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늘도 간간히 들려오는 크고 작은 대포 소리만 들릴 뿐(장사포에, K9이라나?) 남북이 함께 부르는 합창과 환호도 들리지 않았다.
오래 전 기억이다. 한 실없는 작자가 나에게 “한민족 두 국가”라는 말을 언급했을 때 젊은 나는 이성을 잃고 솔직히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충동적으로 살의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도 흘러 늙은이가 되고 보니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실망과 한계를 느껴서일까? “한민족 두 국가”를 심각하게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쑤시고 찌르고 메다꽂으면서 마음만 상하고 시퍼런 멍만 들면서 살 바에야 말이다. 남과 북이 그저 함께 좋은 8. 15 감격의 날에 이 기막힌 사연을 듣고 우리 모두 함께 우울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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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북자
1) 어머니의 추억, 나는 91세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실 때까지 평생을 불화로 반목(反目)하였고, 불공스럽게도 임종시까지 끝내지 못한 이 반목은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뵐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슬픈 사연을 다시 들춰본다.
내가 일곱살 때 6.25 동란이 터지고 그 이듬해 1951년 1월 우리 가족은 경상도 대구 근처의 율하라는 마을로 피난을 간다. 훈장만 하시던 아버지는 노동 나가서 5일만에 손에 물집 투성이에 과로로, 늑막염까지 겹쳐서 쓰러진다. 대처 수상보다 더 단단한 철인(鐵人) 우리 어머니! 드디어 가족의 생존을 위해 극단의 조치를 실행에 옮긴다.
내 위로는 형이 둘, 누이가 하나. 누이는 아버지의 일본체육대학 동기생 친구집의 아이들 가정교사로, 큰형은 중학교 어린 나이에 서울로 비자발적인 가출을 하여 살벌한 전쟁후의 사회에 일찌감치 데뷔를 한다. 작은형은 부산으로 피난 가있던 고모집으로 그리고 나는 졸지에 우리집 장남처럼 신분이 확 달라져? 신분 서열이 수직 급상승한다.
당시 대전, 부산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에서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로 거꾸로 간 이상한 우리 어머니.
그 당시 하루의 먹을 것이라고는 내 기억에 어머니가 노예이상의 온종일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받아 온 보리밥 딱 한 사발이 전부. 양을 불리기 위해 물을 많이 붓고 오래 끓이면 양이 한 10배 이상 불어나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나누어 먹는 식구들. 사건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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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따스한 어느 날, 시골 농가의 주인집. 대청마루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정경(情景)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하도 굶고 굶어서 허기에 지쳐있던 나는 현기증으로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흙 담벼락에 기대어 한번 더 쳐다보는 순간 “따라 들어오너라” 내 등위의 저승사자 같은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 밭 메다가 손을 다쳐 헝겊으로 감으려고 잠시 들렸다가 내 꼬라지를 봤던 모양이다.
내가 어린 시절 통틀어 어머니한테 맞은 매의 총 합계에서 90%는 그날 두들겨 맞은 매라고 기억한다. 종아리에는 피멍이 들고 한참 맞다보니 아픈 감각도 사라지고 툭툭 소리만 들렸다. 피멍이 든 그 위에 겹쳐서 계속 맞으니 피멍은 터지고 피가 흘렀다.
그리고도 한참 후 “나가서 씻거라”하는 소리에 정신 차리고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질 하여 물을 길러 씻는다. 피가 심하게 난 종아리는 씻을 수 없어 그대로 두고 대충 얼굴만 씻는다. “자존심 없는 놈” 밭으로 다시 나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
우물가를 돌아서 뒤뜰로 나가면 뒷문이 있고 그 뒤쪽은 감나무가 몇 그루 서있는 작은 동산이다. 그 동산에 올라선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마음 놓고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배고픔과 아픔을 이미 초월한 나는 왜 울었을까?
차라리 죽음보다 더 수치스럽고, 그 보다 더 큰 고통은 극치의 모멸감(侮蔑感)이었다. 남도 아닌 나를 낳아주신 내 어머니에게 당한 쪽 팔림. 창피 수치심! 치한에게 겁탈당한 숫처녀의 상처가 이보다 더 할까?
