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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임의 뒷골목 뉴욕
중앙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뉴욕대학 대학원에 유학, 미국의 유명 광고회사에 취직해 미국동포 소릴 들으며 산지 17년. 기자로 출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공연기획자, 또 구멍가게 주인으로, 그것도 모자라 연극 연출에 자유기고가로 사는 자유인. 그럼에도 불변하는 한 가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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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한국인

글쓴이 : 앤드류 임 날짜 : 2010-11-09 (화) 05:46:52

잘난 척으로 들린다면 죄송하지만 필자는 영어를 곧잘 한다. 한국에서 자라고 정규 영어 교육 이외에 특별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 외국어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러다보니 영어가 항상 가장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한 가지 말해두자면,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모 대학에서 운영하는 어학원(당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고급 기관이었다. 수강료도 비쌌고…)에 등록해 잠깐 영어 회화를 배우러 다니는 반칙(?)을 저지르기는 했다.

‘아하, 그러니까 그렇지’라는 말을 듣기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어학원에 수강 신청을 할 때는 시험을 보고 인터뷰를 거쳐 등급을 책정 받는다. 실력에 따라 1등급에서 9등급까지로 반 편성이 된다. 고급영어회화반인 9등급이 가장 높은 등급이다.

 

필자는 9등급을 받았고 그 어학원에 다닌 시간은 고작 3개월이다. 높은 등급으로 들어가 조기 졸업(?)을 한 셈이다. 거기서 한 일은 시간 내내 CBS의 60 minute인가로 기억되는 영어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인 강사가 들어와 한 한 시간 토론하면 강의가 끝난다. 나는 그 중에서도 우수한 수강생이었다.

잘 참으셨다. 이제부터 잘난 척 끝, 고백 시작이다. 뉴욕에 유학 올 당시 필자는 노스웨스턴 항공을 타고 일본 나리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왔다. 경유(經由)로 인한 시간의 딜레이도 있지만 한국인들이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같은 국적기를 이용하는 것은 한국말로 먹을 거 다 먹고 서비스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내 서비스는 한국 항공사가 그 어느 나라 항공사보다 월등하다.)

 

노스웨스턴 승무원들은 물론 아리따운 백인 아가씨들이었다. 미국으로 오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그 승무원들과 여유있게 농담도 하고 커피도 부탁해 마셔가며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내에서 담배도 필 수 있어서 승무원들이 앉는 뒷자리에 가 그녀들과 담배 한대 피워 물기도 했다.


비행기 안에서 미국의 젊은 여성들과 대화를 즐기며 이미 뉴욕에 도착해 있는 기분이었다.

JFK에 도착했을 때, 가벼운 흥분(興奮)속에 브로드웨이가 있는 뉴욕만이 내 머리 속에 가득했다. ‘다음날 대학원에 가서 등록을 하고 그 다음엔 여유있게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산책하리라…’ 영어 되겠다. 자신 있겠다 뭐가 문제랴… 돈이 조금 딸리는 것 빼고는 거칠 것이 없는 패기(覇氣)에 찬 대한 20대였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영어를 앞세운 설렘과 기쁨은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노스웨스턴의 승무원들과 같은 얼굴과 눈색깔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리고 그들이 분명 영어를 하고 있을 터인데, 내가 듣는 것은 영어가 아니었다. 그저 귓전으로 지나치는 영어 비슷한 언어일 뿐이었다.

  

공항직원인 듯한 사람이 손짓을 하며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데 도대체 뭐라는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순간 긴장하니 방송 안내하는 것조차 들리질 않았다. 어리둥절을 넘어 거의 뇌가 진공상태(眞空狀態)가 되는 기분이었다.

속도가 달랐다. 발음도 달랐다. 승무원들이 외국인임을 배려해 천천히 또박또박 그리고 쉽게 말해주는 그런 영어가 아니었다. 어학원에서 강사들이 하던 말보다 훨씬 빨랐다. CNN에 나오는 앵커의 정확한 발음도 아니었다.

공항의 직원들은 말을 하다 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암호(暗號)를 쓰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에 들리는 단어들로 영어구나 싶을 뿐, 정말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 같았다. 촌놈마냥 갈팡질팡한 얘기며 게이트를 지날 때 이민국 직원에게 당한 모멸감(侮蔑感)은 나중에 기회있을 때 따로 하기로 하겠다. 그야말로 웃을 수 없는 코미디였다.

 

공항에서의 당혹감(當惑感)은 그 다음 날부터 생활 속에서, 또 학교에서 겪게 된 고충(苦衷)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외국에서 배우는 영어와 그 나라에서 부딪치는 본토 언어는 그 만큼 달랐다. 가차 없고 인정사정 없고 배려(配慮)가 없었다.

학교에서의 토론 시간은 고통이었다. 나이 든 교수님의 말은 알아듣겠는데 어린 학생들이 하는 말은 너무 빠르고 정신 없었다. 그러니 토론 참여가 제대로 될 리 있는가.

