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묵직한지 들어본다. 손바닥으로 표면을 탁 탁 쳐 본다. 왼쪽 손바닥에 올려 놓고서는 귀에 대고 오른손 중지를 접어 똑, 똑, 똑 노크도 해 본다. 아무래도 소리가 둔탁하다. 내려놓고 다른것을 불끈 들어 올린다. 꼭지며,빛깔,줄무늬의 선명도를 보고 들었다 놓았다를 한참동안 반복하지만 '바로 이놈' 이다 싶은게 없다. 이 수박에서 저 수박으로 대답없는 두드림과 일방적인 나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 밭에 오래 있었음직한 엉덩이가 노란 빛을 띤 놈으로 골라잡아 수레에 담는다.
“수박이 뭐라고 그러던가요?” 내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던 장보러 나온 중년의 미국인이내게 묻는다. 아마도 오랫동안 수박을 가지고 뭔가 귀에 대었다 놓았다를 한참이나 반복하는 진지한 모습에 뭔가 수박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네, 이 수박이 자긴 아직 십대라고 하네요’” 뜻밖의 대답에 잠시 주춤하더니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한다. ‘수박과 나누는 이야기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며 고향이나 이름을 묻느냐길래 ‘수박의 나이를 물어볼 뿐’ 이라 했더니 한 술 더 떠서 수박을 사러 나온 것은 아닌데 왠지 내가 골라주면 기쁘겠다며 ‘30대 중반쯤 나이’ 쯤으로 하나 잘 골라 달라고 주문까지 한다.
▲ 제철 수박의 진한 검은 초록빛을 연상 시키는 크로키. 제목: green figure. 종이에 물감. 2006
장보는 품목 중에서 제일 어려운게 수박 고르기 이다. 어쩌다 제대로 익은것이 걸리는 날엔 전문 도박사(賭博師) 라도 된 느낌이다. 아직도 성공하는 확률이 많지 않다보니 여간 신중해 지지 않는다.
미국 슈퍼마켓의 과일코너를 가면 비닐하우스 재배는 물론이고 적도 지방의 중미나 남미에서 올라오는 과일로 해서 일년 열 두달 철 구별 없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독 수박만큼은 정말 제철이 아니면 사게 되질 않는다. 그것도 날씨가 더워져야 수박에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을 보면 내 눈이 제철을 고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박을 고르는 일 못지않게 들고 오는 것도 큰 일이다. 큰 슈퍼마켓 대부분이 집과 거리가 멀어서 들고 다니는 부피나 무게 그리고, 고르는 부담을 덜기 위해 대체적으로 4분의 1로 등분된 수박을 산다. 그러나 조각 수박을 사는 일은 김도 샐 뿐 아니라 수박을 지르면서 만끽할 수 있는 환호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어 즐겁지 않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들고 나르는 게 고생스러워도 수박의 참 맛을 느끼기 위해 통 수박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능한 샘플이 마련된 수박을 사면 엉터리 수박을 살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날이 더워지면서 수박 철이구나 싶어 샘플을 맛보고 직원이 아주 좋다며 선뜻 골라준 큼지막한 수박을 배낭에 낑낑 매고 들고 왔다. 지하철과 버스까지 갈아타다 보니 꼬박 40분을 배낭에 메고 다녔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집에 돌아와서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무게를 달아보니 18파운드가 나갔다. 휴우~.
