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아침 9시. 일요일 아침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TV를 켰다. 정규 프로그램은 거의 모두 중단하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긴급뉴스 허리케인’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마치, 방송에서는 허리케인 아이린(Hurricane Irene)이 어디에서 행패를 부리다 갔는지 피해지역과 상황을 찾느라 혈안이 된 느낌마저 받았다.
지난 밤 무시무시한 강풍으로 엄청난 비를 동반한 태풍은 급기야 로워(Lower) 맨해튼 전체를 잠기게 할 수도 있다며 지역 주민들 모두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릴 때의 그 시나리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녀 ‘아이린’은 온 듯 아니 온 듯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다른 곳은 몰라도 온갖 난리를 쳐대던 이 맨해튼만큼은….
아니, 오히려 다른 어느 날 보다도 조용하면서도 편안한 밤이었다. 바람이 더러 불긴 했지만 태풍을 동반한 정도의 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약한 비였다. 그 비 덕분에 우리 집 유리창은 마치 자는 동안 세차장에라도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나온 느낌마저 들었다. 상쾌함까지 느껴지는 아침이다.
맨해튼에 15년여 살면서 몇 번의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도 911 터진 직후의 패닉 상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폭탄이 장착되었다는 뉴스(오보였음)로 주변의 모든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된 ‘빨리 뛰쳐 나오라’던 강제명령으로 정신없이 나갔던 순간, 그리고 언젠가 맞았던 이틀간의 블랙아웃(정전)이 그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때는 언제일까? 전쟁이나 테러라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일 뿐이고 정작 우리에게 실감나는 공포로 온 것은 정전이 되었을 때 인 것 같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단수가 되고, 전화나 인터넷이 불통이고, 집안이며 도시 전체가 깜깜한 어둠속에 들어가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던 고립감은 소리없는 두려움 내지 공포로 다가왔다.
아무튼 며칠전부터 뉴욕은 종합 예방주사를 맞는 기분이었다. ‘허리케인 아이린’ 에 대해 시시각각 편성된 긴급뉴스와 시장과 뉴욕 주지사가 경쟁적으로 해대는 발표만을 듣고 있으면 전시 상황보다 더 긴박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방송에서는 친절하게도 비상식량을 챙겨라, 손전등을 준비해라, 구급약을 상비해라, 현금을 확보하라는 등 심각한 재난 상황을 대비한 안내가 더 겁에 질리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맨해튼에서 살면서 어제처럼 맨해튼을 다른 시각으로 본 날도 없을 것 같다. 온 도시가 마비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느 상가 어느 기관 할 것 없이 90퍼센트 이상이 문을 닫은듯 보였다.
미드타운의 한 옷가게를 지나는데 서른명 정도의 사람들이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도 왔냐 물으니 근무직원이 적은 만큼 쇼핑객들의 숫자도 조절해서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쇼핑충동을 불러 일으켰는지 너도나도 줄을 서는 모습은 실소(失笑)를 자아내게 했다.
▲ 중심가에 유일하게 문을 연 한 의류 매장에서는 입장인원을 제한해서 더욱 많은 손님이 몰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어제 정오부터 뉴욕 시민의 발이 묶였다. JFK공항이 폐쇄되고 기차 및 시외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지하철과 버스도 멈춰서고 급기야 터널과 다리도 통제됐다. 한마디로 뉴욕 자체가 멈췄다. 그러나 토요일도 가랑비 밖에는 오지 않았던 상황에서 아무리 예방 차원이라 하지만 잔뜩 겁을 먹고 시민의 발을 일치감치 묶어버린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 무시무시한 태풍이 옵니다. 제 말을 들으세요! 라고 몸으로 표현하는듯 하다. 종이에 연필. 2009
차량이 없는 그리고 인파도 없는 미드타운과 다운타운을 걸으면서 재미난 상황도 많이 보였다. 유리창이 깨졌을 때 파편이 튀지 않도록 포장용 비닐 테이프를 X자 혹은 사방 팔방으로 정신 사납게 붙여놓은 곳들도 많았고 모래주머니를 마치 군부대에서 요새 쌓듯이 무릎 높이까지 입구에 쌓은 가게들도 보였다.
▲ 식당 안에서 바라본 유리창. 허리케인의 강풍을 단단히 대비한듯 온통 테이프로 감쌌다.
▲ 6에브뉴 20가 상점 입구. 만약 이곳까지 물이 찰 정도라면 맨해튼은 완전히 Shut down 되는 상황이 되는데... 쌓아놓은 모래주머니를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수위가 높아져서 맨해튼이 완전 침수될 때 대비한 고육책(苦肉策)인듯 싶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대서양이 범람해야만 가능하니 어이없다고 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 아일랜드에서 여행온 여행객 3명이 쇼핑 주머니를 우산대신 모자로 만들어 쓰고 '아이러브 뉴욕'이라고 쓴 봉지를 뜯어 옷으로 입혀주고 있다.
어제 몇십 블럭을 장장 6시간 정도 걸어보면서 도심을 걷는 이들은 대부분 여행객이란 사실을 알았다. 뉴욕에 여행 온 여행자들 절반 이상은 다 스치고 다닌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여행을 와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들은 모든 문화행사가 중단된 가운데 그저 이 가게 저 가게들을 찾아 순례(巡禮)하고 있는듯 했다.
▲ 맨해튼 도로를 접수한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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