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의 2층 여기가 틀림없이 맞는데……’
오랜만에 온 탓에 주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게다가 상업지구로 변해 있어서 그런지 다른 건물들과 혼동(混同)이 되기도 하고 위치마저 착각이 되었다. 별 수 없이 근방에 있는 건물들을 일일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두어시간을 헤매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사를 가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감고서도 찾아낼 정도로 익숙한 곳을 환한 대낮에 찾지 못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 되는가 싶었다.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 주십시요’ 라는 힘 빠지게 만드는 안내만 반복되고 있었다. 미리 전화라도 해보고 왔으면 이렇게 헛걸음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깜짝 방문’으로 놀래켜 드릴 생각만 하고 허겁지겁 서둘러 온 행동이 에둘러 후회가 되었다. 서울로 되돌아 갈 밖에.

그러고보니 선생님 뵌 적이 언제였더라? 짚어보니 1995년 3월 무렵이었다.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 왔습니다.’ 라고 인사 드렸을 때 선생님은 말씀이 없이 물감을 개는 일에만 열중하고 계셨다. 무안해진 내가 ‘바쁘신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일어서려니 ‘아니, 넌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이 나라 저 나라 싸돌아 댕길것이냐? 그만큼 방황하고 그렇게나 많이 댕겼으면 (작업을) 해야 할 것 아니여. 그만 가고 다음에 전시하거든 연락해라. 내 말 무신말인지 알아 듣겄냐?’
웬만해서 야단치거나 하다못해 쓴 소리나 싫은 소리 한번 하신 적 없는 분이 그 날은 달랐다. 평소 같으면 ‘왔냐?’ ‘밥은 먹었냐?’ 부터 챙기시던 분이었지만 웃지도 않으셨고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당시 나는 몽골과 티벳에서 얼추 반년 가까운 긴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된 때로 심신이 무척 고단하고 지쳐있었다. 여행중 생사의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긴 후라 그런지 고행의 아니 어쩌면 긴 수행의 여정(旅程)을 마친 그런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모든 에너지가 다 고갈(枯渴) 되어 있었고 몰골도 형편없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피곤하고 지친 상거지 꼴’과 다름 아니었다.
‘아직도 네 나이가 몇인데 허송세월을 하고 있냐. 그만하면 끝낼 때도 되지 않았냐’ 하는 표정도 숨김없이 읽혀졌다. 아울러 오랜 방황과 끝이 없는 방랑벽에서 떨치고 나오지 못하는 미욱한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의 눈빛도 역력했으며 음성에서는 노기(怒氣)까지 띄어 있어서 황망함 그 자체였다.

