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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움직임과 느낌을 순식간에 역동적으로 잡아내는 크로키는 카메라의 ‘스냅샵’과 비슷하다. 누드크로키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를 뉴욕에서 십수년간 천착하며 작가의 붓끝을 거친 다양한 인종의 누드 모델만 1천명에 달한다. 크로키속에 담긴 진솔한 인간의 향기를 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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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 옥수수 살해사건의 전모

글쓴이 : 김치김 날짜 : 2011-08-07 (일) 11:59:59

“큰일났어요. 그게 없어졌어요. 지금 좀 당장 이곳으로 와보셔야겠어요.”

지난 토요일 K씨의 전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다급함이 숨 넘어가기 직전처럼 느껴졌다. 평소 차분하고 침착한 분이 저토록 당황할 땐 정말 화급을 다투는 일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뭔가 큰 사단(事端)이 난것 같은데 대체 무엇일까 밤을 꼬박 새다시피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아침 서둘러 다운타운의 K씨의 아파트 단지로 달려갔다. 


   

K씨와 알게 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정원 가꾸는 취미가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될거라며 친구 T의 소개로 친분을 맺었다. 식물과 꽃 그리고 천연비료나 퇴비 만드는 법 무엇보다 땅을 살리는 방법에 관해서 폭넓은 경험과 지식을 나눠주는 K씨는 늘 미소와 함께 겸손함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골머리가 아픈 일이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부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화단 일부분을 관리사무소로부터 위탁(委託) 받아 가꾸고 있는데 L이라는 이웃이 트집을 잡고 유치한 시비를 종종 걸어온다는 것이었다.

심술궂고 매사가 꼬인 사람이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서 40 여년을 넘게 살고 있어서 이만저만 유세를 떠는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곳에 입주하는 주민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에 살면서도 남의 집 포크와 수저가 몇개인지도 다 알만큼 오지랖이 넓다고 했다. 갓 이사온 주민들에게는 우아하고 친절하며 협조적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L씨의 눈 밖에 나면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해 못견디고 이사를 나가는 이도 생겼다니 꽤나 악명(惡名)을 떨치는 셈이었다.

자신보다 힘이 있는 매니지먼트 관리자 앞에서는 굽신대면서 유약해 보이거나 이민온지 얼마 안되는 신출내기들에게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힘을 과시한다고 했다. 쓰레기나 우편물에 관해서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물론, 개별적으로 불러 인신공격을 하거나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인 부분까지 비아냥 댄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소일거리로 가꾸는 개별 화단을 진두지휘 하듯 ‘이건 심지마라’ ‘이것은 심어라’ 등등 전장터의 대장처럼 일일이 간섭을 하니 오죽하면 별명이 골목대장으로 불릴까 짐작이 되었다.

다양한 인종과 이민가정의 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아파트 회사가 배려한 공간이 텃세를 부리는 한 사람때문에 취지가 바래고 있는 셈이다. 그 와중에 스트레스를 받은 이가 화단을 포기하고 나가면 그 공간을 L이 접수해 화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운타운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K씨가 다가왔다. 반가움과 황당함, 미안함이 섞인 표정이었다.

“옥시기(옥수수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가 사라졌어요. 고향 생각하며 키워보라고 선물로 심어 주고 가셨던 그 강원도 옥시기가 글쎄, 어제 보니 깜쪽같이 사라진 거예요. 그 자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땅 바닥이 고르게 다져 있었구요. 여기 오는 사람들 모두가 모른다고 하니 꿈을 꾼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대요. 다 자라면 씨도 받고 말렸다가 할로윈 때 장식으로 쓰려고 퇴비도 주고 물도 열심히 줘서 키가 사람보다 크게 자랐는데….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대체 건장한 남자 성인의 키보다 높고 지름도 2인치가 얼추 된 옥수수 대가 어디로 갔다는 것일까? 자고 나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릴 수 있을까? 아무도 본 사람도 없이….

“누가 욕심나서 파다가 자기 화분에 심지 않았을까요?” “꽃도 아닌 것을 누가 뽑아 가겠어요. 이미 뿌리가 내릴대로 내려서 뽑는다고 쉽게 뽑히지도 않을텐데요.”

누군가 작정하고 친 장난이 아닐까 알아봤지만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옥수수 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일단 퇴비를 만드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그곳은 화단의 맨 구석으로 관리인이 가끔씩 천연퇴비를 만들어서 나눠주는 곳이었다. 거뭇하게 썩은 퇴비가 쌓여 있었지만 어디에도 초록의 옥수수 잎이나 대는 보이지 않았다.

