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목요일 동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과 더해서 눈이 부시도록 다가왔다. 열사흘 만에야 만나보는 이 눈부신 햇빛은 실로 감개무량하여서 나도 모르게 ’ 아, 햇님이다 ’ 라는 조용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지난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두고 나는 마치 가까운 가까운 곳에서 저비용(低費用)으로 며칠 쉬다 올 것처럼 휴가날짜를 잡고 이런저런 일정을 짜는 부산한 시늉을 하면서 모종의 깜짝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남편의 상사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했으니 비밀은 아니었지만 남편 몰래 진행을 시키다 보니 이래저래 깜짝 쇼가 되었다. 나 홀로 짠 비밀 프로젝트를 두고 굳이 제목을 부친다면 ‘연어가 되어 거슬러 올라간 남편의 귀향’ 쯤 이라고나 할까?
▲서설이 내린 스톡홀름의 알란다 공항
남편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자신의 뿌리는 스웨덴 그중에서도 스톡홀름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 미국인 중에 원주민을 제외하곤 모두가 빠르고 늦음만 있을뿐 모두 이민자이고 보니 남편은 자신을 꼭 스웨덴 계 미국인이라고 소개를 한다. 스웨덴어를 구사하거나 스웨덴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맨해튼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클럽 멤버로서 바이킹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알란다 공항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얼굴은 스웨덴 국왕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Carl XVI Gustaf.64세 )와 왕비 실비아(Silvia) 부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스웨덴을 가보려고 궁리를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늘 성수기 때의 높은 항공료와 그때마다 산출해본 여행 예산이 늘 부담이 되었기에 ‘다음에’로 미룬게 벌써 십년이 지났다.
그리하여, 결혼 10주년을 뜻깊게 기념하기 위해 나름 고민하여 나온 방안이 나의 절대절명의 비상금인 적금을 깨가면서 마련한 스웨덴으로의 여행이었다. 실은 여행이라기보다 ‘귀향’ 이라는 이름으로 준비하였다.
▲스톡홀름의 가장 오래된 타운 감라스탄의 풍경. 낮 2시인데 벌써 어둑해져 있다.
겨울에 스칸디나비아를 간다고들 하면 아침 8시나 되어서야 여명이 트고 오후 3시면 어둑해지는데 뭘 볼 수 있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내가 느끼는 스칸디나비아는 밤이 없는 여름의 ‘백야(白夜)’ 보다는 18시간이 어두운 겨울에 그 진가가 느껴질 것 같았다.
▲ 노벨박물관에서는 쵸콜릿도 메달 모양으로 만들어서 판다.
설령 일조량이 짧아서 볼 것을 많이 놓친다손 하더라도 스칸디나비아를 느끼기에는 겨울만한 때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비수기(非需期)인 틈을 타서 스톡홀름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스웨덴은 정말이지 깜깜하고 추웠다. 아침 9시 상황이 오후 5시쯤으로 읽혀지니 머무르는 내내 낮인지 밤인지 구별하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더해 영상인 경우엔 비가 영하인 경우엔 눈이 내렸고 온도는 뉴욕과는 화씨로 무려 30도 넘게 차이가 났다.
▲왕궁의 근위병 근무교대식. 낮 12시 15분이면 어김없이 치뤄진다.
물론, 준비를 하면서 일기예보를 대충 봤지만 설마 그럴리야 하는 안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몰라서 털모자니 장갑이니 귀마개니 하는 것 까지 준비해 갔지만 우리가 한 채비로는 스웨덴의 겨울 날씨를 범접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스웨덴에는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레인디어가 쇼윈도우 장식으로 많이 보인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날이 많아서 체감온도는 한결 낮다보니 한 시간만 걸어도 코도 볼도 다 얼어 붙는듯 싶었지만 우리는 외계인처럼 최대한 싸매고 ‘걸어서 봐야만 제대로 보인다’는 철학을 쫒아 눈,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상관없이 용감무식하게도 대여섯 시간씩 걸어 다녔다.
▲스웨덴국기의 노란색과 파란색을 생활용품과 의상에서 상징적으로 잘 활용해서 쓴다.
