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 필리핀에 사는 친구가 연말 휴가를 얻어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모친을 모시고 뉴욕 여행을 왔다. 두 사람 다 간만의 뉴욕 여행이어서 무척이나 상기(爽氣)되어 있었기도 했지만 모처럼의 겨울 여행이어서 그런지 추운 날씨를 만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해서 만나기로 한 날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다소 쌀쌀한 날이었지만 성탄이 가까워 오는 싯점이어서 그런지 쇼윈도우를 구경하는 이들과 쇼핑 나온 인파들로 주변이 꽤나 북적댔다.

마침 막 지하철에서 올라온 네 명의 만화 캐릭터 복장을 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에게 친근한 디즈니랜드의 주인공인 미키 마우스(Mickey Mouse), 미니 마우스(Mini Mouse) 그리고 TV 어린이 프로의 주인공인 엘모(Elmo)와 만화영화 주인공 도라(Dora the Explorer) 이렇게 넷 이었다.
미국인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미지여서 그런지 이런 캐릭터들과 어울려 사진 찍는 이들이 많다. 유독 올 해 들어서는 42가 타임스퀘어 주변이나 59가 컬럼버스 서클, 혹은 34가 메이시스 백화점 주변에서 계절과 상관없이 삼삼오오 모여서 영업을 하다가 경찰이라도 떴다 하면 삽시간에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리곤 하는 모습을 자주 목도(目睹)했다.


마침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막 다가가려는데 그들이 먼저 친구 어머니에게 다가가더니 ‘해피 홀리데이즈!’ 를 연발하면서 다짜고짜 어깨동무를 했다. 영문 모르는 친구와 어머니는 그 캐릭터들을 알아보고 이것도 뉴욕에서만 있는 풍경이라며 즐거워했다.
얼결에 사진을 찍고 난 뒤 친구와 어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고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 만화 주인공 둘이 그 앞을 막아 섰다.
'팁!(Tip)!' '달러(Dollar)!'
그들은 어깨에 걸쳐고 있던 빨간 헝겊 가방에 쓰여진 ‘Tip’ 이라는 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가방을 벌렸다. 영어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세가지는 똑똑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해피 홀리데이즈, 팁, 달러 이렇게 …..즉, 사진을 찍었으니 당근 돈을 내고 가라는 분위기였다. 친구가 지갑을 열어 $20짜리 밖에 없다고 보이자 그들은 잽싸게 그 돈을 가져가고 1인당 1불씩 모델 값 계산을 했는지 꼬질꼬질한 1달러짜리 18장을 내밀었다.

당한 입장에서도 보는 입장에서도 조금 황당한 기분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곧장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이어서 영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과, 아이를 동반한 부모, 혹은 노부부들에게만 붙어서 사진을 찍자고 했는데 재밌어 하는 이도 있었지만 황당하다는 표정도 있었고 더러는 짜증내는 이들 보였다.
아이 둘과 온 애 엄마는 큰 아이가 졸라서 사진을 찍긴 했는데 사진 찍자마자 벗어 버린 거대한 모자 속에서 드러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아이가 말했다. “미키 마우스가 아니쟎아..” 대략 50대 정도의 남미계로 뚱뚱하고 작달만한 키에 갓 이민 와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아저씨였다.

모자를 벗어가며 돈을 세는데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본 애 엄마는 돈을 쥐어주고 돌아서면서 “이미지 장사를 할 줄 모르는 아마츄어” 라며 혼잣말로 푸념을 했다. 실망의 빛이 가득한 아이를 향해 동심을 다칠세라 “미키 마우스는 아니지만 아마 미니 마우스는 진짜 일거야”라며 애를 다독였다.
그들과 다정한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만화의 주인공들을 만난 기분이었을테고 돈을 받아 쥘 때 마다 벗어 올리던 커다란 가면속에서 드러난 그들을 보면서는 마치 '사기'를 당한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진 찍은 댓가로 돈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억센 스페니쉬 억양과 딱딱한 표정을 대하는 순간 ‘꿈에서 깨는’ 뭐랄까, 캐릭터 역할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분위기였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모자를 벗었을 때 환하게 웃기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11월 말의 추수감사절을 지나자마자 뉴욕은 서둘러 ‘크리스마스 시즌’에 몰입했다. 이른 트리 장식들이 내걸리고 여기 저기 연말 분위기를 부추기는 모습들에 부산했다. 여느 해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12월 시작도 전부터 Happy Holidays!를 들었다는 것.

예전에는 12월 중순 접어들면서 접한 ‘메리 크리스마스’ 였는데 언제부터인가 ‘해피 홀리데이즈’로 바뀌었다. 종교적으로 무관한 사람들을 배려한 것도 있지만 시즌과 상관없이 일치감치 쓸 수 있는 문구 때문에 더 자주 듣게 된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직역하면 말 그대로 '휴가 잘 보내세요’ ‘연말 즐겁게 지내세요' 지만 적어도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에서는 ‘팁을 잊지 말라’는 주의의 뜻이 느껴진다면 믿을 수 있을까.

