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벗님들께 보내는 쉰세 번째 편지
벗님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는 완연(宛然)한 가을입니다. 가로수들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가고 새벽에는 벌써 난방이 돌아가지 시작합니다. 미국은 코로나 백신 부스터 샷이 실시되어 많은 사람들이 접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신규 확진자는 10만 명을 웃돌고 있습니다. 이미 누적 확진자 4,550만 명, 사망자는 74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한국의 6배 정도임을 감안하면 한국으로 치면 750만 명이 발병해 12만3천 명이 사망한 셈입니다. 한국은 미국, 일본 등에 비하면 매우 성공적으로 팬데믹을 방어한 셈입니다. K방역에 세계가 놀라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코로나 초기보다는 백신효과로 확진자에 비례한 입원환자와 사망자는 코로나 초기보다 훨씬 감소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미국도 본격적 ‘with corona' 시대로 접어드는 모습입니다. 도로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트래픽이 심한 느낌입니다. 한국 언론을 보면 우리나라도 백신접종율이 80%에 달하고 부스터 샷도 시작됐다고 하니 어차피 독감처럼 해마다 백신을 접종하면서 코로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10월11일은 미국 연방공휴일 ‘콜럼버스데이’였습니다.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올해부터 10월 둘째 월요일 콜럼버스데이를 ‘원주민의 날’(National Aboriginal Day)로 선포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태고부터 아메리칸 원주민과 알래스카와 토착 하와이인들이 세대에 걸쳐 다양하고 활기찬 문화를 건설해 왔다”며 “그동안 미국이 ‘평등과 기회’에서 많은 진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원주민들의 존엄성과 권리존중에는 부족했으며, 특히 연방정부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흡수하며 그들의 토착문화를 근절하는 방향을 추구해 왔다”고 성찰(省察)했습니다. 또한 그는 “공공서비스, 기업, 학문, 예술 등 수많은 분야에서 원주민의 역사적 기여는 국가와 문화, 사회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며, 연방정부는 원주민의 미래에 투자하고 토착민들이 공동체를 통치하고 고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은 “이런 취지로 원주민의 날에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번창 중인 미국의 첫 주민인 원주민들을 기억하면서 우리 위대한 미국을 구성하는 원주민 문화와 공동체를 모두 인정하고 기리기를 독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대통령은 별도 콜럼버스데이 성명에서 “오늘날 우리는 많은 유럽 탐험가가 토착민과 원주민 공동체에 가한 옳지 못하고 잔혹한 역사를 인정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원주민의 날을 선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콜럼버스의 날 성명에서 콜럼버스를 ‘용감무쌍한 영웅’으로 평가했었습니다.

2016년 뉴욕에서 열린 원주민축제
콜럼버스데이는 1492년10월12일 이태리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세 척의 에스파냐 함대를 이끌고 바하마제도 과나하니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백인들은 이날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이라며 대대적으로 기리고 있으며, 미국 교과서에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콜럼버스 달걀’이라는 정체불명의 일화도 ‘발상의 전환’ 대명사처럼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한국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대부분 동양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전설입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그는 인류역사에 긍정적 업적을 남긴 영웅이 아니라 부와 명예욕에 불탄 모험가일 뿐입니다. 그는 거대한 대륙의 무고한 원주민들을 대량학살했으며 살아남은 원주민들을 자손대대 빈곤과 억압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초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콜럼버스데이는 백인들의 일방적 논리에 따른 그들만의 축제이고, 원주민들에게는 원한 맺힌 날이며 우리네 동양 이민자들도 기꺼이 동참하여 기념할 축일은 아닙니다.
