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6일 금요일, 소호의 작업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망사 모자를 쓰고 흡사 결혼식에 가는 드레스를 입은 신부 차림의 여성이 허겁지겁 고개를 푹 숙인 채 올라오고 있었다. 좁은 계단이어서 드레스가 밟히지 않도록 길을 비켜 주려고 벽으로 바짝 붙어섰다. 고개를 숙이고 가던 여성이 고개를 꺾는 순간 얼굴을 보게 된 순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다.
창백하다 못해 서늘한 빛의 얼굴, 오른쪽 뺨에 깊게 난 칼자국, 볼이며 입 안쪽으로 흘러내린 형상의 검붉은 핏자국하며……얼굴뿐만이 아니라 하얀 구두 위에 까지도 피범벅 모양새 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얼굴에서 넋이라도 나간듯한 모양새가 읽혀졌는지 계단 위로 뛰어올라가던 여성이 휙 고개를 돌려 씨익 웃더니만 ‘해피 할로윈(Happy Halloween)’ 이라며 ‘윙크’를 보냈다. 간격을 두고 올라오던 같은 일행의 ‘드라큘라 셋’이 그 광경을 보고 미친듯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어제꼈지만 나로선 웃음이 터지기는커녕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맨해튼에 살면서 이 때가 되면 한 두 해 겪는 일도 아니건만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완벽한 복장과 놀라운 분장술때문이었다.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모양새면 좋은데 하필 교통사고를 당한 차림이라거나 얼굴에 칼 맞은 모양새라면 아무리 재미로 했다손 치더래도 심장 약한 사람에겐 거의 위협적인 일이어서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 넘기기가 쉽지 않다.
뉴욕시 경찰국에 따르면 우범지역이 아닌 곳에서의 총기 사건들의 빈도수가 높아지는 때가 10월 말 즈음이다. 예를 들어, 얼굴을 스타킹 같은 것으로 뒤집어 쓴 강도 복장을 한다거나, 얼굴과 몸을 완전하게 가려서 식별을 할 수 없게 한다거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일지라도 얼핏 보기에 무기로 보이는 것을 지니고 어두운 곳에 불쑥 나타나 놀래키면 친구나 이웃을 도둑이나 강도로 오인하는 일이 종종 발생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방어차원에서 과잉 대응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고 보니 뜻밖의 불행한 사고들이 빈번(頻繁)하다고 했다.

재밌고 유쾌한 할로윈 ‘Happy Halloween’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제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공감 할 수 있는 캐릭터 복장과 화장을 할 것, 그리고 장소와 때를 가리고 장난의 대상을 구별할 것. 한가지 더, 아무쪼록, 현실과 혼동해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표시나는 ‘엉터리 분장’을 하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음 좋겠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 저녁 전철역의 ‘그 피칠갑 아가씨와 드라큘라 분장의 청년들’이 아니었으면 올 해 할로윈이란게 있었기나 싶을 만큼 물 건너 간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금요일 밤이 되면서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하더니만 급기야 토요일 아침엔 뉴욕시장, 뉴저지 주지사, 뉴욕 상원의원, 뉴욕 시경국장, 재난 국장, 뉴스 해설자까지 나와서 생방송으로 뉴욕을 강타할 ‘샌디’의 위력이 얼마나 클것인지 그 여파가 얼마나 무서울 것인지에 대한 추측성 예보를 속속 내보내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이라면 몰라도 뉴욕시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방송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들갑스럽다고 느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허리케인 아이린’이 왔던 해에도 저렇듯 똑같이 난리 법석을 떨었는데 아이린은 예보 내용을 무색하게 하리만큼 흔적조차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래서 강제로 대피했던 주민들이 엉터리 예보 때문에 고생했다며 방송사에 거세게 항의를 하기까지 했었다.
방송에서는 시시각각 강해지고 있는 폭풍우에 관해서 요란한 그래프를 동원해가며 지난 반세기를 통틀어 있었던 기록들을 일일이 들먹였다. 캐러비안에서 올라오는 3개의 폭풍우가 모여지는 싯점에 얼마나 무서운 폭풍우로 변할지 예보하면서 뉴올리언즈의 ‘카트리나 재해’를 능가하는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당부를 했다. 또한, 대서양 수위가 높아지는 만큼 뉴저지 해안가 지역에 사는 주민들과 로어맨해튼(Low Manhattan)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대피 명령(Evacuation)’도 속속 발령했다.
외출 했다가 집에 들어온 시각이 얼추 월요일 5시. 허리케인 샌디의 북상이 슬금슬금 감지되기 시작했다. TV를 켜니 속보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강풍에 나무가 집을 덮치고, 전봇대가 쓰러져서 전기가 끊기고, 미드타운에 신축중인 90층짜리 초고층 빌딩에서 하늘 꼭대기쯤 닿아 보이는 크레인이 강풍에 꺾이면서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어 주변을 통제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때를 같이해서 이미 공항들은 모두 패쇄 되었고 맨해튼과 연결된 페리, 전철,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도 통제 되었다. 심지어는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모든 교량과 지하터널까지도 통행을 막았다. 뉴욕시장은 이제 우리가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뿐이라며 방송을 계속 주시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비바람이 치는 월요일 오후, 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오전에 작성하다 말았던 글 두 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끝내기를 앞두고 있는데 전등불이 ‘깜~박’ 영어로는 브라운 아웃 ‘‘Brown Out’ 이라고 부르는 깜박임이 한 차례 더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정말 거짓말처럼 불이 나가 버렸다. 깊은 고요와 암흑 속의 정전 ‘Black Out!’이었다.