▲ 연말 시즌에는 지하철의 악사도 특별한 복장을 갖춘다
12월 중순부터는 자기 직책과 상관없이 자청한 도어맨(Door Man)들이 많이 생겼다. 멀리서부터 뛰어 와서 들고 나는 이들의 문을 열어주고, 승강기 단추를 대신 눌러 주고 기다리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수리나 수선을 전문으로 하는 핸디맨(Handyman)들 조차 할 일 없이 로비를 배회하면서 들고나는 이들 모두에게 '해피 홀리데이즈'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고 묻지도 않은 개인의 편치 않은 가정사를 힘주어 강조하는 모습엔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맨해튼에서 생활한지 15년을 통해서 팁이라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고 의무사항 이라는 것 체득한지 오래다. 연말에 집배원, 가사도우미, 보모, 관리인 등등에게 전해지는 팁 문화를 이해하지만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이들까지도 작정하고 날리는 미소와 넘치는 아부성 인사는 거부감을 넘어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올 해 뉴저지 포트리의 콘도로 이사한 분은 전화를 걸어 이 연말에 얼마로 기준을 삼고 팁을 줘야 하는지 물어왔다. 직원이 25명 남짓인데 요즘 들어서 얼굴 익히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불편해 죽을 지경이라며 하소연이다. 팁 문화로 해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도 친절한 모습을 보이면서 '해피 홀리데이즈' 를 날리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팁을 바라보고 하는 낯간지러운 댓가성 멘트들을 접할 때마다 어서 연말이 빨리 지나가 버렸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이다.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뉴욕에서 25년째 살고 있다는 이와 ‘팁’에 관해 다른 생각을 나누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맨해튼에서 선망 받는 직종의 하나가 ‘도어맨(Doorman)’
이라는 것이다.
한국사람에게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어퍼 이스트(Upper East)의 파크 에브뉴에 있는 한 유서(由緖) 깊은 아파트에는 도어맨이나 경비원, 관리인으로 들어가기 위해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갑부들이 산다고 소문난 30개의 유닛이 있다는 한 아파트에서 도어맨의 연말순 수입이 자그마치 1억원($100,000)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천만원을 잘못 알아들었나 싶었다. 그런 아파트의 도어맨이나 관리직의 수퍼(Superintendant) 라고 불리우는 직종은 우리가 아는 그냥 현관문이나 차 문을 열고 닫는 직종이 아니라는 뜻이다.
맨해튼의 고급 도어맨이 갖춰야 하는 조건으로 인물과 신체조건, 학력, 매너, 외국어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친절해야 하는 기본 사항 외에 직업의 특성과 ‘무거운 입’도 중요한 항목이라고 했다.

그에 비하면 일반인들이 책정하는 팁은 정말 소액에 해당이 되겠지만 문제는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느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지도, 내키지도 않으면서 의무사항으로 해야 하는 팁 문화는 미국에 살면서 가장 이해가 요원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일년간 애쓴 노고와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올 때 하는 ‘Happy Holidays!’ 야말로 연말을 부드럽고 즐겁게 만들 수 있을텐데 말이다. ‘달러’ 없이는 ‘해피 홀리데이즈’ 자체가 불가능한 미국의 현실이 씁쓸하다.

엊그제 올라오는 뉴스 중에 큰 비중으로 다뤄지는 것 중의 하나가 올 연말의 북미 지역 소비경기(景氣)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 보다는 좀 낫지만 예상 기대치에는 크게 못미치는 결과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뉴욕 뉴저지 일원에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로 인한 자연재해와 샌디 훅 학교의 총기 참사(慘死)로 해서 들뜨기 쉬운 연말의 소비심리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 아닐까? 어쩌면 그 낮은 소비지수의 요인은 각 개인적으로 해피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반증(反證)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미국만 그럴까? 아니, 한국도 마찬가지. 어쩌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것 같다. 대선이 끝나고 더 이상 사회에 나라에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스스로 삶을 내려놓은 잇단 노동자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 드는 비탄(悲嘆)과 참담(慘憺)함을 어찌 다 말로 하랴……. 2012년만큼 ‘해피 홀리데이즈’ 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겉돌았던 적이 있던가 싶다.
12월 28일 금요일이었다. 하늘을 보니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있다. 달빛이 시리도록 명징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하다. 달님을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두터운 구름이 이내 덮어 버렸다. 그 짙고 걷힐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구름층을 보면서 하마터면 그 뒤에 보름달이 있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릴 뻔 했다.

구름들은 지나가게 되어 있다. 아무리 짙고, 어둡고, 두터워도 구름은 언젠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기 마련이고 절대 그 달빛을 가릴 수는 없다는 그 만고의 변치 않는 진실을 믿는다.

▲ 제목/ The Hand. 2006. 종이에 연필. 설명/ 모두가 외치는 ' 해피 홀리데이즈'를 어디가야 만날 수 있을까... 주고 받는 '팁' 속에도 물론 있겠지만 '마음의 평화' 와 '미래에 대한 희망' 없는 'Happy Holidays!'가 어디 가당키나 할까?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09:51:09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