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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Time Surfing
1979년 문화방송․경향신문 입사후 신문사 사회부장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편집인(상무)을 역임. 한국신문윤리위원, 언론중재위원,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및 언론위원회 위원장, 한국카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숙명여대 홍익대 대학원 등에서 강의했다. 2007년부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최근 저서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인 피동형저널리즘을 날카롭게 파헤친<피동형기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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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잎 하나가 교황님 덕을 본 이야기

글쓴이 : 김지영 날짜 : 2014-10-24 (금) 00:06:40


 

필자는 사목정보 2012년 2월호에 ‘신부님 왜 반말하십니까’라는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반말·존대말의 성격구분이 뚜렷한 한국의 사목환경에서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였다. 교회쇄신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그 중 한 가지로서 비(非)서구 지역 민족의 개별 전통과 풍습도 존중하자고 했던 바티칸 공의회도 50년이나 됐으니 그 정신을 되돌아보자는 뜻이었다.



 

이 글이 알려진 뒤, 주위의 신자 중에는 “왜 그런 불필요한 글을 썼느냐”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자주 접하는 가톨릭언론인회 교우 중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언론인들의 그런 반응은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이들의 반응은 대개 “다 옳은 말이고 공감하는데, 그래도 제목을 조금 더 완화한다든지, 뭐...그렇게 조금 더 지혜롭게...”라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는 신부님들의 기분을 배려해야한다는, 즉 ‘프로토콜’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한다는 말이었다. “그런가···?” 내 나름으로는 무례(無禮)를 범하지 않고 정론을 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신자들은 몰라도 언론인 신자들마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들이 나처럼 같은 신자, 또는 같은 언론인이기는 해도 분명 나와 다른 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엔 몇 대에 걸친 교우 집안이 많았고, 가족 중 신부님과 수녀님을 두고 있는 이도 많았다. 순교자 집안 후손들도 있었다. 나와는 배경이 전혀 다른 ‘신앙 명문가’출신들이었다.

 

 

 

 

www.en.wikipedia.org


 

그들에 비하면 나는 어떤가. 조선시대를 거쳐 전통 유교적 삶의 방식을 완고하게 고수해온 집안의 후손이다. 대대로 예수님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공자의 주장에 따르면 불혹(不惑)이라는 40이 넘어서야 세례를 받았다. 20대 후반부터 특정 신문사의 기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세상에 대한 주관은 이미 불혹의 수준에 근접했을 때였다.



 

그들은 신앙생활 시간표를 준수하는 데에 매우 모범적이어서 정말 본받을만 했다. 신부님에게는 한없이 공손할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지극정성으로 모신다. 신부님의 말씀과 교회의 관행·정책은 절대적으로, 어떤 때에는 진리보다 더 존중했다.



 

반면 그들이 나처럼 신부님 앞이나 교회 회의에서 언필칭 ‘저널리즘’과 ‘사회교리’의 정신을 내세우면서 ‘인습의 쇄신’ ‘가난한 이들 위주로’ 등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경우는 잘 보질 못했다. 그들은 그런 조신한 언행을 ‘順命(순명)’이라고도 했는데, 다만 나는 그것이 뒤늦게 내가 교리공부를 하면서 배운 ‘순명’의 뜻과 과연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웠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한국의 웬만한 신부님에 대해서는 이력과 성품을 두루 꿰고 있었고 각 교구의 소식에도 훤했다. 특히 이런 순간, 나는 그들 앞에서 뭐랄까, 열등생과 비슷한 감정도 느끼곤 했다.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신부님들이나 교회내부 사정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로 살아오다 어느날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좌절감 끝에 ‘배신하지 않을’예수님을 만나 절박하게 매달렸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입교후 한동안 매우 뜨거웠다. 매일을 하루같이(성당을 못가면 매일미사책이나 신앙서적으로)주님의 말씀, 교회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다.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면 꼭 기도책과 신앙서적을 지참해 아침 저녁으로 정좌하고 마음에 새겼다. 정동의 경향신문사 옆에 있었던 ‘바오로 딸’ 서점은 틈만 나면 들르는 영혼의 쉼터였다.