스톡홀름과 주변의 섬들을 다녀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고 남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선조들을 떠올리며 연계가 있는 곳을 따라 짚어 나갔다. 바로 윗대의 흔적을 찾는다면 모를까 몇 대의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 그 입김을 맡기엔 무리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신적인 고향이 어디에 있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음식으로, 어떤 전통으로 삶을 유지해 오고 있는지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지만 맛을 보는 큰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막연했던 땅과 언어 그리고 정서를 막상 가서 부대끼고 느끼고 나면 거기서 배우는 긍정적이고 또, 부정적인 부분 모두를 뭉뚱그려 선조의 나라가 그리 멀지 않고 언제든지 편하게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음을 느낀 것으로 첫 여행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생선이 그려진 부스들은 스웨덴사람들이 즐기는 청어 '헤어링(Herring)'을 판다는 사인이다.
실내 온도와 바깥 온도의 차이가 너무 크고 밖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그랬을까? 스톡홀름의 고급 숙소에서조차 방 안의 온도는 왜 그리도 낮던지 우리는 사서한 고생덕분에 감기가 걸려도 제대로 걸려서 돌아왔다. 뉴욕에 들어올 즈음엔 아예 목소리까지 잃을만큼 아주 심각한 목 감기를 둘이 똑같이 한 짐씩 지고 왔다.
뉴욕 돌아온 뒤 내내 마른 기침은 가시지 않아 산발적으로 시작되면 자지러지게 북풍이 치고 간 것처럼 힘이 들지만 스웨덴의 인증샷같은 감기 선물은 한동안 갈 것 같다. 사서한 고생치고는 혹독할망정 그래도 정신적인 고향을 향한 첫걸음의 의미는 충분히 건져 올린 것 같다.
▲왕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 왕이 갖춰야 하는 지혜로움과 덕망을 왕과 왕비가 있는 스웨덴에서 상상해본다. 제목 '나는 왕이로소이다' 2007. 마분지에 먹.
이번에 남편의 귀향을 계획하면서 가슴 한편으로 준비한 만남이 있었다. 한국 입양인(入養人)들과의 만남이었다. 순탄하게 주고받던 이메일이 도착하기 직전에 결렬이 되었다. 그쪽에서 보내온 제일 마지막 이메일에서 했던 질문에 내 대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입양인일 것으로 여겼다가 아니라는 대답에 실망을 한게 역력했다.
▲스톡홀름엔 오래된 범선들을 호텔로 응용해서 쓰는 곳이 많다.
아주 오래 전 북유럽에서 충격으로 왔던 ‘한국인 입양아’ 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을 두고 화두처럼 그리고 빚처럼 남아 있었다. 언제고 북유럽으로 다시 돌아올 즈음엔 뭔가 한국인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입장에서 오고 싶었던 내 바램이 오래전부터 있었기에 그것을 실천하고 싶었다.
남편의 귀향의 성격과 입양된 입장에서 느껴지는 귀향의 의미는 분명 다를 것이다. 입장이 다르고 처지나 상황이 명백하게 다르지만 낯선 조상의 고향을 향한 나아가 뿌리를 향한 입장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믿어서 조심스레 남편과 상의를 했고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했지만 그들에게서 받은 갑작스러운 묵묵부답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여행기간 내내 연락 받을 수 있는 장소와 연락처를 남겼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도 그들 입장을 한번 더 돌이키게 했다.
▲도착한 11월 20일 크리스마스 시장이 섰는데 양초와 트리 장식품을 파는 수공예품 가게가 대부분이다.
당초 내 마음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이해해주고, 맘고생과 서러웠을 많은 부분을 감싸줄 수 있다면 분명 고향을 잃지 않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유색인종....동양인은 커녕 흑인 히스패닉 조차도 없는 순 노랑머리들속에서 외돌톨이로 커간다는것은 아무리 좋은 양부모를 만나고 사랑을 받고 자랐어도 그 정체성에 무한한 의문과 상처가 남았을거라는 생각이 그때 20년 전에도 들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귀향에 실은 숙제 하나가 더 얹어졌다. 이젠 입양인을 안됐다, 불쌍하다 그런 측면으로 봐서는 안될 다른 시각과 대처가 있어야만 한국이라는 뿌리를 가진 멋진 스웨덴인들로 자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