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한 번호가 찍히는 전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걸려 왔다. 잘못 걸린 전화겠거니해서 무시하고 있는데 이어 음성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신청서 접수 되었습니다.’ ‘인터뷰 건으로 전화 드립니다.’ ‘약속이 잡혔습니다. 연락주세요.’
얼마전에 ‘캐스팅’에 관해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지인들, 연극과 영화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한때 엑스트라가 꿈이었다” 라는 내 말에 박장대소(拍掌大笑)들을 하였다. 뉴욕만큼 기회가 많은 곳도 없으니 이제라도 그 ‘소박한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용기와 배짱을 두둑히 심어 주었다.
▲ Pink Figure/Watercolor/2008 앉은 자세의 이 모델은 이렇게 말하는것 같다. ‘절 좀 봐주세요. 배우가 되는 꿈을 먹으며 살고 있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해보자’ 싶어 집에 오자마자 뒤져보니 상업 모델, 단역 배우, 엑스트라 등을 뽑는 에이전시들이 넘치고 있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 한곳에 가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름, 성별, 키, 나이, 신체조건 등을 적고 최근에 찍은 사진 한 장 남기고 온게 전부였는데 그 뒤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 접수창구. 에이전시를 이끄는 멤버들로 보이는 이들이 대략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전화 해달라는 메모가 계속 들어왔지만 막상 전화를 걸게 되지는 않았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을 때 정중하게 사양 할 작정으로 받았다. ‘아시안’이 신청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며 인터뷰를 ‘꼭’ 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 ‘꼭’이란 단어가 이상하게 나를 고무(鼓舞)시켰다. 한편으론 그 간곡하기까지 한 요청을 묵살할 명분도 딱히 없었다.
약속은 토요일 오후로 잡혔다. 내심 기대도 되고 흥분이 되어 조심스럽게 영화관계자 한 분께 캐스팅 인터뷰 받으러 간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분으로부터 ‘시작이 곧, 반’ 이라며 독려하고 응원하는 이메일까지 받고 나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났다.
▲ Purple Figure/ Watercolor/2008 설명: 탄탄하고도 균형잡힌 몸을 가졌던 이 모델은 댄서를 한 경력 덕분인지 외발서기 등의 다채로운 포즈를 많이 선보였는데 누드모델은 부업일 뿐이고 자신은 꼭 할리우드로 진출하는게 목적이라고 했다. 그 뒤로 만난적이 없지만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인터뷰가 잡혔다는 말에 남편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캐스팅을 하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며 이 대도시가 화려하고 반짝거리지만 도처에 무서운 함정(陷穽)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곳 아니냐며 그 약속을 취소하기를 종용(慫慂)하였다.
어려서, 그러니까 대여섯살 무렵부터 나는 어른들을 따라 서울 나들이를 곧잘 다녔다. 아주 어렴풋하지만 서울에 갔을 때 들은 어른들의 대화 한토막이 잊혀지지 않는다. “참말로 멀쩡한 대낮에 코를 베어가고도 남을 곳이 서울이라더니 참 내, 그말이 딱 맞네요.” 그땐 ‘코를 벤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당연히 못알아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 서울과 연계해서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코를 베어가는 무서운 곳’으로 입력되어 버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사기 당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고 뉴욕이라는 대도시라 생각하니 겁이 났다. 망설이고 있는 참에 약속시간을 재차 확인시켜 주는 ‘친절한 전화’와 확인 이메일이 다시 왔다.
‘일단, 가보자’ 이래뵈도 나는 초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도 했었고 비록, 흑백 TV 시절이었지만 M 방송국에서 녹화까지 해서 공중파 방송도 탔지 않은가 말이다. 그때 맡았던 내 배역이 ‘장군’ 이었지 아마! 그리고 그날 녹화를 마치고 나올때 받았던 세모난 모양의 분홍색 사탕 몇 봉지를 의기양양 하게 받아들고 갔던 기억과 달콤한 사탕 맛까지 어슴프레 떠올렸다.
▲ 봄기운이 가득한 토요일 낮. 긴장반 기대반으로 타임스퀘어 부근에 있는 인터뷰 약속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수퍼스타가 되는 길이 마치 무지개 마냥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느껴졌고 잘하면 단역 배우이지만 혹 누가 알아? 오스카 시상식 레드카펫 밟는 것도 시간문제가 될지 하는 ‘참으로 야무진 꿈’ 까지 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올 들어서 부쩍 돈 들어갈 일이 많아져서 내심 고민 중이었는데 이참에 부 수입원이 생겨 준다면 이 또한 얼마나 떳떳하고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인가 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저렇듯 전화를 해댈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거야. 어쩌면 내가 소화해 낼 어떤 배역이 있거나 찾는 모델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분명할거라고 믿자 목에 석고붕대를 한 양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퍼스타가 되는 길! 며칠 사이에 아니 졸지에 나는 그만 간덩이가 부어도 아주 단단이 부은 못말리는 ‘연예지망생’ 이 되어 있었다.
▲ 미키마우스와 짝을 이룬 미니마우스가 길 건너편에서 ‘인터뷰 잘하고 오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 즈음에 방송과 신문에서는 연일 연예 지망생 이름이 하나 오르내리고 있다. 모순(矛盾)된 사회구조 속에서 강제로 요구된 성상납이 한 여성 연예 지망생을 자살로 몰고 갔던 사건. 그 2주기를 맞으면서 당시 유야무야(有耶無耶) 묻혔던 사건이 서서히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는게 보였다.
그때 많은 국민의 공분을 샀었건만 어떤 진실도 밝혀진 것 없이 성 상납을 강요한 소속사의 사장의 이름도 쉬쉬 묻히고, 성접대를 받아 챙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수십명이나 되는, 그 이의 표현대로 '악마'라 불린 그 어느 악마의 이름 하나도 밝혀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덮혀 졌었다.
자신의 죽음을 빌미로 해서 사회에 그 현실을 고발하고 그러한 전철(前轍)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죽음속에서 절절이 묻어나 있었지만 진실은 왜곡되고 철저히 은폐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늦었지만 이 참에라도 밝힐 것은 밝히고 단죄할 것은 단죄해서 유린당하고 짓밟힌 가엾은 영혼을 위로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건물 7층 복도 끝에는 20 여개의 접수를 할 때 기다리는 대기 의자들이 보인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다. 타임스퀘어 부근의 45가에 있던 한 빌딩에 들어서자 건물이 떠나갈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한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
▲Yellow Figure/ Watercolor/2008 체조선수처럼 몸을 크게 하던 동작을 통해서 모델에게서 자신감을 본다.
<하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