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의 가을(7)
중남미 원주민 학살과 교회
인류역사 최대의 홀로코스트
나는 어린 시절 세계사 시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웠다. 만일 시험에 이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다른 답을 써냈다면 틀린 것으로 채점되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콜럼버스 이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인간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야생동물 수준의 야만인(野蠻人)들만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매우 위험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앞선 글에서 백인들에 의한 원주민 학살과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 사람들의 교류가 있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 상륙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신대륙 발견인가, 개척인가. 내 생각으로는 콜럼버스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의 아메리카대륙 ‘침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백인들에 의한 북미와 중남미 원주민 수난사를 살펴본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의 정확한 인구는 모른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인구센서스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치자들이 자신의 관할구역 인구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유럽이나 다른 대륙의 사정도 비슷했다. 따라서 학자들마다 추산 인구가 크게 다르다. 학자들은 콜럼버스 침공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를 최소 5천만 명에서 많게는 1억 2천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1천 만 명, 멕시코 등 중앙아메리카에 2500만 명, 남미에 2천만 명 등 5천만 명은 넘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이는 당시 세계인구 추정치와 대륙의 면적 등을 감안한 추산이다.
콜럼버스 침공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남미에 잉카제국,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마야제국 등 통치, 행정체계가 갖추어진 두 개의 대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에 나바호, 체로키, 아파치, 이누이트, 카이나와 족 등 54개 부족과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아즈텍 등 13개 부족 그리고 남미의 잉카, 과라니족 등 7개 대부족들이 독자적인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4백 년 역사의 잉카제국은 건축과 천문학, 수학 등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잉카제국은 에콰도르 퀴토에서 칠레 중앙까지 3250마일(5200km)에 이르는 2개 간선도로를 만들어 4.5마일마다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을 상주시키고 12마일마다 휴게소를 겸한 객사(客舍)를 두는가 하면 5마일마다 전령을 위한 우체국을 설치했다. 마치 2천 년 전 로마제국이 아피아가도를 통해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잉카제국도 잘 갖추어진 교량과 도로망을 통해 인구 1300만의 광대한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면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그 많던 원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무렵 약 5억 명 정도로 추산되던 세계인구가 현재 70억을 넘었고 당시 5백만 명 정도의 우리나라 인구도 남북한 합해 7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를 감안한다면 만일 백인들의 침공 없이 정상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면 지금 쯤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는 최소 5억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 원주민은 북미주에 약 5백만 명 페루와 볼리비아에 산재한 원주민은 수천 만 명 정도이며 백인과의 혼혈(메스타소)까지 포함해도 1억 미만으로 추산된다. 이는 전체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체 인구 약 9억 명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이다. 그나마 이 숫자는 직접적인 원주민 학살이 사라진 20세기 초반부터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포르투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인들은 경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1차적으로 원주민들에게 몰아닥친 재앙(災殃)은 홍역과 천연두 등 유럽인들에 의해 옮겨진 전염병으로 그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질병들이었다. 이들 새로운 전염병은 70%에서 90%에 이르는 높은 치사율을 보였다. 학자들은 이 같은 전염병이 유독 높은 치사율을 보인 원인으로 원주민들이 오랜 세월 다른 인종과 접촉이 없어 높은 수준의 유전적 동일성을 가졌다는 것과 말과 돼지 등 유럽에서 건너 온 새로운 동물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던 점 그리고 전염병이 퍼졌을 때 사람들이 환자를 간호하고 치료한다는 이유로 격리하지 않고 함께 있었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이런 전염병들은 부족 전체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또한 두 번 째 재앙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다투어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학살과 노예화이다. 백인들은 새로운 땅을 제각기 식민지로 만들면서 이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인종청소에 다름없는 학살을 자행했다. 특히 중남미 카리브해 연안과 아르헨티나, 칠레, 우르과이 및 미국의 일부지역에서는 아예 멸종한 원주민 부족들도 상당히 많았다.
