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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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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네가 있어 행복해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1-01-22 (토) 14:41:05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사랑하고 있는, 그리고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

  

빚을 갚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돈 안들이고 빚갚기. 이보다 더 경제적인 방법이 있으면 내게 귀띔해 달라. 나이가 들수록 돈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사는 나는 기도로 탕감(蕩減)해야 할 빚쟁이들이의 이름이 수첩에 가득하다.

해마다 나의 새해는 이름 모를 젊은 남녀를 위한 기도로 시작된다. 6~7년 전이던가...인천공항에서 보았던 그들….

  

뉴욕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면세점을 둘러 볼 때였다. 운동장만한 면세점에서 물건을 요리조리 살펴 보고 있을 때 ‘아~악!”하는 비명(悲鳴)이 들렸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전 세계가 테러 경보로 긴장했던 그 무렵이었지만, 대한민국은 무슨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고 있는지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사람들이 웅성대는데도 공항 관계자, 경찰 한 명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구, 저런...저 일을 어쩌면 좋아!”

대한민국 아줌마가 내뱉는 이 말 한마디는 절묘하게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요약, 묘사하고 있었다. 비명을 둘러 싼 광경은 참혹(慘酷)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서너 배가 되는 건장한 청년을 무릎에 누이고 그의 입가에 번진 거품과 피를 쓸어 주며, “오빠! 오빠!”를 애절하게 부르는 젊은 여자는 구경하는 수백 개의 눈을 감당(堪當)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기절할 뻔 했다니까 글쎄....저 청년이 선반 꼭대기에서 뭘 집으려다 그냥 꽈당하고 내 쪽으로 쓰러지는 거야. 아이구 저 일을 어쩌면 좋아! 저 나이에 간질(癎疾)이 뭐야?”

청년 옆에 있었다는 중년 여자는 마치 유일한 목격자인양 쉬지 않고 입을 놀리고 있었다.

“아까 빵집에서 본 애들이잖아?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간다더구만. 색시가 신랑한테 그렇게 싹싹하게 굴더구만...”

주위의 아줌마들은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함직한 수다를 인천공항의 면세점으로 옮겨놓은 채 입으로만 애통해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빨리 앰블런스를 불러야지요!”하고 악을 쓰며 누군가 나서자 허둥대는 점원들을 멈추는 낮은 음성이 들렸다. 젊은 색시였다.

“서두르지 마세요. 곧 일어날 거예요...”

색시의 옷은 피로 젖어 있었고 얼굴은 땀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지만, 청년이 흘린 거품과 피를 닦는 손동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능란했다. 젊다 못해 어린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내게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더 가까이 다가서니 청년의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부서진 이사이로 흐르는 피와 거품으로 엉망이 된 낯빛은 거의 송장처럼 창백(蒼白)했다.

‘무슨 소리? 서두르지 말라니? 빨리 옮겨야 한다구!’

젊은 처자를 거들어 남자를 닦아 주던 내가 빨리 움직이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구급대원은 끝까지 오지 않았고 그들을 뒤로 남겨둔 채, 우리는 뉴욕 탑승길에 올랐다.

    

한 젊은 여자의 선택. 치유할 수 없는 병을 안고 사는 남자를 택한 그녀는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듯한 나이였다. 부부가 되어 기나 긴 인생 여정(人生旅程)을 시작한 이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은 그러나 염려가 되지 않았다.

부부가 되기 전까지 감당하고 치루어야 했던 날들이 더 힘들고 암담(暗澹)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나를 안심시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동자를 두려워하지 않던 그녀의 담담한 표정에는 처음으로 사랑을 만져 본 당당함이 있었다.

삶에 지치고 다시는 나를 끌어 올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질 때, 나는 그녀의 눈빛과 “서두르지 마세요!”하던 침착하고도 낮은 음성을 떠올린다. 그 젊은 여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다는 것을....

얼떨결에 받은 부름에 “예’라고 대답했던 순종(順從)때문에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자렛의 어린 소녀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감당해야 했던 그 슬픔의 무게를...

이제 그녀도 엄마가 되어 있을게다. 모든 것을 견디며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오늘은 그녀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남자가 흘린 피와 거품을 함께 닦을 때 스쳤던 우리의 손길이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이 다시 희망을 부추긴다.

주어진 인생, 잘 살아내야지...모든 만남이 아름다울 수밖에. 내 안에 네가 있어 행복하다.

 

* 위의 모자이크벽화 이미지는 필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영면성당과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성지 벽화를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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