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코가 완전 베어나갈 정도로 으스스 추워질 때가 오면 왜 그렇게 고마운 사람들 얼굴이 둥둥 떠오를까. 날씨가 오히려 살랑살랑 친근할 때는 괜시리 누구도 미워지고 남의 사탕 하나도 더 커보이는데, 옷 장 한 구석에 밀어두었던 겨울잠바를 꺼내들 때가 오면 갑자기 손끝이 찌릿해지면서 고마움의 엔돌핀이 제 온 몸의 핏줄을 정신없이 돌아다님을 느끼게 됩니다.
고마운 사람을 세다보면 손가락 발가락 다 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에반이에게 큰 맘 먹고 고마워할까합니다. (어제 에반이가 비오는 길에 마구 달려나가다가 쌔끈하게 미끌어져가지고 볼따구 퉁퉁 부어서 제 속 끓은 거 생각하면 별로 고맙지도 않지만 그냥 잊어주기로 했습니다. ^^)
저는 어떤 엄마가 되어 있을까 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주 에반이의 발달상태를 보기 위한 4차례의 마지막 정기검진 때문에 소아신경정신과를 갔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자폐아를 위해 전문화된 치료와 교육법으로 꾸준히 나름의 많은 발전을 이루어낸 에반이지만, 여전히 지금과 같은 특수치료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이제는 마음 조리면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엄마로서의 의견도 제법 의연하게 제시하면서 대처하는 쪼끔은 점잖아진 제 모습을 봅니다.
에반이가 중증 자폐(自斃)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2009년 12월. 그러고보니까 딱 이년 전이군요. 에반이가 자폐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는 것에 벌써부터 불안해하던차라 병원에서 선생님이 “에반이가 중증자폐아입니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게 새삼스럽지 않으면서도 눈물은 안 터지고 그날 하루가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길을 걷는 마냥 몽롱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에반이를 통해서 까마득한 안개길을 헤쳐나와 주변을 한결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반에게 고맙습니다.
저는 분명 우리 아들만을 위해 사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는 아줌마였을 겁니다. 반짝거리는 멋진 한국의 지하철역과는 달리 에스컬레이터 하나 없는 약간 꾀죄죄한 뉴욕의 지하철역에서는 계단 올라갈 때마다 콱콱 사람들로 메이게 됩니다.
에반이와 함께 가다가 늦어가지고 서두르고 있을 때 사람개미군단에 치이게 되면 옆에 사람 뒤에 사람 앞에 사람 다 참견하면서 꿍얼거리기를 백번할 저였을 텐데, 이제는 에반이와 같은 성인 장애인이 어쩌면 앞에서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서 사람들이 쭉쭉 걸어올라나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갑자기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지며 꿍얼거리는 게 쑥 들어가버립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치여도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에반이가 고맙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부드럽게 보는 눈을 주어 에반이가 고맙습니다.
이 세상에 나처럼 장애가 없고 남들 생각 잘 따라가고 눈치빠른 그런 사람들만 뭉쳐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에반이가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아줌마였을 겁니다. 쭉쭉 빠지고 멋들어지게 보이는 사람만 있는 게 우리 사회인 줄 알았는데, 에반이를 통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나지막하게 숨을 들이쉬며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고자 하는 저를 봅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단체뿐이 아닌 다른 봉사기관을 계속 기웃거리며 참견하는 괘씸한 버릇을 키워준 에반이가 고맙습니다. 그렇게 새로 자라나는 버릇으로 알게된 봉사기관과 그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배우게 해준 에반이가 고맙습니다. 그러한 따뜻한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는 에반이를 보면서, 행복하게 자라가는 에반이를 보면서 고맙습니다.
갑자기 일년 내내 꿍 참아둔 눈물이 찔끔 나옵니다. 분명 이 눈물은 행복하여 나오는 눈물일 겁니다.
* 이 칼럼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http://www.autismkorea.kr) 해피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