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동시가입이었지만 유엔가입 20주년이고 보면, 새삼 우리나라와 유엔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유엔 사무총장이 반기문 총장이기에 유엔이 참 가깝게 느껴진다.
연임 이후에 한국에서 뉴욕에 마련하는 큰 행사에 참석이 잦은 반기문 총장 내외분을 뵈면, 한국에서 그 큰 규모의 행사를 뉴욕으로 들고 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반 총장에 대한 애정이 중심에 있음을 눈치챈 이유일게다.
지난 8일, 유엔가입 20주년을 기념하는 ‘뉴욕-코리아 페스티발’ 대축제에 참가하는 가수들이 총영사관에 마련된 리셉션에 모였다. 이름만으로도 벅찬 패티김, 태진아, 인순이, 설운도, 김영임, 장사익….
어디 그 뿐인가. 이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열광한다는 K팝 아이돌이 총출동한 자리였다. 그 스타들이 반기문 총장과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고, 다른 참석자들 역시 패티김, 태진아, 설운도를 제치고 사진을 찍으려고 쉴 새 없이 틈을 엿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세계적인 인물을 그다지 많이 배출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반기문 총장은 국민들의 희망이요, 꿈이다. 그런 우리 마음을 아시는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팬’들과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조용한 미소와 겸허한 몸가짐의 총장님, 처음 만난 그 날이 떠오른다.
2002년 2월, MoMA에서 있을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을 앞두고 정신없이 바쁘던 2001년 10월 무렵이었다. 다른 영화제를 준비할 때와는 달리 영화제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당시 뉴욕문화원장이었던 L씨가 나를 불렀다.
“한형, 이번에 문화원의 후원을 기대마세요.”
불려 갈 때 이미 굿뉴스는 아니다를 예감했지만, 이렇게 무참히 모든 후원이 白紙化(백지화)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뒷통수를 후려 맞은 듯 얼떨떨했다. 한국문화, 예술을 뉴욕한국문화원말고 또 누가 후원을 하겠는가.
“나도 신상옥 감독을 존경해요. 근데...이 양반 참...한형, 제발 공무원에게 감독을 이해하라고는 하지 마세요. 우리 공무원의 아이큐로는 천재를 이해하기 어렵소!”하며 ‘월간 조선’을 내밀며 책장을 휙휙 넘겼다. 신상옥 감독이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공격한 장문의 글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대통령을 공격한 괘씸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제를 후원할 수 없다는 L원장의 방을 나서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난초는 이렇게 예기치 않게 만난다. 그 날따라 가을 볕이 눈부셨고, 나는 파크애브뉴의 그 화려한 거리를 걸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석 달만 잘 참으면 돼.”
2002년 2월, 회고전에 앞서 뉴욕에 도착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는 보도진의 쉴 새 없는 취재열기에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듯 의기충만했다. 두 분의 명성만큼 떠들썩한 영화제였으나, 얼굴을 내밀만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자 신감독이 섭섭한 눈치였다.
“내가, 아니 우리가 뭐 잘못한 것 있어?”하며 묻는 신감독에게 “아니, 감독님, 아예 ‘전쟁과 평화를 쓰시지 왜 고만큼만 쓰셨어요?” 하며 내 설움이 복받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간의 외로움과 그 날 저녁 외신기자와 MoMA 스탭들과의 저녁식사에 두 분만 모시고 가자니 가슴이 쓰려왔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서양인들 사이에 젠틀한 한국신사가 신감독 내외를 정중하게 맞았다. 정치에 門外漢(문외한)이요, 신문을 대충 읽고 사는 나는 그 분이 반기문 유엔대사임을 처음 알았다. 신감독 내외가 북한에서 탈출했을 때, 워싱턴에서 근무했던 반기문 대사는 “뉴욕에 오신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여사를 당연히 만나야죠”하며 악수를 청했다. 반 대사 옆에는 유순택 여사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반기문대사 내외가 훈훈하게 신감독 내외분을 반기자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반기문 대사의 자연스러운 친화력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 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꽤 오랜 시간 웃음꽃을 피우며 歡談(환담)했던 자리였다.
모두가 신감독에게 등을 돌렸던 그 시간, 반기문 대사라는 분이 신감독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기에 그 분의 깜짝 등장은 살얼음판도 걸어가는 재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신상옥 감독, 최은희씨,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뉴욕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그 날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면 우리 세 사람은 아마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님,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만나고 이별을 하며 살까요?”
내 물음에 대답 없이 감독님은 양 손에 최은희씨와 내 손을 잡고 걸으셨다.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다른 이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 그 분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다.
綺羅星(기라성)같은 대중스타들도 줄 수없는 기쁨을 주는 사람, 반기문 총장님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번지는 미소, 웃음을 보며, 이제는 별이 되어 우리를 보고 있는 신상옥 감독에게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감독님, 정말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세요. 감독님이 좋아하던 그 분이 유엔의 首長(수장)이 되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