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날 때 마다 이름만을 근거로 해서 사람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찾는 이들은 어떤 일에 연루(連累)된 피해자들로 연락처를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설사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았다손 치더라도 통화로 연결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행여 이름 철자가 틀리기라도 할라치면 그간 발품을 팔아온 모든 것이 허사(虛事)로 돌아가 버려 순간 지치게 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사람을 만나서 ‘리포트 작성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일이었는데 상대방이 ‘이미 오래전 일인데 이제와서 해봤자 아닌가’ 라고 회의(懷疑)를 보이거나 ‘그런 못된 사람은 피해가는것이 상책일뿐 굳이 맞서지 말라’거나 ‘우리가 리포트 한다고 달라지겠는가’라는 맥 빠지는 말을 할 때면 기운이 빠지면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한 사람에 대해 ‘리포트 작성’을 시작한지 얼추 한 달이 넘어가고 있는 싯점인 지난 주에 맨해튼 2에브뉴에 살고 있다는 오래전의 자원봉사자 한 명을 면담하기 위해 유엔 근처의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때마침 유엔본부 앞은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인 만큼 각 나라별 시위대의 물결로 주변을 잔뜩 긴장(緊張)시키게 만들었다.
피킷을 든 참가자나 시위대들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었으며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심지어는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침묵시위를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데모를 하는 이들의 숫자에 비례해서 경찰들도 배치되었으며 주변의 모든 도로는 바리케이트가 쳐진 상태로 삼엄한 경계 태세를 보였다. 거주하는 주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차량은 엄격하게 출입과 왕래를 통제시키고 있어서 공교롭게도 약속된 장소에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대신 결렬된 약속 대신 근처에서 행해지는 시위대 면면을 둘러보는 기회가 생겼다.
그 많은 시위대 중에서 유독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1인 혹은 소수의 여성 시위대였다. 구호도 없었고, 확성기도 없없으며 두 팔을 높이 치켜 올려 양손에 든 피킷이 전부였지만 그들은 자국의 뭉개진 인권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등을 갈구(渴求)하는 소리없는 외침으로 바깥세상을 향한 절절한 몸짓들을 보이고 있었다. 참, 아직도 이 세상에는 정치적으로 어둡고 그늘진 나라가 숱하게 많이 있으며 폭압정치에 신음하는 국민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열악한 인권상황에 같이 분노하게 되고 자유 민주주의와 평등으로 가는 길이 참으로 요원(遼遠)해 보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지난 달 R이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찾아왔다. 비영리재단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자원봉사자로 만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지만 각기 맡은 일의 성격이 다르고 마주치는 일이 없다보니 개인적으로는 가깝지 않은 사이여서 웬일인가 싶었다. ‘오랫동안 본의아니게 오해를 했던 것 미안했었다’ 는 말로 말문을 연 그이는 그간의 경위(經緯)를 봇물 터진 댐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듣고본 즉, 자원봉사를 통해 좋은 사람들도 알게 되고 작으나마 사회에 환원(還元)이 되는 일을 하는 것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한사람으로부터 지속적인 모함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며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라고 토로하고 있었다.
내일 당장이라도 그만 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문제가 많은 또 하나의 한국인’이라는 불명예(不名譽)로 남게 될 게 뻔하다며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적어도 그만두기 전에 수퍼바이저에게 리포트를 해야겠다며 도움을 받기 위해 이렇게 왔노라며 ‘당신도 피해자’ 였던 만큼 그 입장을 적극 이해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울러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일기장 이었다. 화가 나고 억울한데 누구한테 하소연 할 데도 없고 해서 답답한 심정을 그때그때 끄적끄적 적어놓은 것이라며 언제, 어디서, 어떤식으로 교묘한 말로 J라는 사람이 괴롭혀댔는지 적어 놓았다며 리포트를 작성 할 때 이것을 증거 자료로 활용할 수 없는지 물었다.
그이가 돌아간 뒤 노트를 펼쳐 자세히 읽어 보았다. 연, 월, 일 아래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글씨체는 무척이나 휘갈겨 쓴 속상하고 억울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까지 이런 일이 몇번째인지 모른다. 반 년 전부터 말도 안되는 거짓으로 날 모함해서 나쁜 사람으로 몰아 곤경에 빠뜨리더니만 이젠 나를 쫒아내려고 아예 작정을 한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지만 어이가 없고 너무 기가 막힌다.’
‘여행을 간다면서 갔다올 때까지 이것저것 잔뜩 해놓으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같은 자원봉사자 임에도 나를 하인이나 노예 부리듯 한다. 자원봉사를 오래하면 사람이 겸손해진다던데 오히려 반대로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하루가 다르게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면전 앞에서 무시를 한다. 숱하게 인사 할 때 마다 단 한번도 들은척을 안한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온다. 미국인들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한국인들 앞에서는 교만하고 군림하려고만 든다. 한국인들이 봉인가? 볼모인가 모르겠다.’