주변이 깜깜해져 버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게 아니라 작성했던 글이 순식간에 날라가버렸음이 믿기지가 않았다. 머리위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머리에 쥐가 나는 느낌까지도 들었다.
창문을 열어 젖히고 뉴욕에서 제일 높다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그럼 그렇지. 맨해튼이 정전일리가 없지. ‘여기가 맨해튼의 심장부라는 한 복판인데 설마하니 정전이 되겠어?’ 뭔가가 잠깐 착오(錯誤)가 생겼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라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가 앉았다.

▲ 정전 속의 유일한 빛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뿐. 10.31일 할로윈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제 3세계도 아니고 허리케인의 영향을 받는 대서양 인근도 아닌데…. 아무리 강풍이 세다고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뉴욕 맨해튼을 강타 할 수는 없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전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쓰잘데 없는 ‘기우’다 싶게 느껴졌다.
’ 5분, 10분, 30분~
곧 전기가 들어오겠거니 했지만 한번 ‘집 나간 전기’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10월 29일 월요일 저녁부터 11월 3일 토요일 아침까지 날 수 로는 5박 6일간, 시간으로는 정확히 107 시간 동안…….
허리케인 ‘샌디 (Sandy)’가 온다는 소리와 더불어 이 상황을 설명하기 더할 나위 없는 신조어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할로윈 행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Frankenstien’ 프랑켄슈타인과 폭풍우 ‘Storm’ 라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Frankenstorm’ (프랑켄스토옴)
‘괴물 폭풍우’ 라는 단어에 걸맞을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다. 48시간 쉴 새 없이 불어대던 비바람, 모두가 빠져나간 텅 빈 도시, 밤이면 암흑으로 변해서 그 누구도 접근조차 하기 어려워진 절반의 맨해튼은 흡사 ‘유령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한여름 로마에 남는 것은 여행객과 고양이라는 말이 있는데 오도가도 못하는 맨해튼에 남은건 우리처럼 맨해튼을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과 비바람을 피해 배회하던 노숙인들 그리고 꼼짬없이 갇혀버린 여행객들이 전부였다.
타임스퀘어에서 길을 묻던 여행자가 “할로윈을 분위기 내려고 이러는 것 아니죠? 실제 상황 맞지요? 정말 실감 나겠는걸요” 한다. 맞다. 정말 그랬다. 그 여행객은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 호기롭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뉴욕에 와서 ‘샌디’ 와 ‘프랑켄스토옴’을 함께 만난 그 청년은 뉴욕의 할로윈을 제대로 하고 돌아갔을게 틀림없다.

할로윈에 즈음해서 해낼 수 있는 상상력을 총 동원해서 그리고 지구상의 재난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괴기스럽고, 끔찍했으며 참혹하고, 잔인해서 공포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자행한, ‘마루타’라는 단어로 숨겨진 생체실험이 아닐까.

▲ 할로윈 때 손전등으로 해보는 그림자 놀이도 실제 정전속에서 하려니 마냥 무섭다.
그리고 캐릭터가 아닌 실제 상황으로 겪은 체험을 통해서 10월31일 단 하루가 아닌 일주일여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무서움을 동시에 느낀 할로윈을 꼽는다면 올 해만한 할로윈이 또 있을까?
강풍으로 풍비박산이 나버린 숱한 재해현장들도 그렇지만 맨해튼의 결코 짧지 않은 ‘Black Out’ 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고 공포스럽기조차 했다. 낮에도 전깃불이 없으면 암흑인 밀집된 건물들 속에서 엘리베이터 없이는 꼼짝할 수 없는 고층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기 없는 이곳은 테러보다도, 전쟁보다도 더 무서운 무엇으로 다가왔다..

