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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날..이 땅의 여성들을 위하여

글쓴이 : 재이 V.배 날짜 : 2011-05-08 (일) 04:16:41

 

어머니 중에 가장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단연 성모(聖母) 마리아가 아닐까한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어둠속에서 아들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신은 떡을 썬 후 아들을 꾸짖던 한석봉의 어머니가 더 존경의 대상이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는 방편인 떡장사를 하며 아들의 인격 수련과 대한 교육 연마에 전념했던 한석봉의 어머니다.

또한 어릴적 어머니가 읽어 주시던 동화책에 나오던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도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들이 대장간에서 무엇을 줏어서 놀다 마당에 버리자 “작은 쇠는 못을 만들 수도 있고 쇠조각은 탄환을 만들 수 있으니 전쟁시에 귀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모두 대장장이에게 돌려주어라.” 3년 후에 대장장이가 술과 놀음빚에 문을 닫게 되자 독에 모아둔 쇠를 가져다 주니 대장장이가 감복해 새 사람이 되어 살길을 찾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학문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오성을 끊임없는 사랑과 격려로 이끈 일화(逸話) 중 하나이다. 아들이 학업에 전념 할 수 있도록 지혜로 다스리고 올바른 도덕심과 절제하는 힘을 갖도록 길러 주었다. 이항복이 훗날 명재상으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준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어머니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인다.

한석봉의 어머니와 이항복의 어머니는 나에게 역사를 통한 훌륭하고 고귀한 영혼을 지닌 어머니상이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날을 맞아 떠오르는 다른 어머니상은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나의 두 어머니의 이야기다.

 

가진 것이라곤 훤칠한 인물과 내세울 것이라곤 돈밖에 없었던 집안의 아버지와 결혼한 나의 어머니. 백수건달(白手乾達)인 아버지가 132번째 선을 보고 신부집 몇년 먹을 곡식을 대주고 모셔온 미모의 어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집에서 12형제 중 막내로 자라났다.

아버지는 그 당시 어머니가 상하이에서 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어머니를 본 후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머니를 만나신 순간 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이항복이 태어난 필운동에 살았던 아버지는 모국으로 돌아와 ‘호랑이 할머니’를 졸라 “매파를 보내 원하는 것을 다 주고 데려와 달라”고 어머니를 향한 운명의 화살을 쏴댔다.

어렸을 때 본 어머니의 혼례식 사진은 궁중에서 치루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도 어마어마했다. 안국동 최고 갑부 외동딸로 자라난 ‘호랑이 할머니’의 스케일로 밀어부친 행사였으니 오죽했으랴.

나는 모국을 떠나는 날까지 어머니의 주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집안일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열손가락이 넘는 시누이 시동생들에 대한 책임, 할머니가 막 시작하신 모터(motor)공장의 뒷바라지, 집안 대소사 등 하루 24시간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리고 모터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야간 학교에 보내고 그 아이들이 돌아오면 저녁을 먹인 후 늦은 저녁 모두 잠이 들면 책이나 신문을 읽기 시작하셨다. 이집에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누리는 럭서리한 레저(luxurious leisure)였던 것이다.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던지고도 살아나 아버지 눈을 뜨게 했지만 어머니는 친정이 딸을 내주는 조건으로 받은 쌀 몇백석에 묶여 상하이로 돌아가 교원이 되려던 꿈을 접었다. 그리고 35세에 홀로 돼 기나긴 세월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세월을 버텨 나가셨다.

오빠들은 해외로 유학을 떠나고 소녀시절 접어든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부당한 삶을 강요받는듯 하여 한없이 가여웠다. 갸날픈 몸에도 길에서 보는 거지도 그냥 못지나칠만큼 모든 사람들을 거두는 엄마를 보고 “엄마는 왜 항상 주기만 하고 살아?”하고 대들듯 다그쳤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다 네가 받을거다” 하며 잔잔한 미소로 항시 나를 달래셨다. “너는 원하는 생을 살거라. 조선시대를 지났다고는 하나 60년도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여자에 대한 위치가 열악하구나. 네가 여자라서, 여자이기때문에 가고자 하는 길에 벽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곳을 헤치고 밖으로 나갈 발판을 해줄 터이니 네 꿈을 펼쳐라. 여자라서 결혼을 꼭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누누이 내게 하신 말씀이다. 어머니는 내게 어린 시절 모국을 떠나 한 인간으로 스스로 날 수 있는 커다란 날개를 달아 주신 분이다. 오늘날 전문여성 기업인이 될 수 있는 초석(礎石)을 다져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모국을 떠난지 정확히 8개월만에 눈을 감으시며 “공부하는 예민한 아이가 놀랠 터이니 조심해서 내 죽음을 알려라”고 하셨다.

