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나갔다가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향을 잃었다. 부속으로 딸려 온 네비게이터를 켰지만 화면이 작아서 보기도 나쁠뿐더러 안내가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초행길이라 그것을 쫒을 수밖에 없었다.
네비게이터는 우리를 펜실베니아의 작고 후미진 타운을 통과하게 만들었다. 허접한 동네를 지나치는데 먼 발치에 육중한 철문과 함께 유서(由緖) 깊어 보이는 묘지가 눈에 번쩍 띄었다.
‘잠깐 차 좀 돌려봐.’ ‘왜? 지금 서둘러야 겨우 렌터카 반환할 수 있는데’ ‘저 먼발치에 역사 깊은 공동묘지가 하나 보이네. 특별한 곳 같으니 거기 좀 잠깐 둘러보고 가게. 5분 정도면 될 것 같아’
차를 돌렸다. 미국 전역에 묘지 없는 곳이 있을까마는 그곳은 일반적으로 만나는 그런 묘지가 아니었다. 빈민촌(貧民村) 한 가운데에 위치해 묘한 대조를 이뤘고, 무엇보다 보기 힘든 큰 철문이 눈길을 끌었다. 현재는 쇠락(衰落)했지만 지난날에는 분명 화려했던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 이름도 없는 무명의 비석
철문외에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순전히 ‘빛’이었다. 저 멀리 막 해가 지려는 석양(夕陽)이 높은 곳의 키 큰 비석들에 반사(反射)되는 그 기묘한 정경이라니….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갈까하다가 공동묘지의 규모가 하도 커 보여 차를 살살 몰아 둘러보기로 했다.
▲ 묘비명은 마모돼 세월의 흔적속에 사라졌다
▲ 부서져 조각이 난것을 철골로 간신히 유지해 놓은 얼굴 부조 비석
예상했던 대로 묘비명이 비 바람에 마모(磨耗) 된지 오래이고 돌이끼가 핀 비석들을 보아하니 그 고색창연(古色蒼然)함이 1700년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 1816년에 태어나서 1845년에 죽은 이의 비석
묘지 입구의 육중한 철문, 다양한 형태의 비석들, 넘어지고, 부서지고, 닳아 없어진 형태들…..묘지 이곳저곳의 죽은지 오래된 고목들, 게다가 붉은 석양 빛이 제일 먼저 닿은 고목의 끄트머리에는 까마귀 떼까지 앉아 있었다.
▲ 석양에 반사되어 붉은 빛이 나는 비석들
▲ 엄청나게 높은 고목위의 까마귀 떼
이런 곳에서 영화 촬영하면 정말 ‘악’ 소리 나는 호러물이 만들어지겠다 싶었지만 우리는 불랙홀로 빠져 들듯 더 깊게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에 남편은 그동안 봤던 공포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여기서 그만 나가자며 차를 돌렸다.
괴괴한 정적(靜寂)의 묘지.. 핏빛처럼 붉게 물드는 비석.. 무덤위로 길게 눕는 그림자들.. ‘까악까악’ 비명(悲鳴)처럼 울어대는 까마귀의 불규칙한 날개짓, 깊어가는 어둠의 장막(帳幕)..
그야말로 할로윈 영화의 한 장면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 비석에 그림자가 눕는 일몰 시간
▲ 십자가가 비석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 석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 십자가 비석
길어야 10분 정도면 충분히 볼거라 예상했던게 어느새 40 여분이 훌쩍 지나버렸다. 주변이 어둠 속에 묻히고서야 인기척이 하나도 없고 우리 두 사람만 있다는 생각이 미쳤다. 서둘러 창문을 올리고 문도 잠근 채 출구를 찾아 차를 몰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무리 돌아가도 방금 들어온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묘지의 규모가 어찌나 크고 넓은지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 표식(標式)도 없던 그곳은 어둠이 짙어지면서 자동차 불빛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비석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이 만약 할로윈이라면 정말 제대로겠다’ 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수습(收拾)해 보려고 했지만 얼굴이 이미 굳어진지 오래였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곳이 빈민촌 바로 옆 할렘 분위기가 물씬한 곳이어서 그런지 더욱 무섭고 스산했다.

그러다가 다행히 어둠 속에서 들어온 출입구로 보이는 곳을 겨우 찾긴 했는데...
‘Oh, my goodness!!!’ (아이고 맙소사)
남편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들어올 때 멋있고 유서 깊어 보이던 철문은 이미 닫힌지 오래였다. 그 위엔 육중한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고 주변 어디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안내나 연락처도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손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공포(恐怖)가 걷잡을 수없이 몰려왔다. 렌터카 반환은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였고 그 밤을 꼼짝없이 공동묘지에서 지새워야 할 형국이었다.
그 뒤의 상황들은 돌이키기만 해도 오싹하다. 어떻게 그 곳을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한편의 공포영화를 방불케 한다. 그 과정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는 공원묘지의 헤드스톤(headstone)을 연상케 하는 인물 크로키
2007 먹에 종이 kimchikimnyc@gmail.com
미국의 세미트리(공동묘지)는 한마디로 아름답다. 웬만한 공원보다 잘해놓은 곳들이 많다. 그러나 묘지에 갈 때 적어도 두 가지 주의사항은 지켜야 한다.
일몰 즈음해서는 가지 말 것, 입구 안내판이 있는지 확인하고 문을 잠그는 곳인지 꼭 확인할 것. 그래야 심장이 멎을듯한 공포속에서 한밤중에 묘지에 갇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날의 사건 이후, 우리는 해가 뉘엿대는 시간엔 절대 묘지에 가지 않는다. 아무리 꽃이 만발하고 아름답게 가꿔진 공원묘지도 ‘묘지는 묘지더라’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할로윈(Halloween)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아직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억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