그후부터 나는 동으로 가라고 하면 서로 갔고, 음악을 하라하면 체육을 했고, 조용히 앉아서 독서하라고 하면 밖에 나가서 널뛰기를 했다. 내 평생을 어머니와 극과 극으로 반목하게 된 불편한 나의 인생살이는 이렇게 하찮은 일로 시작되었다.
여러 해 전 91세가 되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누이동생들과 서울로 떠난다. 임종을 앞에 둔 어머니와의 독대. 네 머리가 벌써 하얗게 되었구나. 하루하루를 헤아리며 아껴서 살아라. 네 민족을 위해서 반, 그리고 네 후손을 맡길 미국을 위해서 그 나머지 반을 쓰렴. 어떠한 역경(逆境)속에서도 “자존심”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재미있게 잘 살아라. 네 미미한 존재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너에게만 할 수 있는 유일한 부탁이니 명심하거라(유언 추후 공개)
(어머니는 평생을 당신 오빠가 세계에서 처음 발명한 합성섬유 비날론 1호, 2호 원단을 가슴에 지니고 다녔고 끝도없이 명예롭게 생각했다. 한편 마음의 그늘진 한 곳엔 당신 오빠 이승기가 북의 핵무기 개발의 대부라는 그 멍에를 벗어나고파 했다.)
“자존심”이라는 말
59년 전 어린 시절 허기에 지쳐 밥 먹는 것 훔쳐보다가 채찍질 당하며 무릎 꿇고 어머니에게 받았던 피눈물나는 굴욕의 세 글자 ‘자존심’ 나는 속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어머니께 “그 때 엄마는 나를 죽도록 두들겨 팰 것이 아니라 얘야 엄마도 배 고프단다. 그래도 우리 같이 참아야지 하고 껴안고 같이 울었어야 했어라고” 하는 왜 이리도 아까운 지면에 지루하고 장황한 내 유년시절을 회상 하는가?
탈북자, 그들은 과연 공화국, 조국을 배반하고 길고 긴 고난의 행군을 이탈하여 그들의 조국을 등진 무리들인가?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단호히 “아니라고” 절규한다. 단지 어릴 때 나처럼 중국쪽으로 담을 넘어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쌀을 찾아서 임시 넘어온 사람들일 뿐이다. 내가, 어린놈이 혹독한 굶주림으로 남의 밥 먹는 것 훔쳐본 것이 어머니에 대한 배신이란 말인가?!
담을 넘은 그들은 길고 긴 고난의 행군에서 이탈하여 그들의 조국을 등진 배신자도, 반역자도 아니다. 북의 지도자들은 내 자식들에게 휘두르는 박해와 채찍을 거두고 우리 어머니 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 제 식구가 한을 품으면 조국은 거침없이 안으로 썩는다.
그들은 모두가 세월이 좋아지면 어느 때고 내일이라도 당장 짐보따리 챙겨서 밖에서 번 돈 한푼, 두푼 다 가지고 자기 살던 그리운 조국 찾아, 고향 찾아 다시 돌아갈 공화국의 귀중하고 소중한 새끼들이다.
중국의 패륜아적 탈북자 박해와 핍박
유럽의 교활한 식민지 정책으로 세기에 세기를 거듭하며 펼친 “우민” 정책으로 중동과 특히 아프리카는 세계 역사상 가장 길고 반문명적인 식민 사회의 혹독한 불이익을 당한 지역이다. 호텐토트, 부시맨 무지랭이 같은 나라에서도 민족분규로 국경을 넘어온 빈민들게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먹을 물, 거적때기 텐트 나부랭이라도 챙겨준다.
나는 내가 서성거리던 5년 동안의 동북삼성 생활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소식들을 통하여 중국 공안들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경악(驚愕)을 금치 못한다. 한 탈북자를 잡아서 북한에 넘기면 상금으로 500위안을 포상 받는다. 때로 더 좋은 건수가 생기면 주저없이 술집, 인신매매(성매매) 조직에 더 큰 웃돈을 주고 팔아 넘긴다.
2차대전 때 왜놈들이 불쌍한 10대 소녀들을 잡아서 일본 환군에 성 노리개, 집단 강간을 수십회에서 100회까지 자행했던 그 처참한 만행(蠻行)과 하나도 다들 바 없다. 이 만행은 북한에도 남한에도 심지어는 중국에도 썩은 고름보다 추악하고 똥보다 더 악취 나는 반인류 범죄일 뿐이다. 요나라, 순나라부터 이어온 중국의 철학은 어질 ‘인”과 사람을 중시했던 ‘조화’가 아니다더냐?
