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괴테를 읽기 위해 독일어를 배운다기에, 까뮈를 읽으리라 벼르고 시작한 나의 불어공부는 사전을 쥐고 ‘어린왕자’를 읽는 정도에서 끝났다.
하지만 불어로 읽고 말해 보리라는 내 허영보따리에는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페스트’ 등등 읽지도 않으면서 사들인 원서(原書)들로 그득하고 그 보따리 끝에 프랑소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 놓여 있다.
꽤 오래 전에 파리에서 사들고 와서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뒹구는 꾸러미를 풀자니 그 속에 까뜨린느 드뇌브가 ‘슬픔이여 안녕’을 낭독한 CD세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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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열아홉의 사강이 쓴 책, ‘슬픔이여 안녕.’ 아버지의 연인 안느를 질투하는 17세의 세실의 감정을 50대 중반의 까뜨린느 드뇌브가 녹음한 CD는 그녀의 고혹(蠱惑)적인 사진으로 포장되어 있기에 충동구매로 샀을 뿐이다. 따져 보니 꽤 고가였던 CD를 포장지도 뜯지 않고 처박아 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라 별 기대없이 CD를 걸고 헤드폰을 찾는다.
나른함과 달콤함 속에서 빠져 나올 수없는 이 낯선 감정을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이름, ‘슬픔’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청아하고도 탄력있는 까뜨린느 드뇌브의 음성이 안개처럼 흐르는 섹스폰의 음률사이로 스민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이란 권태, 후회, 그리고 가끔 양심의 가책정도일 뿐, 슬픔을 경험한 적은 없다.
까뜨린느 드뇌브의 음성은 17세 소녀 세실이다. 깐느의 바닷물처럼 출렁대는 십대 소녀의 감정을 깔끔하게 낭독하는 그녀의 음성에 이끌려 나 역시 서서히 세실이 되고 있었다.
맙소사! 아버지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안느라니! 안느는 엄마의 친구이자 속물스러운 아버지와는 상대가 될 수없는 고상한 여자로 믿었는데 안느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구? 의외의 관계에 혼란과 질투로 범벅이 된 세실은 아버지와 안느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고약한 작전을 세운다.
물은 매끄럽고 미지근했다. 안느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엘자와 재미를 보고 있는 동안 아무 것도 모르는 안느는 방에서 콜렉션에 선보일 의상을 스케치하고 있으리라.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나는 테라스로 돌아와 긴 의자에 걸터 앉아 신문을 펼쳤다. 그 때였다. 안느가 나타난 것은. 나는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호색한(好色漢) 아버지의 무분별한 섹스행각에 발끈해서 아버지를 공격하리라 기대했던 그녀는, 집 뒤의 차고 쪽으로 사라졌다. 안느는 벌써 시동을 걸고 있었다.
▲ ‘슬픔이여 안녕’의 배경이 된 깐느는 프렌치 리비에라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휴양도시다.
까뜨린느 드뇌브의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오염되지 않은 소녀의 낭랑(朗朗)한 음성이 스며 있었다. 안느와 아버지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세실이 놓은 덫에 걸린 안느는 죽음을 선택한다.
다시 여름이 다가 온다. 그 추억과 더불어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어둠 속에서 되풀이 한다. 그러자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솟아 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이름으로 슬픔을 맞는다. “슬픔이여 안녕!”
에필로그에 울려 퍼지는 섹소폰 연주사이로 까뜨린느 드뇌브의 음성이 아련하게 사라질 때, 사강이 묘사한 그 ‘처절하리만치 마름다운 이름-슬픔’이 선명하게 윤곽(輪廓)을 드러낸다.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이미지에 눌려 좀처럼 정이 가지 않던 그녀의 음색에서 슬픔의 색깔이 피어난다. 철없는 장난에 희생된 안느를 통해 비로소 슬픔을 알게 된 세실은 슬픔이 지닌 색깔을 알만큼 성숙해 지는 과정을 까뜨린느 드뇌브의 음성이 아름답게 수놓는다.
내가 갔던 국제영화제에 까뜨린느 드뇌브 역시 여러 번 참석했었지만, 당장 코 앞에 떨어진 일에 밀려 먼 발치에서라도 그녀를 볼 수있는 기회를 번번히 놓쳤지만, 지난 3월, 뉴욕의 명소 BAM(Brooklyn Academy of Music) 에서 열렸던 까뜨린느 드뇌브의 회고전(回顧展)에 참석한 그녀를 보았다.
바로 앞자리에서 본 그녀는 이제 세월을 속일 수 없을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姿態)와 넘치는 에너지로 관객들에게 노장의 관록을 과시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역작 ‘Repulsion(1965)’을 보려고 몰려든 관객들에게 까뜨린느 드뇌브는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문을 열었다.
▲ 루미에르 극장은 깐느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인들의 로망. 영화제오프닝과 경쟁부분에 오른 영화가 상영된다.
내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재빨리 카메라를 들이대자 내 쪽을 흘낏 한번 쳐다보고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불같은 성질의 그녀도 이제는 웬만한 것에 너그러워질만큼 세월이 흐른 것일까?
“아- 로만 폴란스키감독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는 불어가 서툴었고, 나는 영어를 못했던 1961년이던가? 그 무렵 나는 아주 소심하고 수줍음을 타는 여배우였는데 로만 폴란스키의 손으로 아주 좋은 영화가 완성되었지요.”
그 때를 회상하듯 까뜨린느 드뇌브는 다시 소녀처럼 웃었다. 이제는 프랑스의 얼굴이 된 까뜨린느 드뇌브. 그 녀는 지난 반세기, 세대를 초월(超越)한 채, 아직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영원한 영화인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