생활환경 쓰레기가 수북히 쌓인 집하장(集荷場)도 가보았다. K씨는 이런 곳에 있으면 삐죽하니 눈에 띌텐데 보나마나 없을거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긴 막대기로 들쑤셔 보았다. 거기서 반쯤 마르고 썩어가는, 그러나 분명한 옥수수 대와 잎이 보였다.

“Oh, my godness.....” 세상에나 누가 이런 몹쓸 짓을~. 옥수수 대는 통째로 뽑힌게 아니라 토막토막 잘려진 채 버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놀라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참한 옥수수 대를 보자니 얼마전 청소년 하나가 납치되어 살해당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신을 훼손한 엽기적인 사건이 순간적으로 오버랩 되었다.

쉽게 포기하고 잊어버릴 일이 아니었다. 이틀간 조용히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저런 짓을 했다면 아무리 식물일망정 꼭 찾아내어 따져야 할 일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L이 지목됐다. 얼마전 K씨를 찾아와 옥수수가 그늘을 만들어 자기 쪽 화단의 작은 꽃들이 햇볕을 못 받는다며 왜 꽃도 아닌 옥수수를 왜 이런 곳에 심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대놓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L이 옥수수 대가 사라지기 바로 전날 해가 지도록 몇시간을 화단에 머물다 밤 늦게 집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랬구나. 범인은 바로 L이야.” 아무리 일조권(日照權)이 이웃간에 분쟁의 불씨가 되는 맨해튼이라지만 옥수수 대 하나로 인한 그늘을 문제 삼는 것은 생트집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혼자 사는 할머니 집 고양이가 이상하게 죽어있던 두어달 전 사건까지 더해져서 몇몇 주민들은 진저리까지 치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분노한 것은 예리한 도구로 토막으로 잘려진 채, 그것도 쓰레기 더미속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식물도 생명인데 저토록 무참한 짓에 말할 수 없는 노여움이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어지고 있었다. .

평소 이름없는 꽃이며 하다못해 풀마저도 애정을 갖고 아파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한다며 자랑을 해대는 사람이 한뼘짜리 떡잎도 아닌 키가 180센티나 된 훌쩍 큰 식물을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이는 엄연한 ‘옥수수 살해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제목 Hand Croquis. 종이에 잉크. 2008.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은 모두 저런 느낌이 나는 손에서 나오지 않을까.

다음날 몇몇 사람과 함께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행위’를 한 L을 작정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따라 하루종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한 행위가 있으니 양심이란게 있다면 ‘부러 나오지 않겠구나’는 결론에 이르자 주민들은 메모라도 해놓고 나오자고 관리실을 찾아갔다.

직원 하나가 “L은 어제 아침 여행 갔는데…. 며칠 뒤에나 온다”면서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직원을 상대로 앞뒤 정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옥수수 대 하나 없어진 걸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 목에 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때 K 씨가 지나가는 말로 “화단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어 왔다”고 하자 “아 참, 그렇지 않아도 만나면 이야기 해 줄려고 했는데, 화단 가장자리에 있던 옥수수 뽑은 것 알고 있느냐?” 며 선수를 치는게 아닌가. 내용인즉 이러했다.

‘며칠전 해거름 무렵에 아이들 몇몇이 화단 근처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뒤로 넘어지면서 옥수수 대가 부러졌어요. 퇴비로도 쓸 수 없는 것이라 그냥 뽑아서 버렸어요. 내년에도 옥수수를 심으려거든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무리지어 심으면 어떨까요...한 개 심어서 몇개나 먹을 수 있겠어요?. 내년에 많이 심어서 저도 좀 주세요..’

우리 모두는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뭐야! 며칠 내내 잠을 설쳐가며 추리한 옥수수 사건의 진범(?)이 L의 악의적인 소행이 아니라 장난치다 뒤로 나자빠진 아이의 엉덩이라는게 아닌가?

한 인간의 고약한 성품과 식물에 대한 비정함이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옥수수 납치 살해와 유기(遺棄)라는 엄청난 공포 추리소설을 썼지만 그게 웃지못할 결론이 났으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하나?

이렇게 몇 사람이 쓴 한여름 밤의 공포 스릴러 서스펜스 소설은 황당무계(荒唐無稽)함으로 결론이 났다. 정말 허무한 반전(反轉)이었다. ‘한 여름밤의 옥수수 살해 사건’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아가사 크리스티나 스티븐 킹처럼 유명 추리 작가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거듭하면서 그럴싸하고 멋지게 여운을 남기며 끝나던데......우리는 ‘아주 웃기는, 아니 웃기지도 않는 형편없는 작품(作品)’ 하나를 쓴 셈이다. 이 한 여름 밤에~

추리소설은 아무나 쓰는게 아닌가 보다.


-The End-

 

▲ 제목 Hand Croquis. 종이에 잉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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