내가 인정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완성이란?
지금 2011년 현재로 대략 남한에 주거지를 정하고 사는 탈북자의 숫자는 약 2만명을 넘고 세계 곳곳을 떠돌며 내일을 기약 못하고 살고 있는 ‘집시’같이 살고 있는 유랑민을 합하면 약 5만으로 추산 한단다.
만일 천우신조(天佑神助)인지 천지개벽(天地開闢)인지가 일어나 그들이 쉽게 그야말로 아무 후탈이나 보복 없이 고향, 조국으로 자유롭게 돌아가 살수 있다면 그들은 바리바리 싸 들고 그리운 이들이 살고 있던 자기 곳으로 돌아가리라.
강성대국의 천개 목표는 얼마든지 쉬어가며 이룩할 수 있지만 채찍을 거두고 이런 세상이 온다면 강성대국의 안마당!
현재 그리고 현실이라는 말의 진정한 과학적인 의미
5분만에 끝난 북의 김정은 후계자 인사 청문회.
뉴저지 한 구석에서 할일 없는 중늙은이들이 뭉쳐 무료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다. 싱거운 나는 우리 심심한데 인사 청문회나 한번 열어볼까? 제목이 뭐야?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아니면 똥 구린내 나는 감사원장? 아니 그런 시시한 거 말고, 그런 것은 대한민국에서 냄새나는 지네들끼리 우리 없어도 잘 할 수 있잖아!
그게 뭔데?
북한 후계지도자 인사청문회 우리가 모인김에……
넌 누굴 추천할건데? 나는 김정은. 느네들은? 어쭈 이 백가 빨갱이 봐라.
버벅대는 중늙은이들 앉혀놓고 한 사람씩 추천 후보자 거명하며 거들기 시작했다.
장성택 : 사람은 괜찮지만 한 일주일이면 군부에서 들고 일어나 패대기쳐 버릴 걸?
황장엽 선생을 환생시켜서…… : 지금 농담하냐?
그럼 김영춘, 이영호는 어떠신지? 그 인간들은 총하고 대포밖에 모르잖아 쌈밖에 모르고 너무 호전적이잖아. 무슨놈의 평화, 민족화해 어쩌구 얘기나 먹히겠어?!
그래서 내가 추천한 김정은은 뉴저지 청문회에서 다른 경쟁자의 자격미달과 전원 기권으로 5분만에 단독 통과되고 덕분에 나는 또 빨갱이 누명을 쓰게 되었다. 현재라는 말은 그 당시의 모든 현상의 품질을 말해주는 지극히 과학적인 수치이고 그것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했을 때, 현실이라고 쓴다.
현실이라는 좌표(座標)는 하늘에 위치하지 아니하고 지하 땅속에 있지 아니하며, 딴딴한 땅 위에 존재한다. 나는 그래서 현재의 현실이야말로 미래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최상의 출발점이라고 굳게 믿는다. 남북 역시 그 바탕위에 옷을 벗고 그 위에 서라!
O 북한이 진정성을 보일때까지 대화를 안하겠다고?
북한의 진정성은 전쟁. 그래서 더욱이 왕성한 대화가 필요.
O 잃어버린 십년?
잃어버린 10년 타령에 발목 묶여 우리의 소중한 100년을 잃고 싶은가?
O 연평도 천안함 전사자
북의 사과 없이는 어떠한……
어느 전쟁 역사에도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해 그때마다 별도로 사과 받으며 치열한 전쟁 치르는 만화같은 전쟁은 없어. 기습은 전쟁 수행의 가장 쌈박한 Project. 옆구리 허를 보이지 말라.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이스라엘 민족처럼 조용히, 쥐도새도 모르게 대비하라. 남북이 서로 껴안을 때까지.
모든 군기(軍紀)는 “장군”으로부터 나온다. 장군의 파티용 정장 예복을 조용히 연기 안 나게 불태우고 눈에 띄는 별판을 흙색을 칠해서 위장하라. 내일부터 군기는 빳빳하게 서리라.
육자회담은 선택, 남북 양자 회담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