‘당분간 J의 얼굴을 안봐도 된다. 얼마만에 누려보는 평화로움인지 모른다. 차라리 몸이 고된 것이 낫지 정신적으로 그리고 말로 고문(拷問) 당하는 것 정말 참기가 어렵다. 자원봉사를 하러 오는 이들 모두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오는 것 아닌가!’
‘나를 따돌리고 있다. 연락도 안해줘서 중요한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불참석을 문제삼아 자격이 없다, 불성실 하다는 등 뒷말을 하고 다닌다. 나를 내보내지 못해서 온갖 술수를 쓰고 있는데 심각한 것은 이런 일이 즉흥적인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을 모함했으며 J로 인해 많은 이들이 나처럼 이렇게 당하다가 나갔을까?’
‘오늘은 참다참다 못해 누명을 썼다고 오피스에 찾아가 보고 했다. 마치 눈에 보이는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 안보이는 곳만을 꼬집고 할퀴고 상처를 내듯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것과 진배없다. 직원들은 그 내막을 모르니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내 영어가 부족해서 인지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안하고 J는 어떤 한국인보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온 훌륭한 자원봉사자라고만 추켜 세운다. 한국인들끼리 문제가 그간 많았는데 J가 그런 사람들을 솎아내고 걸러내 주었다고 믿고 있으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니 더더욱 기고만장 해서 모든 한국인을 무시하고 겁박하는 것이 아닌가!’
‘얼마전 한국을 갔다오는길에 인삼차를 사가지고 와서 여러명에게 돌렸는데 누구한테 잘보이려고 그런 아부를 했느냐며 J가 자신은 그렇게 오래 일했어도 한번도 그런 아부를 해본적이 없다며 끝도 없이 괴롭히는데 고문이 따로 없다. 그런데 J가 상부에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는 본 사람이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거짓말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
‘결국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윗선에서 알게 되어서 여러명이 면담에 들어갔다. 모두가 잘 해결하려고 모였건만 그 자리에서도 J는 나와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내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는 자원봉사자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는 군림하는 독재자이다.’
거의 끝 페이지엔 ‘이젠 멀리서 그림자만 보여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소름이 쫘악 끼친다. 마치 내 목을 졸라오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은가?’
재단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 모두가 아는 J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교양있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같이 일해본 사람들 특히 그게 한국인인 경우에는 누구도 예외 없이 ‘무섭다, 끔찍하다, 꿈에 볼까 무섭다, 상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특히나,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누명을 씌우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한국인들 모두에게 면전에서 모욕감을 주고, 무시하고, 괴롭히고,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이중적인 속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증거수집은 쉽지 않았다. 결정적일 수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서 그렇고 10년이 넘도록 어떤 공식적인 서류나 리포트 한 근거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1대1 이런식으로 개인적으로 불러내어 소리소문없이 쫒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나갔으며 재단 사람들에겐 한국인들 하나같이 단 한사람 J를 제외하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한국인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이 일에 뛰어들게 했다. .
노트를 덮으며 ‘그래,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이제까지 희생한 사람들만으로도 족하다. 더는 무고한 어처구니 없는 한 사람의 농간(弄奸)에 다수의 한국인들이 농락당하고 상처 받아서는 안되겠다’ 라는 결심이 섰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닌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10년이 넘도록 모두가 그렇게 피하다 보니 해를 거듭하면서 피해자만 늘어난 것이다.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고 자원봉사자로서의 책무에 어긋나는 길임을 알려야 한다. ‘못된 한국인’ 이라는 불명예를 더는 뒤집어 써선 안되겠다 라는 사명감 마저 들었다.
지난 주 공익방송인 채널 13번에서는 7번에 걸쳐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한 사람을 조명(照明)하고 있었다. Mrs. 엘레노어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관한 것으로 장장 7회에 걸쳐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그이의 삶 즉, 대통령의 아내이자 미국의 여권을 신장시킨 혁신적인 운동가로 그이를 조망하고 있었다.
7회에 걸친 내용의 맨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되었다.
“하나의 어려움을 넘어서면 다음의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공포와 정면으로 대결할 때마다, 사람에게는 힘과 용기와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것을 넘어섰으니, 다음에는 어떤 것이 닥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하루만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그 곳을 향해서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바꿀 수 있습니다.”
www.en.wikipedia.org
엘레노어 프랭클린 루즈벨트 여사의 말을 새기면서 한뭉치나 되는 리포트를 완성 하였다. 내일 모레면 이 리포트를 용기있게 제출 할 수 있을 것 같다.
▲ 크로키 제목 A Human Figure Croquis 2014 종이에 물감. 설명/ 모델이 포즈를 취하면서 눈이 부신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빛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다면 그것은 순간일 뿐이고 잠깐일 뿐이다. 당장 눈부신 것은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빛은 가릴 수 없다. 빛이라는 속성은 가리고 덮으려 할수록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희망도 그런것이 아닐까....!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09:53:15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