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회향학적 원리(10)
by 현승효 | 23.05.01 15:52

현승효사상 연구

 

자아의 경우 가능성이 실재성과 분리될 수 없는 연관 속에서 투쟁을 통해 실재성으로 전환되는 운동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유이자 무’인 가능성은 실재로 드러나는 경우에 비로소 인간적 사실이 된다. 이 가능성으로서의 진아, 잃어버린 고향은 자아에 대해 닫힌 세계다. 그것은 실재성의 완전한 구현인 완전성에서 우리에게 열린다. 신이란 우리 고향의 실현, 진아의 완벽한 투사이지, 현존재적 자아의 투사가 아니다. 자아가 진아로 되려는 과정에 있을 때 진아는 자아에 대해서 언제나 우세하다. 우리는 신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본다.

 

실재적 완전성을 이루는 무한한 존재, 즉 신의 경우 원인으로서의 가능성은 무로 되므로, 그 자신이 원인이어야 한다. 신은 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그 원인은 신에 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원인성을 자체 내에 가지는 실재적 존재이므로 바로 자유의 실현이다. 신은 자유의 대상화이고 진아, 즉 우리 고향의 구현이다.

 

이러한 신은 상황적 나인 현존재적 자아에게는 여전히 닫힌 상태로 남아 있다. 신이 인간에게 늘 미지수라는 것은, 우리의 진아인 가능성의 완결이 우리에 대해 늘 유보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단지 진아이기를 바라는 자이지 진아는 아니다. 따라서 현존재인 인간은 결코 신일 수 없다.

 

유보된 자아에게는 가능성이 판도라의 상자이듯이, 완전성으로 투사된 진아, 즉 신은 언제나 희망과 소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미지수는 희망과 공포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제 가능성 속에서 진아를 발견한 우리는 모두가 루시퍼가 된다. 이것은 반역도 배반도 아니다. 단지 인간의 비애와 선망일 뿐이다. 성서에서 절대 신의 지위에 도전한 루시퍼야말로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다. 루시퍼야말로 진아이기를 바라는 자아의 현신이다.

 

그러면 신이 오직 천상에 군림하는 절대불가침의 존재로서 자아 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그 주권 하에서만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고 보는, 인간의 자기비하와 전락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물을 수 있다. 이처럼 신의 주권 하에서만 의의를 부여받는다고 믿는 신앙인들은 사실상 영원히 회향을 포기한 우주의 미아다. 그들은 회향적 투쟁을 포기한 채 섭리의 흐름에 몸을 맡겨 버리 고 있을 뿐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하는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사유 습관에 기인한다.

 

즉 그것은 결과에서 원인을 도출해 낸 후 이제 머릿속에서 결과를 원인이라고 재구성한 것이다. 완전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신은, 인간이 그려낸 것이 아니고 ‘나'라는 불완전한 정신에 의존하지도 않는 영원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을 진아⟶자아⟶회향의 실현자인 범아에 이르는 전체 경로에서 고찰하면,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원인이라기 보다 완전성에 이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가능성과 실재성의 불일치가 완전성 속에서 일치되며, 과정으로서의 운동은 모두 종결되는 것이다.

 

존재는 불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에서만 확인된다. 존재는 유한한 양적 개념인 시공 속의 변화량, 즉 증대나 감소 또는 변화의 형태에서만 확인된다. 따라서 가능성과 실재성이 교합하는 현존재에서는 늘 어느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일치로 파악된다. 이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현존재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자체는 현존재에 있으면서 현존재의 외부에 있다. 이것은 우주의 핵심체가 우주 안에 내재함과 동시에 우주의 외부에 있음과 동일하다.

 

현존재로서 완전성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자, 현존재적 완전성을 요구하는 자는 완전성의 이름으로 현존재적 존재 이상인 인간 존재를 현존재에 국한시키고 위축시킨다. 이 경우 일체의 운동 진행으로서의 변증법이 부정되며, 불일치가 영구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타살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우리의 적을 발견한다. 즉 불일치를 고착시키는 현존재적 완전성 속에 머무는 존재는 이데 올로기의 형태로, 신격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또는 절대화된 권위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불일치의 고착화에 의해 필연적으로 자유에 맞선 절대세력으로 귀결되고 개인숭배를 강요한다.

 

이는 대중적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기독교 전통을 지닌 서구사회에서 자유가 증가하고 신적 존재에서 벗어남으로써 불안하게 된 인간 정신이 이 불안을 해소하려 함으로써 파시즘이 대두할 수 있었다는 에리히 프롬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그는 의존적 존재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빠지게 되는 불안을 잘 이해했다. 그러한 불안은 완전성에 비춰본 대상과의 불일치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프롬은 복종과 연대에 의한 불안의 해소라는 파시즘의 메커니즘을 이야기할 뿐, 순수 자유를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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