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일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어린 친구로부터 “오늘부터 이곳 재단에서 좋은 전시회가 열립니다. 전통 누비옷에 관한 것으로 퀼트에 관심이 많으시니 이 전시도 꼭 와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짤막한 이메일을 받았다.
‘누비’ 라는 단어를 들은 지가 얼마이던가? 단어조차 기억에 아득하고 이제는 생경(生硬)해지는 마당이라서 이메일을 받자마자 곧바로 전시장을 찾았다.
▲ 코리아 소사이어티 전시장 입구. 무형문화재 107 호 누비장 김해자 님의 포스터 이미지가 보인다.
▲ 오방색을 기준으로 해서 만든 색동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조상의 지혜로움이 담뿍 담겨있다. 단순한 저고리라기보다는 예복으로 보인다.
▲ 색동저고리 소매 부분. 천연염색의 아름다움이 잔잔하게 전해온다.한땀 한땀 정성스레 누빈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래전 경남에 있는 작은 절에 들렸던 적이 있다. 이후로도 불자도 아니고,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도 아님에도 그곳을 연거푸 내리 찾아간 데에는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어두운 내 욕심 때문이었다.
▲ 갓난아기와 10세 미만의 아동들의 옷이 여아, 남아 구별해서 잘 배열되어 있다. 맨 앞쪽의 치마 같기도 하고 바지 같기도 한것은 단속곳이라 불리는 속옷에 해당된다.
절에는 노스님 한분이 계셨는데 뵐 때 마다 헤진 두루마기 누비를 늘 입고 계셨다. 먹물로 염색된 것으로 보이는 그 겉옷은 헐어질 때 마다 덧 대고 덧 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누비라기보다는 누더기라고 해야 될 정도였지만 두루마기 구석구석엔 여름날의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짙은 먹구름 같은 먹물이 앉았는가 하면 한 쪽은 막막한 파리의 음울한 잿빛 하늘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글게 누벼진 그 옷엔 실밥도 튀어나와 있었고 닳아 엷어진 부분을 말도 안되는 검은 벨벳 천을 덧대어져 있었으며 툭툭한 바느질 솜씨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하기까지 했던 그 부조화(不調和)가 어느 잠자리 날개 옷보다 무게감 있고 중후(重厚)해 보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세월의 더께가 골고루 얹혀진 그 옷엔 옷 이상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내공이 운치(韻致)있게 드러나 있었다.
▲ 여러가지의 천연 염색된 조각천들의 어우러짐 속에 한 땀 한 땀으로 뜬 누비의 맛이 오목볼록 살아있다.
▲ 돌잡이가 잡을 수 있도록 만든 돌 상 차림이다. 장수 상징하는 실타래, 학업을 뜻하는 붓, 부를 상징하는 엽전, 무예를 뜻하는 활 등이 놓여있다. 이색적으로 줄 자도 놓여있어 눈길을 끈다. 줄 자는 무엇을 비는 의미로 놓였을까?
“스님 제가 새 옷을 마련해드릴테니 저 오래된 두루마기를 그만 입으시고 저 주십시요” 라고 청을 연거푸 드렸었다. 속 모르는 이가 봤으면 불심 깊은 불자가 성불에 여념이 없으신 스님을 위하여 옷보시라고 하겠다는 양으로 그리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다. 스님은 그때마다 까닭없이 보살에게 새 옷을 받을 이유도 없거니와 긴 세월 내리입어 한 몸처럼 느껴지는 옷을 벗을 생각이 없으시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옷이 너무 멋있어서 갖고 싶어서 그럽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솔직히 이실직고(以實直告) 하면 상 받듯이 ‘옛다’ 라며 던져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스님은 “젊은 보살이 뭐할라꼬 다 늙은 중이 입던 헌 옷을 달라 카노? 일 없다” 하셨다. 그렇게까지 면박을 당하고 나니 더 조를 여지도 없고 염치도 없어서 결국 포기해야 했다.
▲ 궁궐의 아기씨들이 입는 금박입힌 당의들도 보인다.
▲ 단순한 모양의 배냇 저고리 들. 전통 누비옷의 백미는 간결함, 단순함, 단아함이 아닐까? 겨드랑이에서 소매에 이르는 배래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선의 흐름을 볼 수 있다.
▲ 3mm 간격으로 누벼진 잔(세)누비 아동 버선.
그 뒤로도 누비 두루마기에 대한 미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시집만 가면 “어디, 누비 두루마기 뿐이겠냐” 며 결혼을 독려하셨지만 혼인과는 별개로 그 뭉툭한 두루마기를 어떻게 하면 입을 수 있을까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승복만을 전문으로 만든다는 인사동의 옷집까지 물어물어 찾아갔고 누비옷을 맞췄다. 대신, 내 상황을 고려해서 회색을 피해 짙은 겨자색으로 만들었다.
▲ 미국의 퀼트와 비교해서 한국의 누비 전시를 관심있게 보러 왔다는 피터슨 씨가 여아의 누비 당의를 관람하고 있다.
▲ 코리아 소사이어티 전시장이 포스터와 이웃해서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난리법석을 떨어 장만했던 거금의 두루마기는 거의 입게 되지 않았다. 무겁기는 왜 그리 무겁고, 투박하며, 바느질 고름은 얼마나 엉망으로 달았던지 고름을 매는 것이 내키지 않으니 저절로 입어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 조선시대 덕혜옹주(고종의 막내딸)가 입었던 당시의 의복을 재현해 놓았다. 연한 쑥 빛이 흐르는 누비 당의에 붉은 누비 치마를 입은 어린 옹주가 금방이라도 사뿐 걸어 나올것 같은 느낌을 준다.
▲ 두루 주머니까지 고루 갖춘 사내아이의 누비 일습이다. 홍화씨로 물들인 너른바지의 붉은 색이 멋스러울 뿐 아니라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큐레이터의 섬세한 기획 의도가 돋보인다. 사내아이가 금방 벽에서 튀어나올것 같은 느낌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대신, 누비로 된 이불은 어려서 오래도록 덮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남의 집엔 곱고 풍성한 밍크 이불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음에도 우리집엔 명주로 만든 2대는 걸쳐 씀직한 헌 누비 이불들이 많았다.
얼마나 오래 덮었는지 닳아서 날실과 씨실이 닳아서 서로 엮이지 않고 성근것이 참 빗 같기도 하고 살을 발라낸 생선 가시마냥 앙상한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사이사이 오래 쓴 목화솜이 그렇듯이 무던히 단단해진 속살을 내비치곤 했다. 비록 낡은 누비 이불이었지만 거기엔 6남매가 자란 이야기와 옛 추억이 있었던 것 같다.
<하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