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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스님의 제자리찾기
2005년 ‘친일파재산 위헌법률심판청구’를 시작으로 리움박물관을 상대로 ‘현등사 사리구 반환’ 운동 등 반출된 불교문화재반환운동 참여. 2006년 동경대학 소장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반환운동 주도.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 앞장서며 2011년 일본정부로부터 불법반출된 1205점의 문화재 돌려받는데 공헌했다. 지은책으로는 <조선을 죽이다> <의궤-되찾은 조선의 보물>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등이 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대표로 잘못된 우리 문화재의 진실을 바로잡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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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쿄국립박물관에 조선황실투구가 있을까

글쓴이 : 혜문스님 날짜 : 2013-02-08 (금) 13:35:47


 

조선왕실투구 드디어 수면위로 올라 오다


 

2013년 2월 5일.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조선왕실투구의 특별열람이 허용되었다. 그동안 박물관 수장고에서 일반인에게 전혀 공개되지 못하던 문화재가 드디어 역사의 부름에 의해 수면위로 올라 온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용봉문 투구에 말을 건 것은 2010년 4월이었다.


 

  
▲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조선왕실 투구

 

우리나라 국회의원 6명과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 문제로 방문했던 날, 나는 국립박물관 관련자에게 용봉문 투구를 왜 공개 혹은 전시하지 않는가에 대해 물었다. 박물관 직원은 내게 나중에 연구 목적으로 보고싶다면 '특별열람'을 신청하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매년 조선왕실투구의 특별열람을 신청해 왔다. 물론 박물관 자체 사정을 이유로 번번히 거절해 왔지만.


 

  

▲ 야스쿠니 신사 소장 조선 원수 투구


 

내가 용봉문 투구에 주목했던 이유는 '임금의 투구'일 가능성이 커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용봉문 원수 투구'와 다르게 양 옆에 날개가 달려 있는점, 이마 가리개에 '봉황(鳳凰)'이 장식되어 있는 점, 투구의 머리장식이 삼지창 형태가 아니라 화염문으로 구성된 점 등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제왕의 투구형태로 추정되어온 러시아 표트르대제민족 박물관에 남아있는 용봉문 투구와 명확하게 일치하는 면도 그런 추정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엄밀히 고증(考證)하자면 그런 정황(情況)을 뒷받침해줄 특별한 기록이 없었기에 '임금의 투구'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아쉬움이 있었다.


 


 
▲ 러시아 표트르 대세 민족 박물과 소장 투구. 조선시대 임금의 투구로 추정된다.


 

2010년 11월 '조선왕실의궤 반환절차'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도쿄에 갔을때, 문화재 환수운동의 협력관계에 있는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 이소령 선생님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제시대 도굴왕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직접 유물의 출처(出處)를 기록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란 책을 구했다고 했다.


 

이소령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을 펴자마자 나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용봉문 투구에 대한 출처부터 확인해 보았다. 오구라는 이 투구가 '조선왕실의 전래품'이라고 기재해 놓고 있었다. 나의 예상대로 이 투구는 조선의 제왕이 사용했던 투구로 대대로 전래해 왔던 물건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오구라가 직접 기록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 조선왕실 전래품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소령 선생과 나는 너무 좋아서 한참동안 수다를 떨었다. 일제시대 오구라가 우리나라에서 불법적으로 수집해서 일본으로 반출(搬出)했고,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개인 소유품이란 이유로 반환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1982년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마치 '합법적인 취득물'처럼 둔갑(遁甲)해 버린 1,100점의 오구라 컬렉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의 소유품이라면 개개인의 매매로 유통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궁내부장관'이란 부서가 '조선 왕실의 유물과 재산을 관리했으므로, 허가없이 왕실의 물건이 민간이나 해외로 유출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하물며 '임금의 투구'와 같이 상징성 큰 물건이 매매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도굴 혹은 절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 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 이소령 선생과 나는 오구라 컬렉션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조선왕실 투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매년 특별열람을 신청해 왔고, 여기에 더 큰 명분을 갖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한편 고종의 후손인 황사손(皇嗣孫)을 찾아가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해 왔다. 그 결과 2013년 2월 5일 특별열람을 성사시켜 투구 문제를 수면위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황사손은 왜 비밀리에 단독 열람을 신청했을까?