주로 중남미 지역은 가톨릭을 앞세운 스페인에 의해 원주민 학살이 자행되었고 미국에서는 주로 청교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결국 가톨릭이든 청교도들이든 하느님을 앞세운 기독교도들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인류역사상 최대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 원주민들은 신기한 배와 이상한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들로 알았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만찬을 베풀고 콜럼버스가 타고 온 배 중 한척이 파선된 것을 구조하고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여 수리까지 도와주었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콜럼버스 일행은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며칠 후 안정을 되찾자 악마로 돌변해 원주민 마을을 기습 공격하여 순식간에 거의 모든 주민을 살해하고 그들의 왕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만행은 시작일 뿐이었다.
여왕이 통치하던 도미니카섬 원주민 하라과 왕국은 콜럼버스 일행이 수차례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 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원주민들의 은혜를 갚겠다며 여왕과 귀족, 유력자 3백여 명을 만찬에 초청해 몇 채의 가옥에 모이게 한 후 60여 명의 기병과 3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그들을 불로 태워 죽였다. 불을 피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귀족들은 군인들이 창으로 찔러 죽였다. 여왕에게는 경의를 표한다며 총칼을 사용하지 않고 목매달아 죽였다. 현장에서 간신히 피신한 사람과 주민들도 끝까지 추적해 모두 노예로 삼았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은 식인을 즐기는 잔인하고 욕심이 많고 타락한 영혼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될 수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금을 채굴시키려고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고 그의 만행을 정당화했다. 백인들은 원주민 노예부부가 함께 살면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해 만나지도 못하게 했고 젖먹이 아기들을 빼앗아 바위에 던져 죽였다.
이러한 백인들의 만행에는 중세기 가톨릭교회도 큰 책임이 있다. 1493년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신대륙 정복을 찬양했다. 이에 힘입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신대륙 선교를 명분으로 남미대륙 침공에 앞장섰다. 교황청이 이들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준 셈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가톨릭 수도회(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사제들을 앞세워 전교를 구실로 원주민에게 다가갔다. 물론 대부분의 사제들은 순수한 종교적인 열정으로 선교하고 원주민에게 동정을 베풀었다. 오래 전 인기를 모았던 영화 ‘미션’도 당시 순수한 사제들의 활동상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이들을 앞세워 개종을 거부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피사로(1475-1541)는 불과 18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랜 역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카하마르카에 완전무장한 군대를 매복시킨 후 잉카제국 황제 이타우알파를 회담하자며 유인했다. 황제가 도착하자 피사로를 따라 온 발베르데 신부가 느닷없이 황제에게 성서를 건네며 하느님과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했다.
격분한 황제가 성서를 땅에 집어던지자 이를 신호로 스페인 군대가 대포와 총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비무장 원주민 5천 명이 순식간에 살해당하고 황제는 피사로가 직접 손으로 사로잡았다. 사로잡힌 황제는 그들의 요구대로 황금을 방안 가득히 채워주고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약속된 대로 황금을 받고는 황제에게 이교도로서 사형당하거나 기독교로 개종해 교수형을 당하는 두 가지 중에 선택하도록 했다. 이타우알파 황제는 후안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잉카제국의 유물과 값비싼 보물들은 스페인과 교황청으로 옮겨져 현재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정복자들은 잉카제국의 제단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교회와 총독관저를 지었다. 그들에 의해 잉카문명은 철저히 말살되었다. 오랜 역사와 문명을 간직한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도 그 후 동료와 영지문제로 다투다 암살당했다.