 

또 한분의 어머니는 내가 여성 전문 사업가(Professoinal business woman)가 되는 길 동무를 해 주신 어머니다. 남편 이외의, 한 인격체로서 내 삶을 완숙하게 다듬어 갈 수 있게 오랜동안 격려와 용기를 주신 분이다.

시카고 건축재벌가의 딸로 태어난 시어머니 Ms. Alden은 버클리 법대를 졸업하고 결혼 수업을 받고 있었다. “집안에서 소개받은 네 시아버지가 도어벨을 누르고, 일하는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닥에 철썩 주저앉았지, 영화배우 그레고리 팩보다 더 수려하게 생긴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모습에 정신을 잃었단다.”

모두 다 가졌으나 미모에 자신이 없었던 시어머니는 명문대학원을 18세에 톱으로 나온 남부 출신 갑부 신사와의 첫 대면을 이렇게 말씀 해 주셨다. “황홀한 그의 모습에 넋을 잃었던거야. 그 날부터 내 사냥은 시작되었지. 약혼까지 갔던 아무개의 기억은 까맣게 지워버리고 인류의 유전자 보존(?)을 위해 이 남자를 꼭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시아버지를 줄기차게 쫒아다닌 끝에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시어머니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 태어난 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후에 출간된 자서전(自敍傳)에 수록하셨다. 그러다보니 과잉보호로 아들을 키우고 그에 반발한 아들은 8년동안 어머니와 소식을 두절하고 해외에서 지내다가 시카고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생명줄인 아들은 깜짝놀랄 결혼 소식을 터뜨렸다.

“저 한국의 노처녀가 돈을 위해 당신 아들을 홀린 것이다.”, “공부만 하느라고 나이만 먹었지 부모도 없는 아이라는군, 결혼비용도 한푼 없이 알거지인 아이한테 네 아들은 무슨 깡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이냐?”, “영국 여왕보다 더 큰 약혼반지 받고 일년도 못 갈 결혼을 왜 하는지…, 결혼 비용이 아깝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른바 명문가의 어머니 친구틀이 침을 튀기며 험담(險談)을 해대자 어머니는 그들과의 교제를 “아무 말없이 단칼에 잘랐다”고 하셨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여자로서 나를 질시하던 수다쟁이 어머니 친구들이 한 말이 전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준비가 전혀 없었던 노쳐녀와 의학공부 하듯이 인간관계를 완벽하게 풀어나가려는 남편의 결혼 개념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낭비 하지 않는게 서로 좋지 않으냐?” 결혼 후 2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절실하게 물어왔다. “사랑 좋아하시네, 일 잘하고 있는 나를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녹여 이 프린스턴 시골구석에 데려다놓고 출장 갈 때 가는 들러리로 쓴게 누군데, 헤어지고 싶으면 너 혼자 헤어져. 내 사전에 이혼은 없다”라고 악을 쓰고 나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정말 심심해서 못 살겠다. 당신 아들은 못 말리는 고집쟁이다. 고칠 수 없는 왕자병에 앓고 있고 일만 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다. 한번도 미국 남자들이 잘 주절대는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안한다”고 일러바쳤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는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라는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몰라서 못하는거다. 네가 살아가면서 잘 교육을 시켜라. 남편에게 식초보다는 설탕요법을 쓰는게 어떻겠니?”하며 나를 위로하셨다.

“너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며느리에게 한마디 할 만도 했으나 항시 내 편을 들어주셨다. “친정 식구들이 호주에 있으니 혼자서 얼마나 외로우냐?”며 시카고에서 자주 오셔서 나를 데리고 오페라나 브로드웨이쇼를 데리고 다니시며 뉴욕을 배우게 하신 것도 당신이었다.

7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힘들게 홀로 비지니스 터전을 잡는 남편에게 고마움 없이 불평만 늘어놓는 나를 위로하며 격려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 부부가 누리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가슴에 묻혀 있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너에게 다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시어머니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수십년 음으로 양으로 챙겨주신 시어머니가 노년에 접어들어 치매가 시작된다는 말에 눈시울이 또다시 젖어든다.

10년 넘게 헬스케어 시스템에 종사하는 동안 부모를 잃은 자식들이 찾아와 “어머니한테 효도를 못해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할 때 그들을 위로하며 꼭 해주는 말이 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자식은 누구나 다 어머니를 잃은 날부터 효자(孝子)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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