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과 노숙인의 차이가 뭔지 알아?
사흘 굶고 담이라도 넘으면 도둑 되는거고
급식소라도 찾아가면 노숙인이야.
아마 급식소 없었으면 나도 배고파서 진즉에 뭐 훔치고,
누구를 찌르고 했을지도 모르지."
어느 기자가 무료급식소에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환갑이 넘은 노숙자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철학자도, 종교인도, 정치인도, 언론인도 그 누구도
한 끼니의 밥을 이렇듯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나흘 굶으면 담을 넘게 되고, 아무도 밥을 주지 않으면
무엇이든 훔치고, 이를 막아서면 누구든 찌를지도 모른다는
늙은 노숙자가 내린 밥에 대한 정의가 제 가슴을 찌른 것은
외국 이주민 무료급식소를 시작한 제 이유와 같기 때문입니다.
60년대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된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바뀌면서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했고 가리봉에서 살던 한국 노동자들도 따라서 떠났습니다.
그 떠난 자리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찾아온 중국동포들이 찾아들었습니다.
가난한 여공들이 살던 벌집에 연변과 하얼빈에서 온 동포들이 살게 되면서
가리봉은 연변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차이나타운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서울특별시 연변동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요.
헌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코리안 드림만 모여든 게 아니라
욕망과 싸움, 술주정과 분노, 절망과 실패가 이리저리 엉키면서
가리봉은 우범지대(虞犯地帶)가 됐고, 각종 이주민 범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경찰은 이주민 범죄에 전전긍긍(戰戰兢兢)했고, 언론은 우려하며 보도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들 특히, 중국동포들이 조국을 찾아 대거 입국하면서
범죄는 물론이고, 병들고, 굶주리고, 사망하는 문제까지 발생했지만
한국정부는 외국 국적자까지는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가리봉은 코리안 드림에 실패한 이주민들의 신음소리로 넘쳤습니다.
당시에 저는 성남에서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을 운영했는데
가리봉에 살던 동포들은 도움을 받으려면 성남까지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한국 지리에 어두운 그들은 어렵게 길을 묻고, 헤매고, 차를 갈아타고서
저를 찾아와 눈물로 도움을 청했는데 그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면서
눈물의 현장인 가리봉에 상담소와 쉼터를 만드는 문제를 고민하게 됐고
마침내 뉴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서울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가리봉은 예상보다 더 참혹(慘酷)한 이주민들의 전쟁터였습니다.
돈벌이는 커녕 산재를 당하고도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한 이주민,
임금을 체불(滯拂)당한 이주민, 일터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이주민,
돈 떨어지고 병까지 든 이주민, 굶주리고 절망한 이주민들까지….
당시에는 이주민을 위한 산재보험도, 의료보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불법체류자였기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막다른 상황에 내몰린 이주민들은 제게 찾아와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이주민의 주검을 수습(收拾)하랴, 임금을 받아주랴, 법 제정 운동을 하랴,
무료진료소를 운영하랴, 쉼터를 마련하랴,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랴….
"목사님! 쌀과 부식, 운영비도 다 떨어졌어요."
"목사님! 이제 그만 철수해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전국 각지의 이주민들이 피난처인 가리봉으로 모여드는 그만큼
쌀과 부식은 금방 바닥났고, 돈을 빌리고, 청약통장도 해약했습니다.
가리봉 전쟁터에 무모하게 뛰어든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날마다 밤을 새우면서 상담내용을 처리해야 했고, 낮에는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손을 벌리며 뛰어다녔습니다.
주어진 일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종종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이주민들을 굶길 수 없어서 가락동시장에 달려가서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시레기와 야채들을 주웠습니다.
상인들은 썩은 감자 몇 개만 생겨도 상자 째 버리곤 했는데
우리는 횡재(橫材)한 것처럼 상자의 썩은 감자를 골라내며 좋아했습니다.
가락시장 상인들은 시레기 줍는 저희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제지하기는커녕 팔다 남은 야채를 제공하는 후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운영비가 떨어지고, 여기저기서 돈을 달라는 독촉(督促)에 시달릴 때는
익명의 돈다발 봉투가 배달되는 등 가리봉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은 경찰서장이 저를 찾아와서 고맙다며 금일봉을 주었습니다.
금일봉을 준 이유는 가리봉 범죄율이 급속도로 떨어졌는데 그 원인을
알아보니 저희들이 운영하는 쉼터와 급식소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2004년도부터 지금까지 9년째 가리봉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세 끼를 365일 연중무휴로 무료급식을 제공합니다.
하루에 500명가량, 일요일에는 700~800명이 몰려와 식사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찾아왔지만 요즘에는 다문화가정 이웃들과
한국 노숙자들까지 찾아와서 식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찬(盛饌)은 아니지만 삼시세끼를 따듯한 밥과 찬을 마련해서 대접하는데
한국 노숙자들은 반찬투정을 하고, 중국동포를 무시하며 시비를 걸고,
심지어 쌀을 훔쳐가거나 술주정 등의 행동으로 소란을 피우기도 합니다.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사람들에게 왜, 밥을 주고 잠을 재워 주나요?"
한국 노숙자들만 행패부리겠습니까.
중국동포들도 종종 술주정을 하며 싸움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제 아들 성연(6학년)이가 이렇게 묻습니다.
나쁜 행동을 하면 벌을 주어야지 왜 밥을 주느냐는 겁니다.
어린이 눈에는 그들의 행동이 매우 부당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착한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나 밥은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행동은 밉지만 우리가 밥을 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굶어야 한다."
아들 성연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아, 알겠어요!" 대답을 하고는 놀러 나갔습니다.
가리봉 무료급식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찾아온 이웃들이
밉든지 곱든지 따지지 않고 생명(生命) 같은 밥을 계속 나눌 것입니다.
다문화 희망의 종을 울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