또 다른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1485-1547)는 1521년 말 16마리와 5백 명의 군사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 아즈텍의 수도를 공격해 75일 만에 정복했다. 그는 아즈텍의 왕을 체포하여 보물 숨겨둔 곳을 밝히라며 고문한 후 처형했다. 그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악랄한 정복자였다. 정복자들은 한결같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고유문화를 말살했다. 또한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의 보화와 문화재를 유럽으로 실어갔다. 이들의 원조 격인 콜럼버스는 자신의 업적에 도취되어 1493년 2월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도중 스페인 왕에게 교황청에 편지를 써서 자기 아들을 추기경에 임명하도록 해달라는 편지와 함께 예루살렘의 이슬람과 전쟁하기 위한 5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을 동원할 군사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는 원주민들의 귀를 자르고 불에 태워 죽이는 등 공포통치로 악명을 드높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할 당시 중앙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약 2500만이었는데 백년 후 인구가 100만으로 줄었다는 백인들의 기록도 있다. 이는 정복자들이 대부분의 원주민을 학살했거나 살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주민들은 차츰 백인들과 피가 섞여 ‘메스타소’라는 혼혈인종이 생겨났고 ‘인디오’라 불리는 순수 원주민들은 페루와 볼리비아 등 안데스 산맥 주변으로 밀려났다. 또한 콜럼버스에 의해 멸종되다시피 한 하이티 등 가리브해 도서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 온 흑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딘 후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학살과 착취를 생생하게 목격한 보고서가 출판되었다.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 발트로메오 라스 카사스 신부(1474-1566)가 기록해 스페인 왕 카를 5세에게 보고한 보고서에서 그는 정복자들이 이른 바 '3G(Glory, Gospel, Gold) 성취'라는 목표를 세우고 원주민 1억 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1억 명이라는 숫자는 입증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그가 보기에 도처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원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음을 뜻한다.
역사가이자 수도자인 그는 아메리카 최초의 수도사로 ‘인디오의 수호자’라고 칭송받고 있다. 1474년 세비야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502년 아버지와 함께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동행했다가 귀국해서 신학공부를 한 후 사제가 되어 1510년 아메리카로 돌아간다. 1513년 군종 사제로써 쿠바 정복 등 많은 탐험에 참가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마구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1515년 스페인으로 돌아가 원주민 처우를 개선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1519년 스페인 의회에 참석해 카를 5세 앞에서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이 협력해서 신대륙에 '자유 인디오 도시'를 세우는 계획을 발표해 승인받았다. 1520년 12월에 다시 신대륙에 와서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 원주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합심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자고 주장했지만 양쪽 모두의 반발로 1522년 실패로 끝났다. 그는 1523년 수도회로 돌아가 1526년 ‘변명의 역사’를 저술하는 한편 스페인의 원주민 통치기구인 인디아스 자문위원회에 해마다 원주민을 억압하는 인물과 기관들을 고발했다.
1537년 ‘인류를 참된 종교로 이끄는 유일한 길’에 관한 책을 저술한 그는 다른 수도사들과 그때까지 정복되지 않은 코스타리카 골포둘세 원주민 영토로 가서 평화적으로 전교했다. 1544년 멕시코 치아파스 교구 주교로 임명된 그는 현지에서 스페인 신부들에 대한 훈계와 규정을 만들어 시행했지만 백인신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1547년 스페인으로 귀국해 서인도 역사를 저술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1551년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그들도 인간이며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써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반박하여 논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식민 통치자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1562년 ‘인디오의 역사’ 서문을 출판한 그는 1566년 7월 17일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따라서 ‘인디오의 역사’는 그의 사후 1602년 출판되었다. 그는 콜럼버스가 남긴 항해록 필사본을 콜럼버스 아들 디에고로부터 입수하여 그 내용을 간접화법으로 바꿔 요약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현재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998년 10월 12일 온두라스의 한 인디언 마을에서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한지 506년 만에 콜럼버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이 거행되었다. 이날 행해진 모의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원주민 학살을 비롯해 납치, 절도, 강간, 침략, 노예무역, 민족말살, 고문 등 침략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15세기 복장의 콜럼버스 전신 초상화에 9발의 화살을 쏘아 처형을 상징했다. 원주민 마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이제 침략자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떨쳐버리고 모든 인류가 화합하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자“고 말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난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에 따라 ’회상과 화해 :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서를 발표해 과거 가톨릭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범한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했다. 일주일 후 3월 1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신대륙 원주민 학살 방조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에 대한 이단 심문, 십자군 원정, 유대인에 대한 차별, 다른 종교와의 반목, 여성에 대한 억압, 기독교의 분열 등 교회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일일이 거론하면서 그에 대해 인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침략 당사자들인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움직임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기야 뒤늦게 사과와 참회가 이어진다 해도 원주민의 80% 이상을 말살한 인종청소의 죄악은 인류의 영원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2014.11.18 뉴욕 虛壙)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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