영어를 배우자. 미국사람들처럼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배우겠다고 오지게 마음먹고 ‘사서하는 고생’을 시작했다. 예스, 노 대신 Full Sentence로 말하기, 누구에게 도움 받지 않고 모든 관공서 업무들을 해결하기. 콘에디슨이나 전화 회사들에 직접 전화해 요금 협상하기 등등… 누구에게 통역을 부탁하지 않고 직접 부딪쳐 생활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부터 했다.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자 말도 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영어를 ‘미국 사람처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넘기 어려운 한 가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외국인이 영어를 할 때 반드시 거치는 것이 번역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이 영어를 할 때, 그들은 모국어로 머리 속에서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역시 머리 속으로 번역해 입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 속에서 번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말은 당연히 어눌해지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것과 같은 과정이 되어버리므로 유창함과는 이미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아예 생각부터를 영어로 한다. 그것을 단지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번역의 과정이 없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로 생각하라고 하는 것 아닌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과정이다.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는 일은, 그리고 그것을 원어민(原語民)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민족은 불리하다. 영어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생각의 구조 자체를 교정(校訂)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와 한국어의 문장 구조는 완전히 반대 아닌가. 한국어가 주어와 술어 그리고 목적어의 어순이 영어와 반대의 구조를 갖는 전세계 몇 안 되는 언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한국 사람들은 ‘나는 너를(you) 사랑한다(love)’고 말한다 그러나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나는 사랑한다(love) 너를(you)’이다. 그래서 우리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는 농담도 생겨난 거 아닌가 싶다.

가끔 미국사람들의 말다툼을 보면 상대방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있음을 본다. 영어에서는 화자(話者)가 이미 결론을 말해 놓고 시작하므로 ‘사랑한다’면 끝까지 안들어도 행복해지고 ‘혐오한다’면 끝까지 안듣고도 따질 수 있다.

우리 말은 술어가 맨 뒤에 오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봐야 좋아할지 열받을지 결정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영어에 관한 한 이미 불리함을 타고난 민족인 것이다.

참고로 중국어는 다르다. 워(I) 아이(love)니(you)… 영어와 어순이 같다. 모르긴 몰라도 중국 사람들도 말다툼할 때 상대방 말 안듣고 시끄럽게 싸울 것이다.

시덥잖은 말장난에 화나신 독자님들 계시면 양해 바란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의 충정(忠情)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영어 못하는 한국 사람들 구박(驅迫)받을 이유가 없다. 미국에서 30년 살고도 영어 못하는 동포 할아버지를 보더라도 한국 사람의 수치처럼 여기는 오만방자함을 거둬주시기 바란다.

언어 구조는 사고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살면서 듣기만 해도 저절로 외국어가 느는 다른 민족들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다. 동구권의 아무리 무식한 유럽 사람이어도 미국에서 좀 살면 어눌하게라도 통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우리보다 노력을 더 해서가 아니다. 자기네 말과 문장에 단어만 순서대로 끼워 넣으면 되는데 사람의 지능으로 무엇이 그렇게 어렵겠는가? 하물며 영어가 거의 필요없는 한인타운에서 생활하는 한국사람임에랴.

 

얼마전 황당한 일이 있었다. 나와 거래하는 어느 회계사의 한국인 비서가 업무 상 실수를 저질렀다. 내 회사의 서류를 다른 회사와 뒤섞는 바람에 내 계좌(計座)에서 다른 회사의 세금 몇천 불이 빠져나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내 회사의 세금 내역이 고스란히 그 회사에 공개됐다. 사장인 내가 얼마를 벌어가는지 고스란히 다 말이다.


전화로 항의를 했다. 하지만 그 한국인 비서는 매우 무례한 태도로 ‘그래서 어쩌라구?’ 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나름 차분한 어조(語調)를 유지하려 했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건 중대한 실수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냐. 내 구좌에서 빠져나간 예상 못한 몇천 불 때문에 다른 수표들이 부도가 났으면 어쩔뻔 했느냐고 따지자, 한국말을 그리도 잘하던 이 여자분이 갑자기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 들어보니 원어민 수준의 영어도 아니고 내가 기 죽을만큼 유창하지도 않았다. 잠시 어이가 없었지만 나도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영어가 더 편하세요?’라면서 말이다.

영어로 하면 싸울 때 편리하다. 더 직접적이고 상대방 말을 끝까지 안들어도 된다는 속도 상의 장점이 있다. 나도 속사포처럼 영어로 싸울 수 있다. 기억하시는지 필자가 영어를 잘한다는 자랑….

영어로 몇마디를 했더니 이 여자분 다시 한국말로 돌아갔다. 몸까지 낮추는 기색이다. 갑자기 누그러진 자세가 확연했다.

이런 상황을 겪으신 한국 분들 많으리라 본다. 한국인들 상대로 비즈니스하면서 한국 사람에게 굳이 영어로 말하는 심리는 무엇인가? 만일 내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회계사의 비서는 내 입을 막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걸 자주 듣는다. ‘난 그 동네가 싫어.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난 한국말 잘 못해요. 한국 사람들 영어 못해서 창피한 적이 많아요.’

심지어, 자랑스럽게 ‘나는 한국 남자들 싫어요’라고 말하는 그러면서 정작 영어는 ‘오~예’ 만을 연발(連發)하는 한 여자 유학생도 본 적이 있다.

가뜩이나 언어 구조가 달라 영어 배우기 힘든 한국인들에 대해 영어 좀 한다는 같은 한국인들이 수치심을 갖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잔인하다. 그리고 자기 민족의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 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영어 못하는 한국사람보다 우리 말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우월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고 몰라도 될 언어를 못할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은 민족을 창피해 하는 사람들이 더 안쓰럽다. 내가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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