콜럼버스는 처음 포르투칼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에스파냐를 찾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부부에게 만일 자신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할 경우 기사와 제독작위를 수여하고 발견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이곳에서 얻은 모든 수익의 10분의 1을 요구했습니다. 에스파냐 왕은 처음 이를 일축했으나 당시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했던 가톨릭교회 설득으로 수락하고 그를 해군제독에 임명하고 2척의 선박과 전과자들을 사면해 준다는 조건으로 모집한 승무원들까지 딸려주었습니다. 6년간 준비 끝에 그가 1492년8월3일 팔로스항을 출발할 때는 필손이라는 선장이 산타마리아호를 끌고 합류해 모두 세 척의 함대가 되었습니다. 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후대에 미화된 것처럼 기독교 선교나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인도로 가는 짧은 항로개척에 따른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와 금과 은 등 보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콜럼버스가 기록한 항해일지에는 보물에 대한 언급이 수백 차례나 등장합니다. 그가 10월12일 바하마제도 과나하니섬에 도착한 후 이어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상륙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원주민들로부터 금제품 약탈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해 12월 항해 중 부서진 산타마리아호 선원 40명을 현지 식민지 관리자로 남겨두고 귀국해 이사벨 여왕에게 약탈한 금제품을 바치고 계약대로 새로 발견된 땅을 통치하는 부왕(副王)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해 17척 선단에 1200명으로 구성된 2차 항해를 지휘해 쿠바, 아이티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렸습니다. 콜럼버스는 처음 남겨두었던 40명이 모두 전멸해 금 약탈이 여의치 않자 원주민을 대량으로 에스파냐에 노예로 보냈습니다. 그가 네 차례 원정하는 동안 그들은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원주민 집단학살정책을 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일정량 금을 가져오게 하고 적게 가져오면 수족을 자르고 죽였습니다. 또한 이들에 의해 유럽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떼죽음 당했습니다. 당시 그가 상륙한 히스파니올라 타이노 원주민은 25만명(80만 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이었으나 2년 후 절반으로 줄고 60년 후에는 수백 명만 생존했고 백년 후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콜럼버스는 1506년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상륙한 신대륙을 인도로 확신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있는 서남아시아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고 3차 항해에는 그곳에서 사용될 것으로 믿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들을 모집해 데리고 갔습니다. 콜럼버스는 지금 베네주엘라와 콜럼비아 국경의 오리노코강 하구를 발견하고 하느님 명령으로 불검을 들고 에덴동산을 지키고 있을 케루핌 천사들이 무서워 감히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2천만 이상 원주민들이 잉카와 마야, 아즈택 문명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빙하기에 베링해협을 건너 온 우리와 같은 몽골로이드족이라는 학설이 유력했으나 최근 DNA분석을 통해 3만 년 전부터 베링해협뿐 아니라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계통, 북대서양을 통한 유럽인종과 남대서양을 통한 아프리카 인종 등 다양한 경로로 여러 인종이 혼합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몽골로이드가 절대다수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캐나다 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이들이 우리민족과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원주민을 아예 인간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럽인 중 처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8세기부터 바이킹족이 캐나다 뉴파운드랜드 지역에 정착촌을 세우고 고기잡이 해 온 유적지도 현재 보존되어 있습니다. 중세기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어민들이 캐나다와 메인 동부해안에 수시로 드나들며 대구 등 고기잡이해 온 것도 밝혀졌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영국어부들의 정착촌이 세워진 기록도 있습니다. 또 문서기록만 없을 뿐이지 유럽인들은 콜럼버스 이전부터 캐나다와 미국 원주민들과 교류해 왔습니다. 1621년3월16일 혹독한 겨울을 메이플라워 배안에서 보내고 살아남은 백인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해 정착촌을 건설했을 때 가장 먼저 방문한 원주민 아베나키족 추장 사모세트는 서투른 영어로 "Welcome! Englishman"라고 말을 건네고 대추장의 특사로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원주민 스콴토를 데리고 와 백인들의 사정을 살피고 도와줄 것을 조사한 후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원주민들 중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는 것은 일찍부터 백인들과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실제 스콴토는 백인들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으나 가톨릭신부 도움으로 영국에서 몇 년간 살다 탐험대에 편승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모세트도 동해안에 고기잡이 나온 영국어부에게 영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1906년 콜로라도에서 시작된 콜럼버스데이는 1934년 연방기념일로 지정되었지만 백인들은 영국 식민지시절부터 이날을 기념했습니다. 1792년 뉴욕과 대도시에서는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3백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으며, 1892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4백주년에 국민들에게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했습니다. 1934년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콜럼버스데이를 연방기념일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1992년 5백주년에는 미국 각 도시에서 퍼레이드와 다양한 축제가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콜럼버스데이가 연방정부 국경일로 제정된 당시 역사에 불편한 기분을 느낍니다. 19세기 중반 청교도 나라 미국에 아일랜드와 이태리 등 가톨릭신자들이 대거 이민하면서 K.K.K단 등 과격한 이민반대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에 맞서 가톨릭교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톨릭신자였음을 상기시키고 그가 신대륙 유럽인들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콜럼버스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을 조직해 반이민 운동에 맞서면서 새 이민자들을 보호했습니다. 이들 가톨릭 이민자들과 콜럼버스기사단의 로비로 콜럼버스데이가 연방공휴일이 된 것입니다. 저는 당시 반이민 정서에 맞서 이민자를 보호한 가톨릭교회 노력에는 감사하지만 인류 범죄자 콜럼버스를 상징으로 내세운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10월 둘째 월요일 콜럼버스데이는 같은 날 캐나다 추수감사절로 북미 양국이 함께 공휴일로 지냅니다. 그러나 미국 몇 개 주는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대부분 사기업과 증권거래소도 정상 근무합니다. 콜럼버스데이는 미국 원주민단체 중심으로 폐지 또는 ‘원주민의 날‘로 명칭변경 요구가 계속되었는데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 결정으로 ’원주민의 날‘과 함께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고 차베스 대통령이 2002년 콜럼버스데이를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고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 150년간 계속된 인종학살을 촉발했다며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 것을 촉구했습니다.
벗님 여러분, 오늘 편지는 콜럼버스데이가 주제가 되었네요. 미국에 와서 각지를 여행하면서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는 원주민들이 3등 국민 취급을 받아가며 사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던 차에 이번 바이든 대통령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대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벗님들과 저의 생각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天高馬肥의 풍성한 계절입니다. 코로나의 시름일랑 잠시 제켜두고 활기 있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心機一轉해 활기찬 노년을 즐기도록 힘쓰겠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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