 이때 가능성은 무로 전환된다. 이때 실재성은 완전성을 이루며, 존재하는 완전성, 즉 신이 된다. 이 경우 원인과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가능성과 실재성을 대립물이자 동시에 동일물로 볼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진아, 즉 진정한 자아를 가능성이라 하고, 현재의 자아를 실재성이라 하면, 양자는 공히 ‘나' 라는 통일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대립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바로 고향을 가졌던 자, 그러 나 고향을 상실하고 있는 자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성과 그 가능 성의 구현인 실재성을 하나로 보면서 동시에 이 양자를 대립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이 증대해 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인식이 더욱 더 증대하여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나의 인식이 이렇게 증대할 때 그것을 통해 신이 가진 것으로 상정되는 완전성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완전성에 이르는 잠재력이 이미 나에게 내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완전성의 이념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 인식이 증대해 간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인식은 그렇게 증대해 가는 과정에서 그 전제인 가능성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인식은 매 단계에서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가능성을 무로 보았고, 오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는 어느 단계에서 인식하지 못한 것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나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고 이것이 사유의 결과라면, 이 결과의 원인으로 전제되어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궁극 문제다. 이 가능성은 경험적 실재성이 아니기에 경험에서 떠난 순수한 것으로서 정립되어야 하지만 오직 경험에서 실현될 때에만 인식되므로, 가능성과 실재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경험에 의해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능성을 경험에 의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 가능성은 오직 실현 결과와 등가인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지지 않고 단지 경험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경험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칸트의 용어를 빌면 아프리오리(a priori)이다. 이 아프리오리는 시간적, 심리적 발생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의미하는 아프리오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아프리오리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칸트의 아프리오리는 경험적인 것을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 보편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이 아프리오리를 가능성의 한 측면이지 그 자체가 분리되고 독립된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란 경험적 실재성과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칸트가 도입한 아프리오리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가 아프리오리한 것과 관련짓는 선험적 인식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아프리오리한 인식도 경험에서 그 설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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