 

그런데 뭔가 중간에서 일이 틀어져 버린 감이 없지 않다. 2012년 8월 중순까지 일본 시민단체, 국회의원 그리고 문화재제자리찾기 등과 함께 협력하면서 도쿄 국립박물관에게 특별열람 허용과 오구라컬렉션의 문제를 제기해 오던 황사손의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황사손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난 수년간 노력해 왔던 사람들 몰래 일본에 가서 비밀리에 단독으로 '특별열람'을 신청했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한다. 혹시 내가 뭔가 그분에게 큰 실수를 했기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 곰곰히 반성해 봐도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로 그분을 지난 12월 찾아가 1시간 가량 면담해 보았다. 그분의 말씀은 '본인이 직접 문화재 환수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時機尙早)인듯 하다. 우선 후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열람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단독 신청했다"는 말씀이었다.


 

사실 나는 도쿄국립박물관의 수차례의 공개거부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컬렉션의 문제점을 지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특별열람 성사이후 어떤 단계로 운동을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단지 ‘후손으로서 효를 다하겠다’는 감정적 이유로 특별열람을 단독으로 신청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아가 황사손만의 특별열람이 허가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특별열람은 제한될 가능성이 크고, 나아가 미공개를 이유로 하는 정보공개청구 소송의 명분을 사라지게 된 것은 환수운동의 측면에서 아쉬운 면이 컸다.


 

또 한가지는 특별열람에 대한 준비부족이었다. 투구의 공개는 단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선왕실투구에 대한 깊은 공부와 열람의 준비를 철저히 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군사복식과 제왕 투구의 기본적 특성에 대한 비전문가들로 열람단을 구성한 것은 지나치게 감정이 앞선 행위이자 문화재 조사의 사전준비가 불철저함과 동시에 문화재 환수운동의 기본틀을 인지하지 못한 실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중대오류 발생– 대한제국 이후에 만들어졌다?


 

2013년 2월 5일 나는 뉴욕에서 황사손이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 투구를 특별열람했다는 연합뉴스 기사를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좀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구절을 발견했다.


 

황사손이 “투구의 경우 1897년 대한제국 설립 후에 국화로 사용한 이화(李花.자두나무꽃) 문양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대한제국의 것이 확실하고 갑옷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었다.


 

조선의 군제는 1880년대 신식군대가 창설된 뒤, 점차 구군제는 사라지고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 창립이후는 신식군대 위주로 군제가 개편되었고, 고종 역시 신식군복을 착용했기 때문에 구군복인 용봉문 투구가 대한제국 창립이후 만들어질 가능성은 전무한 일이었다.


 

황사손이 확인했다는 이화문 역시 다른 용봉문 투구들에게 모두 발견되는 일반적인 형태에 불과할 뿐, 대한제국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로 인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투구를 열람한 황사손의 발언은 조선시대 군사복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비전문가의 의견일뿐, 실제 제왕투구의 특성을 설명할 수 없는 오보(誤報)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비전문가들로 특별열람단이 구성되었기에 좀더 자세히 투구의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특별열람 이후 사실관계가 틀리게 보도된 언론을 리서치할 도쿄 국립박물관의 반응을 생각하면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조선시대 영조년간 이봉상 원수 투구. 여기에도 역시 이화문이 보인다.


 

여전히 남은 기나긴 환수의 여정


 

뉴욕으로 오기전인 2013년 1월 11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소령 선생을 비롯, 일본 시민단체 사람들과 투구문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황사손이 그동안의 네트워크를 무시하고 왜 단독으로 비밀리에 특별열람을 신청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 였다.


 

그들은 내게 황사손이 특별열람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 설명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도 특별열람 이후 반환운동을 전개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멋쩍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일본 학자들과 함께 비전문가들의 일회성 열람이 아니라 조선 제왕의 투구가 지닌 특성을 규명(糾明)하고, 향후 이 문화재를 원산국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정밀한 조사차원에서 다시 한번 특별열람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대로 투구 문제를 놓쳐 버리기에는 수년간 들인 노력이 아깝기도 했다.


 

지난 수년간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진행하면서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개별의 사람들이 갖는 각각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었다. 황사손이 후손으로서 갖는 감정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짐짓 수습(收拾)이 어려운 심경을 감출 수 없다. 조선왕실투구가 우리나라로 되돌아갈 날은 아직도 쉽게 오기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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