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겨울이 생각난다.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뉴욕에 새로운 둥지를 틀기위해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왔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내 인생의 후반부를 다시 시작하리라곤 계획 하지 않았었지만, 인생은 때론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뉴욕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영어로 내 입이 저절로 열릴 거란 착각 하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영어는 나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또 하나의 착각은 내가 전생에 미국 사람이었을 거라 적응 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 만만 했지만, 역시 이곳은 내가 태어나 자란 나의 조국이 엄연히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 지난 7년의 세월이었다.
왜 그리도 겨울의 황량하고 살을 에이는 듯 바람이 마음을 얼어붙게 하던지. 우리 가족이 새로운 둥지를 튼 곳은 뉴욕 시티에서 조금 떨어진 자그만 동네이다. 허드슨 강변에 자리한 그림은 아주 좋은 동네 이다.(흐르는 이 강물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벌써 보따리를 싸서 내 사랑하는 고국으로 돌아갔을지도...)
처음에 미국에 올 때 뉴욕 하면 맨해튼. 맨해튼 하면 뉴욕이 전부인지 알았지만. 살다보니 맨해튼은 뉴욕시에 속한 한 보로(borough)라는 것을 알았다. 뉴욕시티는 모두 5개의 보로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뉴욕주에 속한 도시다.
뉴욕주만 해도 대략 남한의 2배 반 이라나? 우리 아들이 처음 미국에 와서 하는 말 “미국은 쓸데없이 땅만 커” 남의 것 쉽게 뺏어서...
아~ 살수록 미국은 쉬운 나라가 아니구나를 연발하면서 살고 있다. 그럼 왜 여기에서 살아야 할까? 우리 남편 하는 말 “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1000만 명은 이주를 해서 이 대륙을 쥐고 흔들어야 해”라고 늘 말한다.
말하자면 나는 늘 들쭉날쭉하는 이민 정책에 대해서 아이고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고 유치한 이 나라를 원망하는 쪽이고, 남편은 그럴수록 기죽지 말고 우리의 위상을 더욱 높이자는 쪽이다. 어차피 아메리칸도 최초의 이민자였으니 우리가 못 할게 뭐냐는 거다. 이론인즉슨 맞는 말이다.
아무튼 그럭저럭 7년의 세월을 잘 지내온 것 같다. 그 사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은 이 번 9월 학기에 대학 3학년이 되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딸아이는 고등학교 10학년이 된다. 후딱! 하고 지난 시간이다.
돌이켜 보면 어찌 이 쓸쓸한 곳에서 버텨낼까 싶었는데. 처음 몇 달은 하늘위로 나는 비행기만 보아도 고국 생각이 나고 언제 또 저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많이도 생각했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뉴저지에 있는 한국 마켓에 시장을 보러갔는데 매장 내 스피커에서 한국의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마구 흘러 내렸다.(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오버하지 않았나싶다. 누가 억지로 등 떠밀어 떠난 미국행도 아니였는데 말이다.)
원래 대중가요를 즐겨듣는 나도 아니였는데, 그 때는 그렇게 가슴에 사무칠 수가 없었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마음에 될 수 있으면 한국인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 아닌 이 뚝 떨어진 마을에 이사를 오니 그 느낌이 그야말로 천애 고아가 된 것 같이 외로웠던 것이다.
나도 이랬는데 우리 아이들은 어땠을까? 그때는 왜 빨리 다른 아이들을 따라 가지 못하냐고 매우 조급하게 생각 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감이 있다. 모두 다 시행착오의 연발 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대충 잘 적응이 된 것 같다. 모든 문제는 거의 다 시간이 잘 흐르면 해결 될 수 있다는 진리가 통했던 것일까.
이렇게 글을 통해서 지난 7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려고 할 얘기가 너무나 많다. 살 동네를 찾고 셋집을 얻고 아이들 학교도 알아보아야 하고. 등등은 다음편부터 자세히 하나씩 돌이켜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