그 즈음 나는 삶의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고 누군가의 ‘말없는 위로’가 절대적으로 갈급하던 때 였었다. 지푸라기조차 잡을 힘이 없는 그런 상태였지만 그런 상황을 미루어 짐작 해 줄 가족도, 속 아픈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가까이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술친구들 뿐이었다.
당시 삶에 대한 회의가 깊던 위태로운 때여서 웬만하면 사람들을 피해 칩거(蟄居)하고 있었다. 누군가 잘못 건드리기라도 할라치면 그만 툭 터져 버릴것 같은……그런 와중에도 선생님 화실을 찾아 가고 싶었던 이유는 웬지 다녀오면 마음을 한결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근처에 있는 ‘따뜻한 국밥’ 한그릇을 운좋게 얻어 먹고 오면 추스릴 힘이 조금이나마 날 것 같았다. 형편없는 몰골로 찾아가는 것이 송구했지만 늘 넉넉하게 맞아 주셨던 기억으로 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들어서자 마자 ‘무언’의 무안속에 조용한 꾸지람 같은 것을 듣고보니 괜히 왔다는 자책과 더불어 ‘방랑벽 있는 문제아’ 같은 모습으로만 비쳐진 내 자신에 대한 자괴(自愧)감(感)이 컸다. ‘사서 고생하느라 고생 많았다’ 라거나 ‘죽지 않고 살아서 왔으니 되었다.’ 라고 우스갯 소리 하나만 던져 주셨어도 그리 돌아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네 일이며 현재 처한 본분부터 제대로 하거든 이 선생도 찾아오라’는 냉정하고도 단호한 느낌의 몇 마디가 나로 하여금 십 년 넘게 주눅들고 발길을 끊는 동기가 되었다.
물론, 삐지긴 했지만 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뿐 오래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소심함과 유치함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찾아 뵐 면목이 없었다. 말씀대로 ‘개인전’ 한다는 소식이나 들고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 또한 가서 환영받지 못할 찬밥이겠다 싶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하고 미루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 뉴욕 식물원에서 본 가지각색의 선인장을 보면서 선생님 댁의 발코니에 층층이 있던 선인장 화분이 떠올랐다. 가시투성이의 선인장도 한자리에 모아서 보니 참 매력있는 식물임을 알게 된다.
서울을 떠난 버스가 목적지에 닿기까지 여러 상념에 빠졌다. 10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 ‘ 뭐라고 첫 말문을 터야 할지, 선생님의 놀라운 표정은 어떠실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이제야 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간 뵈러 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꾸지람에 섭섭해서 부러 그랬던 못난이를 용서해 주십시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선생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 하실 것 같았다.
‘뭣땀시 니가 나한테 용서를 빈다냐? 갠쟌애.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자불지 않고 찾아와 준것으로 되야부렸다. 안 그러냐? 그나저나 너 밥은 묵고 왔냐..’
‘선생님,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했던 팜플렛입니다. 한번 보시겠어요?.’라고 건네 드리면 펼쳐 보시면서 ‘아따, 굼뜬 니가 참말로 개인전을 다 열었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니가 바로 딱 그 짝인 갑다.’ 하시면서 목젖이 보이도록 예의 그 너털웃음으로 맞아 주실 게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으로만 그쳤을 뿐 현실이 되지 못했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치 연극배우가 연기 연습을 열심히 했으나 막상 무대에는 오르지 못한 허탈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드리려고 가져간 한아름 들꽃 다발을 어찌해야 좋을지 버릴 수도 없고 난감했다. 평소 꽃을 즐겨 그리시던 분이라 받으면 참 좋아 하셨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길을 가다가 미술용품을 파는 화방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에게 미술 학원이 근처에 있는지 물어보니 동네가 예전의 멋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완전히 상업화 되면서 임대료가 서너배로 뛰어서 그나마 있던 학원들이 하나 둘 없어졌다고 했다.

꽃을 미술학원이나 화실에 전달해 주고 싶다고 했더니 “손님 중에 꽃을 즐겨 그리시던 화백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있으시면 모를까 이젠 그분도 가시고 없고…..” 귀가 번쩍 트였다.
“혹시 최화백 님 아니신가요?’’ ”예. 그분 맞아요“ ”잘되었네요. 화실 어디로 이사갔는지 아세요?“
“소식 모르세요? 그 양반 우리 사고뭉치 아들래미 속차리게 잡아주신 고마운 분인데 작년에 갑자기 돌아 가셨어라. 댁 번호가 있으니 여기로 연락 해보시겠어요?’’
잘못 들었나 했지만 아니었다. 50 후반으로 자신에게 늘 엄격하셨던 선생님은 평소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으신 규칙적으로 생활을 해 오신 분이었는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쫘악 빠지면서 하늘이 노래지면서 아득해졌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 다름없는 부음(訃音)이었다.
사모님이 전화를 받았다.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선생님이 그렇게 기다리셨는데……이제나 저제나 하고 많이 기다리셨는데……” 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 역시 아무 말도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날 공중전화 박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진즉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못나서 그랬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는 통곡을 하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듣지 못하셨다.

▲ 인생은 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내게도 몇가지 생활의 변화가 있었다. ‘미루지 않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그때그때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말하는 ‘때’ 라는 것 혹은, 싯점이라고도 하고 기회라고도 하는 것은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가족, 친지, 친구 역시도 마찬가지로 안부가 궁금할 때 미루지 말고 안부를 주고 받는 습관도 생겼다. 시간을 내고 성의를 내야만 훗날 덜 후회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배운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준비된 때’도 없고 ‘준비된 만남’도 사실 없다. 설령 내가 준비 되었다고 해도 때가 기다려주지 않을뿐더러 상대방 역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선생님의 꾸지람은 제자가 성공해서 유명한 작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최선을 다하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을 뿐이었는데 생전에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모님 말씀을 통해서 듣게 되는 나에 대한 기특함과 칭찬도 넘치셨고 단절된 10년 동안 늘 어디서 어떻게 사나 걱정과 염려가 있으셨다는 말씀을 전해들으니 몸둘 바를 몰랐다.

