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직장 동료들과 서해안의 위도로 바다 낚시를 갔다. 출항 때는 날씨가 화창 했는데 오후가 되자 갑자기 잔뜩 흐려지면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급히 배를 돌려서 변산 항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선장이 혼신을 다해 항구 쪽으로 배를 모는데도 전진하기는 커녕, 뒤로 밀려가는 것 같았다. 항구가 보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니 불안하고 초조했다. 저체온증을 막기 위해 긴팔 옷을 꺼내 입었다.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 들 수 있게 구명조끼를 입고 구명대를 안고 갑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상황을 살폈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은 환호성을 지르며 부두로 뛰어 내렸다. 지금 바로 눈 앞에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가 빤히 보이는 데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과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정상으로 올라가기 바로 전의 稜線(능선)을 올려다보니 바람에 춤추는 키 작은 풀들이 태풍에 밀려오는 파도의 기세로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안다. 과정이 같으므로 결과도 똑 같은 해피 엔딩일 것이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정상적인 컨디션이라면 한 시간 정도면 될 만한 코스다. 주변의 풍경들이 흑백 영화 속의 슬로모션 장면처럼 아주 느리게 스치듯 흘러갔다. 현재가 아니고 과거에 걸었던 길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마 전생에 이 길을 걸었던게 아닐까? 현실감을 상실하고 몽상에 빠져서 느릿느릿 걸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긴 시간이었다.
뜬금없이 학창 시절에 대한 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던 ‘사상 최대의 작전’ ( 원작 소설명은 THE LONGEST DAY ) 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첫 하루를 생생하게 재현한 영화다. 쏟아지는 포탄 때문에 참호 속에 갇혀서 옴짝 달싹 못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약 연기와 흙 먼지가 피어 오르는게 보였다. 희생이 컸지만 결국은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 하는 장면에서 관람하던 까까머리들은 환호하고 열렬한 박수를 보냈었다. 나도 지금 살아온 인생 중에 가장 힘들고 긴 THE LONGEST DAY를 맞고 있다. 이 또한 지날 갈 것 이고 환호의 시간이 올 것이라 믿었다.
정신없이 걷다가 메르디 히말 베이스 캠프 (MBC)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도 모르게 함성이 아니라 괴성을 질렀다. 고산병의 통증도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 맨 먼저 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자가 태어나고 7개월 밖에 안됐을 때 한국을 떠나 왔으니 할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한번 안아 보지도 못했다. 이제 돌아가면 ‘히말라야 할지’라고 부르겠지 ? 감개무량이란 말은 이럴때 쓰는 거구나. 걸어 다니는 질병 종합세트였던 내가 66살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4300미터에 올라섰구나.
푸 하 하 하 ^^^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내와 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변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인증 샷을 찍느라 분주한데 나만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한참 지나자 바라또가 휴지를 건네 준다. 눈물을 닦고 눈이 마주치자 서로 얼싸안고 등을 두드려 주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 그리고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히말라야 트랙킹에 도전한 것이다. 이제 비로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희망, 용기, 자신감, 도전, 행복 등등 긍정의 모든 단어들이 한꺼번에 반짝이는 별처럼 떠올랐다.
하산길은 언제 고산병에 시달렸냐? 는듯 빠르게 내려왔다. 일반적으로 메르디 히말 트랙킹은 4박 5일을 잡지만 고산증 때문에 5박 6일로 늘어났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산행을 한다고 했는데 남 보다도 훨씬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만족이다. 남은 인생을 감사하며 살기로 했다. 히말라야에 올라 선 남자답게 당당하게 살아 갈 것 이다.
히말라야에 힘들게 올라가서 놀란 건 그 척박한 땅에서 네팔리들이 양을 키우며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 이었다. 등산객들에게는 힘든 도전의 산이 그들에겐 그냥 삶의 터전 인 것 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것과 반대로 그들은 자기들이 일상을 사는 곳에 왜 그리 요란을 떨며 죽기 살기로 오르려 하는지 신기해 보일 것 이다. 다음번에는 노가다 등반이 아니라 그들과 오랫 동안 함께 지내며 여유롭게 산 생활을 즐겨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내 인생은 히말라야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고 믿는다. 세상을 바꿀수는 없지만 나를 바꿀수는 있다. 인생 1막은 일과 가족에 헌신하며 살았다. 은퇴하고 인생 2막은 완전한 은퇴가 아닌 반퇴 였지만 제법 여유있게 보냈다. 히말라야 이후 인생 3막이 새롭게 시작 된다. 진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할수 있는 것만 하고 살 것이다. 적당히 살지 않고 소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세상의 아싸가 아니라 내 인생의 인싸가 되어 살고 싶다. 김형석 교수의 말처럼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 60대야 말로 진짜 인생의 황금기다. 여행하다가 길에서 죽는 客死(객사)야 말로 가장 멋진 엔딩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변에 여행하다 길에서 죽는게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 동지들이 여럿 있다. 내년 봄에 객사를 소원하는 별종들과 뭉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진짜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여행하고 책 쓰기에 몰입하는 내 모습을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해발 7,200m의 마차푸츠레는 네팔인들에게는 신성시 되는 산이다. 지금도 이 산 만은 입산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석양 무렵 황금빛으로 물든 안나푸르나의 모습이 장엄하다. 왼쪽부터 안나푸르나 3봉, 2봉 , 4봉이 이어져 보인다.
두번째날 묵었던 해발 2550미터의 포레스트 캠프는 평화로운 산촌의 전형 이었다, 추운 겨울에 대비하여 장작 쌓기가 한창이었다.

9월이었는데도 밤에는 추워서 드럼통에 진흙을 발라서 만든 난로에 장작불을 펴야 한다.

메르디 히말 베이스 캠프로 올라 가면서 건너편 쪽의 안나푸르나 가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 했다.
네팔리 세르파인 바라또가 기념 사진을 찍자고 했다. 네팔리들은 사진기를 대면 웃다가도 금새 표정과 몸이 굳어진다.
시간이 흘렀지만 히말라야 올라 간 남자의 기쁨이 그대로 느껴진다. 휴대폰 바탕화면으로 깔았다.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 , 자랑스러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다.
고산에서 가장 효과적인 운송 수단이 노새다. 작지만 힘이 강하다. 고산병에 걸리면 노새에 실어서 산 밑까지 내려 보낸다.
하산 하면서 보이는 풍경들은 올라 갈 때 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였다. 역시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 높은 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예쁜 마을들이 있었다.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고 사는 태고적 생할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음번에는 저런 마을에서 한 달쯤 살아볼 생각이다.
메르디히말 베이스(MBC) 캠프에서 내려오던 날 마차푸츠레 상공에 구조 헬기가 계속 날아 다녔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러 나섰던 한국인 베테랑 산악 대원 3명과 세르파가 계곡에서 돌풍으로 인한 눈사태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체는 모두 수습되어 장례를 치렀지만 애석하기 한이 없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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