▲ 아파트의 복도 역시도 암흑이다. 한 낮에 현관문을 열어야만 그나마 저만큼의 빛이라도 감지된다. 이웃 누군가 멀리서 손전등을 가지고 오는데 가까이서 보고 확인하기 전까진 서로가 무섭긴 마찬가지이다.
정전이 되는 순간 전화도 끊기고 케이블도 끊겼다. 라디오도 TV도 인터넷도 안되니 세상이어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는 있었지만 충전 안된 전화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물이 없었다. 동네의 편의점에는 마실 물이 일찌감치 동이 나 버렸다. 손전등도, 초도 없다고 했다.
마실 물이야 정 없으면 다른 청량음료로 대용하겠지만 화장실 물은 사정이 달랐다. 물을 파는 동네로 걸어가서 어깨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물병을 베낭에 지고 암흑속에서 지옥훈련을 하듯 360 여개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숨이 차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

▲ 길에서 만난 이웃들. 손전등으로 서로의 얼굴을 비추는 그 자체만으로도 할로윈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노인이나 환자가 있는 집, 만삭의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 그리고 평균을 훌쩍 넘는 과다체중들이 숱하게 널린 뉴욕에서 수십층을 오르고 내리다 심장에 무리가 와서 응급상황이 벌어지는 등 심각한 상황이었다.

▲ 맨해튼 안의 편의점 마다 배터리가 모두 품절이다.
고층의 주민들에게 예고없는 정전은 뭐랄까 생존을 위협받는 일과 다름없어 보였다. 밖에서는 24시간 울려대는 경찰의, 소방차의, 병원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쉼없이 들려왔고 밤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부는 호루라기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렌터카를 해서 밖으로 나가기에도 이미 늦었고, 차가 있다고 해도 나갈 수도 없고, 설사 나간다 해도 연료도 없었던 지난 일주일. 호텔도 갈 수 없었다. 호텔도 정전에서 제외되지 않았으니까. 설사 있었다 해도 이미 빈 방도 없었다.

▲ 할로윈 퍼레이드를 보러 온 벨기에 여행객들. 주변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서 편의점에서 해결하지만 색다른 경험이어서 재밌다고 했다. 이들이 머물던 곳도 그날 밤 부터 정전되었는데 깜깜하고 물 안나오는 게다가 고층의 호텔에서 과연 '색다른 경험'으로 즐겁게 보냈을런지?
정전기간 내내 물과 전기 ‘쟁탈전’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전기코드를 꼽을 수 있는 곳이면 사람들로 넘쳐났고 줄을 섰지만 충전이란게 상당 시간 걸리는 일이라 그도 쉽지 않았다.
어떤 욕심 사나운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동시에 충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기 코드를 들고 나와서 컴퓨터를 하면서 아이폰으로는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으로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는 모습도 보였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기 쟁탈 역시도 마시고 먹는 것 이상으로 혹독(酷毒)했다.


몇 년전 전기 사용량의 폭주로 과부하가 걸려서 만 하루 동안 정전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잠시 황당하기만 했었다. 시민들도 낙관적이었고 스마트폰도 없었고 계절도 여름이어서 밖에 나와 이웃들과 얼굴을 터가면서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길거리 바비큐를 해먹으면서 즐기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기간의 정전은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기가 없으면 낮에도 지하 굴속이나 매한가지인 이 도심 속 빌딩에서 밤이면 밤대로 도로에 인적이 완전히 끊기는 시각이 되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유령의 도시나 혹은 폐허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그뿐이랴? 어둠 속에서 맞닥뜨리는 인기척은 그가 내 바로 옆집 사람이라 할지라도 식별되기 전에는 누구 할 것 없이 막연한 두려움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 월요일 자 가판대에 나온 무료 신문. 어떻게 예상했을까? '귀신들의 동네'라는 말이 정전속의 맨해튼에 정말 마침한 표현이었다.
맨해튼에 전기가 들어온지 닷새째. 하지만 아직도 케이블은 복구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사는 곳이 첨단을 달린다는 맨해튼인지? 뉴욕의 심장부가 맞는지? 아직도 황당하기만 하다.



‘프랑켄스토옴’이라는 이름으로 맞았던 할로윈’. 아마도 여기사는 우리는 물론이고 여행객들 에게 까지도 2012년 맨해튼에서 맞은 할로윈은 보고 즐긴 정도가 아닌 피부로 실감한 그래서 절대 잊을 수 없는 ‘Unforgetable Halloween’ 으로 그렇게 오래도록 회자될 게 틀림없다.


▲ 제목/ A Figure Croquis 재활용 종이 뒷면에 흑연심 2012 설명/ 일주일 가까운 맨해튼의 암흑 속에서 망연자실하던 느낌을 이 크로키를 통해서 나눌 수 있을까.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09:51:09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