▲ 가는 봄 비가 내리던 맨해튼의 한 풍경을 스케치 했다. 20년 전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던 순간 내 눈에서는 그칠줄 모르는 장대비가 봇물처럼 오래도록 내렸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사모님을 꼭 찾아뵙고 오기를 얼추 10년. 갈 때 마다 선생님의 무게와 자리를 다시금 느끼면서 스스로 부족함에 대한 성찰(省察)의 시간이자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시간이 되곤 했다. 어느 날 유고(有故) 10주기가 넘어서 유작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제자의 글 하나를 그것도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럴 자격이 턱없이 모자랐지만 ‘선생님께 부치지 못한 편지’ 라는 제목의 어줍쟎은 글을 싣게 되었다.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님이 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재담가로 소문한 유머감각이 특출하신 선생님은 남도사투리를 구성지게 구사하셨는데 그 덕분에 장소나 상황을 불문하고 좌중을 요절복통(腰折腹痛) 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계셨다. 10주기 유작전 팜플렛을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님이 보신다면 아마도 큰 웃음과 더불어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을까?
“음마야, 이게 다 누구다냐? 니가 워쩐 일이냐? 참말로 재주가 메주다이”
매 해 봄이면 피어나는 꽃들이 유독 올 해 들어서 곱고 이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선생님의 화실에는 항상 시들지 않은 꽃이 있었고 댁에서는 소담스러운 화분들을 항상 가꾸시는 모습을 보면서 “꽃이 그렇게도 좋으세요?” 하니 “야들이 얼매나 이쁭가 몰라서 묻냐?” 하셨다. 그래서 그랬을까? 봄 날 꽃이 채 지기도 전에 서둘러 꽃과 함께 먼 길 떠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선생님께 왜 학교를 그만 두셨는지 여쭈었다. 선생이란 모름지기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사명감과 책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작가는 ‘쟁이’로서의 기질과 근성으로 작업에 미쳐야만 하는 것인데 동시에 양립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오랜 고민 끝에 사모님의 추임새에 힘을 얻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시며 ‘선생은 선생이어야 하고 작가는 쟁이여야만 한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자신에게 정직하며 엄격해야 되는 것’이 제일 힘들고도 중요한 전업작가의 길임에도 현실은 학교에 적을 두어야 하고 선생이니 교수니 하는 직함에 목을 매야 하는 모순점을 질타(叱咤)하시기도 했다. 그림쟁이가 돈과 명예를 쫒으면 결국 ‘장사치’와 다름없어지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현실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 역시 식구들에게 마냥 미안한 부분이라며 심적 고충을 토로하시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선생님과의 단절되었던 10년동안 그리고 더는 만날 수 없는 10년 이렇게 스무해 동안 선생님의 존재가 어느때보다도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왜곡되지 않은 시선과,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한결같던 따뜻함, 인생을 길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평생을 두고 닮고 싶고 배워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지난 겨울 선생님 사시던 동네에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눈이 녹기 전에 가서 그려야 한다고 어김없이 화구들을 챙겨 눈밭으로 나가시곤 했다는 사모님 말씀이 떠올랐다. 한번은 설경 중에서도 유독 초가집을 즐겨 그리시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우리 마음의 고향’ 이라고 일갈(一喝)하셨다.
한국 정취(情趣)를 내는 것 중에 초가집만한 것이 없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초토화 되다시피 한데다가 이제는 아주 깊은 시골이나 가야 만날 수 있을뿐더러 앞으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있다며 나 마저도 운치있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지 않으면 언젠가는 완전히 잊혀지고 마는 존재가 될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시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이제 내게 ‘초가집’으로 남으신 것 같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지만 추억 속에만 있는 그런 ‘마음의 고향’처럼 언제나 푸근하고 정감있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스승의 날’이 퇴색해져 가고 ‘참 스승’이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요즈음 말없는 인생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주신 스승님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그립다.

▲ 크로키 제목. A Bull's Croquis. 2013. 엽서에 흙 물. / 황소의 동작을 보면서 길들여지지 않은 아니,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던 내 지난날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참 힘들어 하셨을 게 틀림없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09:53:15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