▲ 수박 밭에 오래 있었음을 말해주는 노란 빛깔을 고르면 반은 성공
배가 부르면 수박 한 쪽 먹기가 버거운 터라 그날은 작정하고 저녁을 수박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쩍~’ 하고 갈라지는 환상적인 소리를 기대한 내 눈에 보인 수박은 분홍빛이 들까말까한 생것으로 여물지조차 않았다. 상했으면 교환이라도 했겠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렇게 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이후로, 수박 고르는 일은 점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기로 했다.그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어느정도 성공하는 편이다. 언제였던가? 한국에서 여름이 끝나갈 무렵 광주의 무등산에서 자란 수박을 선물 받았다. 타원형의 시원한 생김부터, 수박이 칼을 먹으며 쩍 갈라지던 소리, 아삭거리는 식감, 미각을 자극하는 색깔, 검게 드문드문 박힌 씨, 선명한 초록과 검은색의 줄무늬 ..... 세상에! 그렇게나 맛있는 수박이 다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똑같은 수박인데 나는 반달로 썰어서 먹어야 제맛이라고 느끼고 남편은 한 입에 쏙쏙 들어가도록 화채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수박이 잘 익긴 했는데 씨가 허여멀건 빛이어서 아쉽다. 까만 씨가 박혔더라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었을것을!
다른 과일에 비해 수고와 노력이 갑절이 드는 통수박은 흰 속 부분을 나물로, 장아찌로,쥬스 등으로 해먹곤 했는데 한국인 아내의 모습이 알뜰함을 넘어 곤궁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느 해인가 남편이 사온 그리 잘 익지 않은 수박이었음에도 남김없이 알뜰히 활용하는것을 보고 그 이유가 맛 보다는 그 노고와 수고로움을 높이 사기 때문이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이후론 하얀 속을 갈아서 만든 쥬스도 마다하지 않고 마신다.
올 여름은 무더위가 예년과 달리 일찍 시작하더니만 그 치솟는 온도도 대단하다. 나처럼 매일 지하철을 타는 사람은 지하철 역이 불구덩이 같아서 정말 괴롭다. 냉방이 잘 된 열차에 들어가서 운이 좋게도 빈 자리에 앉았다가 누군가 내린 뒤의 체온으로 후덥지근하게 덥혀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만나면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면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없는 사람들은 보통 겨울보다 여름이 더 낫다고 한다. 그러나 교도소 생활은 그렇지 않다. 열 가지 혹은 스무 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여름이라고 해도 한 가지 단점이 이 모든 것을 무색케 한다. 바로 증오를 이끄는 열이다. 작은 감방에서 모든 사람들은 칼잠으로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칼잠을 자는 그곳에서 동료들은 뜨거운 여름 앞에 37도의 열 덩어리일 뿐이다. 겨울철 원시적 우정과 극도의 연합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열로 인한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뿐인가? 내가 누군가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아픔 그 자체다. 이처럼 여름철 열로 인한 상대의 단절 그것이 감옥 생활이요,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난일 것이다.’
정말이지 여름의 무더위 라는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에 대한 까닭 없는 미움이 커질 수 있는 위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머지 않아 중복이다. 어려서 날이 덥다고 투정을 부리면 ‘ 여름이 덥지 않으면 곡식이나 과일이 제대로 익지 않는 법이라며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수박도 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익어야 맛이 나는 법’ 이라는 말에 언제부턴가 이 쯤의 더위는 감내해야 하고 나아가 감사해야 한다고 들었다. 제철 수박을 먹으면서 더위란 이기는 것이라기 보다 친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슬기롭게 여름을 나는 것이란 생각에 변함이 없다.
문득, 어렸을적 풍경들이 떠오른다. 마당에 우물이 있어 여름이면 수박을 시원하게 채워두었다가 먹었는데 이따금 건져 올리다가 그물망에서 미끄러진 수박이 우물로 빠지면서 박살났던 일이며, 밤마다 평상에 모여 앉아 할머니의 헤진 큼지막한 부채가 모기를 쫒는 탁 탁 소리를 배경으로 가족들이 수박을 나누던 풍경은 참 정겨웠다. 아, 한여름 밤의 추억들이여!
복날 많은 이들이 보양식을 찾지만 우리에겐 잘 익은 수박 하나면 족하다. 맛있는 수박 하나를 얻기 위해 수박과 나누는 수상하고도 은밀한(!) 나의 대화는 올 여름 내내 찬바람이 불 때까지 계속 될 것 같다. 수박 한 통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게 바로 이 여름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