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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문화방송․경향신문 입사후 신문사 사회부장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편집인(상무)을 역임. 한국신문윤리위원, 언론중재위원,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및 언론위원회 위원장, 한국카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숙명여대 홍익대 대학원 등에서 강의했다. 2007년부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최근 저서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인 피동형저널리즘을 날카롭게 파헤친<피동형기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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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잘것 없었던 사람, 작은 형님

글쓴이 : 김지영 날짜 : 2014-08-12 (화) 04:33:16

 

세상 사람들은 작은 형님을 마음 놓고 비웃었다. 못생기고, 왜소(矮小)하고, 무식하고, 주책맞고···. 재산도 없고, 결혼도 못하고, 그래서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이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고...

 

나보다 6살 연상인 작은 형님은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보는 사람들마다 ‘못생겼다’고 했다. 공부나 운동, 글짓기, 미술 등 어디에도 재능을 보이는게 도통 없었다. 주목을 끄는게 있다면 주책스런 언행이나, 온갖 말썽이랄까. 어머니는 작은 형님을 부를 때는 언제나 ‘아이고, 규영아···’라며 ‘아이고’라는 탄식을 리드(도입부)로 사용했다.

 

부유하게 살았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경제난에 휘말렸다. 결국 내가 중학교 3학년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극심해졌다.

 

대학생이던 큰 형님은 가정교사로 다른 집에 입주했다. 작은 형님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학교를 접었다. 그 무렵부터 작은 형님은 자연스럽게 돈암동 산동네 건달들과 어울렸다. 작은 형님의 닉 네임은 ‘하마’였다. ‘하마’는 그 특유의 주책으로 동네 건달패와 동네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런가하면, 완력(腕力)이 썩 강하지는 않았지만 ‘의리’와 ‘깡’은 대단했다. 남을 해코지하려고 뒤에서 일을 꾸미는 법이 없었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보잘것 없는’ 작은 형님은, 이런 순박하고도 직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거칠게 살아가는 산동네 사람들로부터 나름대로 인정받는 바가 생겼다. 생전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때 작은 형님의 일터는 동네의 가내 스프링 공장이었다. 철사를 기계로 감아 스프링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위험한 노동이었다. 실제로 작은 형님은 몇차례 다치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좁아터진 작업장 안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일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을 몽땅 가족의 생활비로 내놓았다. 그의 10대 후반~20대 초반때였다.

 

아, 참! 잊은게 있는데, 작은 형님의 특장은 노래였다. 잘했다기보다 매우 좋아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와 남진을 존경했다.

 

고된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입에서는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 당시 그 산동네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프링 공장의 골목에 울려퍼지던 ‘하마’의 유행가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작은 형님이 진지하게 가수지망 계획을 상의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군대 제대후 작은 형님은 음료회사 생산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내가 군대에 다녀와 대학 4학년에 복학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었다.

 

큰 형님은 다니던 회사에서 독립해 공장을 하나 차렸지만 재정형편이 쉽지가 않았다. 그때 작은 형님이 등록금을 내놓았다.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에서 매달 갚기로 하고 회사에서 융자를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말에 나는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신문사에 입사한 이듬해, 1980년의 봄은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탐하고 나서는 바람에 한국사회에 큰 혼란이 일었다. 이른바 ‘서울의 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정치권은 물론 학교, 단체, 각 기업체에서도 연일 반군부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말단 사건기자였던 나는 당시 우연찮게도 작은 형님의 회사가 있는 영등포 지역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느날 작은 형님의 회사에서도 큰 집회가 열렸다. 작은 형님네 회사 집회는 취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까지는 매우 조용했던 대기업이어서 집회의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회사 정문을 들어서자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운집해있었다. 그런데 맨 앞줄에 작은 형님이 서있는게 아닌가. 이런 집회에서 선봉에 서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형님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나는 형님을 향해 뒤로 빠지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작은 형님은 오히려 나에게 어서 가라는 식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때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작은 형님의 눈망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몇 년뒤 작은 형님은 회사를 그만 두었다. 몸에 병이 생긴 것이다. 큰 형님과 나는 결혼을 해서 독립했지만 결혼을 하지 못한데다 병까지 생긴 작은 형님은 어머니와 계속 살았다. 작은 형님의 몸은 도저히 노동을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어느때, 작은 형님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놀 수는 없다”며 리어카를 한 대 사서는 경동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고 있다는 어머니 말씀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야채 리어카를 끌고가던 형님을 택시가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다. 이 사고로 작은 형님은 이빨 여러 개가 부서지는 등 많이 다쳤다. 그래도 작은 형님은 “괜찮다”는 말만 했다.

 

 

 

▲ 사진은 기사안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www.ko.wikipedia.org

 

 

작은 형님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거동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가 밤낮없이 바쁜 사회부 사건팀장 일을 할 때였다.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분당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은 형이 이발하러 간다면서 나간뒤 사흘째 안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흘째라니, 움직이지도 못하는 양반인데···” 내 눈에는 벌써 눈물이 맺혔다. 나는 이날 종일 분당과 잠실 사이에서 ‘사람을 찾습니다’ 벽보를 붙이며, 수소문하며, 병원 응급실 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보자’며 들른 병원, 천신만고 끝에 여기에서 작은 형님의 흔적을 찾았다. 길에 쓰러져 있는 작은 형님을 행인들이 옮겨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은평구의 한 수용시설로 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작은 형님을 모셔오는 택시안에서 나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토록 온마음으로 간절하게 감사기도를 드린건 처음이었다. 그날 형님을 찾지 못했더라면 가슴에 평생 못이 박혔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형님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많이도 울었다. 사람들이 가장 보잘것 없었다고 한 작은 형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그 삶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보다는, 감사한 마음에 더 울었다.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 온 몸으로 모은 얼마 되지 않은 재물(財物), 그러나 그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그 재물의 은혜(恩惠)를 받았던 송구함에 뼈가 저렸다.

 

‘저 가난한 과부가 현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성경의 말씀은 내 가슴속에서 현실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말씀이 형님을 통해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며 외롭게 살다가 간 작은 형님. 돌아가실 때에는 친구도 없었고 20년이 다 돼가는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작은 형님에게서 크게 받았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된 저는 이제 가지고 있는 작은 것, 글로써 작은 형님에게 바칩니다.

 

만약 이글을 보신 분들이 ‘김규영’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한번 불러주시고, '잘했습니다' 한마디만 해주신다면, 기적과 같은 큰 은총에 하늘나라의 작은 형님은 환하게 웃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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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2012년 12월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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