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아 씨가 급작스레 별세(別世)했다는 뉴스를 인터넷에서 읽은 뒤, 잠시 내가 가끔씩 뵈었던 그 분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도, 그렇다고 아주 열성팬도 아닌 내가 왜 그 분을 떠올렸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한국에서 살 때 가끔 동네 목욕탕에서 마주친 사이여서가 아닐까?
지난 여름 한국에 나갔을 때도 그 목욕탕에서 보았었는데....
내 기억속의 박주아 씨는 아주 어릴 적 보았던 ‘여로(旅路)’라는 드라마로 시작된다. 그 드라마에서 박주아씨는 아주 못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었다. 어린 시절 (열살도 되기전인가?) 흑백 TV로 KBS에서 방영된 여로는 당대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다. 방영 시간이 가까워지면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다.
남편도 여로에 대한 추억이 있다고 한다. 72년 여름인가 대천 바닷가에 가족들과 해수욕을 갔는데 여로를 보는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TV 있는 음식점에 가서 온 가족이 드라마를 봤대나 어쨌대나..
사실 그 시절엔 TV 있는 집도 드물어서 인기 드라마를 보기 위해 한 집에 이웃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보는 일들이 참 많았다. 방에 다 들어오지 못하니까 문을 활짝 열어놓구 밖에서도 볼 수 있게 말이다.
케이블 TV에, 위성 TV에 수백개 채널을 볼 수 있는 지금 젊은 세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60년대만 해도 TV는 KBS와 TBC 달랑 두 개였고 69년에 MBC가 개국해 채널 3개가 됐다.
방송도 평일엔 저녁시간만 했으니 참으로 볼게 많지 않았다. 그러니 여로같은 엄청난 인기드라마를 놓치면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컴퓨터, 인터넷은 커녕 재방송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여로에서 박주아 씨의 아들이 바보 역을 맡은 장욱제 씨였고 며느리는 태현실, 그리고 나중에 장욱제 씨 아들로 당시 고등학생이던 송승환 씨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욱제 씨는 머리에 ‘땜통’이 있는 바보 캐릭터였는데 이분의 연기도 정말 대단했다. 어쩜 정말 바보같았는지, 나중에 코미디언 심형래 씨가 영구 캐릭터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그 영구가 바로 여로의 장욱제 씨 역 이름이었다.
정말 기라성(綺羅星)같은 연기자들이 나온 드라마가 여로였고 내가 보기엔 가장 실감나는 연기를 한 주인공이 바로 박주아 씨였다. 그 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박주아씨 연기를 보며 세상에 저렇게 악독한 사람이 다 있나하며 분해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때는 선과 악을 겨우 구별 할 수 있었던 나이라 연기라는 게 실제인지 아닌지 잘 구분하지 못했었고, 웬만큼 세상을 알게 되고나선 내가 알고 있는 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은 그 어느 누구도 박주아씨를 절대 따라 오지 못할 것이란 고정관념(固定觀念)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드라마에서 혹독한 시어머니 연기를 볼 때마다 그 분과 비교해 보곤 했던 우스운 기억도 있다. 그만큼 연기를 잘 하셨다는 거겠지?
뉴스를 보니, 그 분의 연세가 69세라 하던데, 40년전 드라마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하셨던 때가 서른 즈음의 나이였으리라.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역할을 그렇게 완벽하게 하셨던 걸 보면 진짜 대단한 연기자라 아니할 수가 없다.
최고의 인기 여배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기를 하셨으니 과연 연기가 천직(天職)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연기에 모든 정열을 아끼지 않았던 그 분의 삶이 대단하다는 마음이 든다.
지난 여름 동네 목욕탕에서 늘 함께 동행 하는 언니분과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었을 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박주아 씨는 조용하고 별로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오히려 언니되는 분이 말씀을 더 잘하시곤 했다.
TV에서 나오는 분을 목욕탕에서 보니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해서 눈으로만 인사를 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더 가까이서 얘기도 좀 나눠 보고 그럴걸 하는 작은 후회감이 든다.
그동안 투병 중 이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었고, 지난 번 보았을 때도 움직임이 더 조심스러워 졌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전혀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하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더구나 의료사고 가능성이 있다하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병원에선 최선을 다했겠지만 우리의 친근한 아줌마요, 할머니 같았던 박주아 씨가 편안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진실이 제대로 규명(糾明)됐으면 한다.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