 

일산에 살때는 1시간 정도 걸리는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버스와 지하철에서 묵주기도를 올렸다. 세례때 교우로부터 축하성물로 받았던 내 묵주반지는 돌아가는 것이 아니어서 기도를 할 때면 손가락에서 뺀 뒤 반지전체를 돌려야 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늦은 밤의 버스, 묵주반지를 돌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졸게 되고 반지를 손에서 놓쳐버리기 일쑤다. 이 바람에 버스 종점까지 간 다음, 버스기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버스바닥을 수색해 반지를 찾았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톨릭언론인회가 주관하는 언론인신앙학교에서 ‘사회교리’를 접하고는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새삼 ‘번쩍’하는 자각(自覺)이 들었다. 내가 언론인으로서 세상에 대해 말할 때의 준거(準據)가 거기에 있었다. 저널리즘의 정의(正義)와 사회교리의 정의는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몇 권의 사회교리 책을 사무실 책상에 두고 공부해가면서 동료기자들과 토론하거나, 기사와 사설·칼럼을 썼다. 주보와 잡지 등 이런저런 천주교 매체에서 원고청탁이 오면 어느때보다 정성껏 글을 썼다. 신문사 편집국에서도 가장 바쁘다는 사회부와 정치부의 데스크 일을 보면서도 가톨릭신문출판회나 가톨릭언론인회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www.en.wikipedia.org


 

정말 ‘목이 말랐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하루하루가 희망과 열정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뜨거웠던 기간이 지나고, 나는 서서히 내출혈을 겪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부님의 현실’과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건 아닌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러 신부님들과 교회가 나를 이끌면서 은혜를 베풀어주었지만, 또 다른 여러 신부님들과 어떤 교회의 일들은 뒤늦게 찾은 ‘나의 사랑, 나의 신앙’에 회의가 들게 하였다.


 

언론인으로서 머리가 굳어 뒤늦게 시작한 내 신앙의 역사성, 그래서 실핏줄에까지 녹아든 신앙이 아니라 머리로 사유하는 신앙이 된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처음부터 잘못 배우고 잘못 이해한 걸까. 나는 몇가지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갈등하면서 마음이 교회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반면에 주위의 오랜 교우 집안 출신들은 내가 힘들어하고, 삼키기 어려워 속으로 피를 흘리는 문제들에 대해 매우 부드럽게 잘 소화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듯 마음에 회의와 갈등을 일으키는 와중에 ‘신부님, 왜 반말하십니까’를 쓰게 됐는데 가까운 신앙형제 상당수의 반응이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말은 옳지만···”이라는 식이었다.


 

한참 뒤 ‘사목정보’로부터 다시 한번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이 들어왔다. 나는 조건을 내걸었다. ‘주교님, 왜 호의·호식하십니까’라는 제목을 받아주시면 쓰겠다고. 가톨릭언론인회 회원 여럿이 모인 자리였다. 그랬더니 사목정보 측인 최홍운 선배보다도 가톨릭언론인회 회원 몇몇이 먼저 가로막고 나섰다. “그 제목은 해도 너무 한 것 아니오?” “꼭 그렇게 제목을 달아야하나?” 이런 말들이었다. 최선배도 “자신없다”고 하였다. 이에따라 사목정보에 다시 글쓰는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굳이 까칠하게 ‘주교님, 왜 호의·호식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자 했던 것은 ‘신부님, 왜 반말하십니까’ 제목의 글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회의(懷疑)와 갈등(葛藤)을 했던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신부님···’이 사제의 권위주의와 영적 세속주의에 관한 것이라면 ‘주교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소극성에 관한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뒤 다시는 배신하지 않을 대상을 찾아 영육을 의탁했던 교회였는데, 교회 역시 날 배신한다는 기분이 들게 했던 문제들이었다.



 

교회가 권력자나 부자들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을(예수님 말씀과 달리) 알고 나서는 철석같았던 초짜 신자의 믿음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 했다. 우선 교회의 미사예식장이나 행사장의 광경부터 그러했다. 권력자나 부자들이 신자들의 좌석 맨 앞자리에 ‘VIP’인양 앉아있는 모습은 흔히 보는 장면이다. 물론 교회측의 배려다. 거기에다 그들은 으레 늦게 입장해 맨 먼저 퇴장하기 십상이다. 정작 교회의 VIP는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뿐인가하면, 권력자나 부자들조차도 권력, 또는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돈이 없어지면 교회가 예전처럼 VIP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같은 광경에 초짜 신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예수님은 희망도 낙도 없이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에게 천국에 갈 것이라 약속하며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품어주셨는데···이 시대에도 교회만큼은 이들을 우선 따뜻하게 대하며 천국으로 가는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해야 하는것 아닌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 같은데···”



 

또 주교님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이 일년간 만나는 이들 중 가난한 이 등 소외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해졌다. “혹시 권력자나 부자들을 더 자주 만나시는건 아닌가?”



 

둘째로는 수시로 우리 사회가 겪는 여러 참극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 큰 실망을 주었다.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으면 교회는 그들이 누구이든 우선 위로해야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용산 참사든, 세월호 사건이든 먼저 달려가 손을 잡고 위로하기보다는 늘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사회적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으레 해법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편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교회는 위로의 손길을 선 뜻 내밀어야할 사건들에 대해서도 주로 ‘정치적 중립’이라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교회의 태도는, “특정 사건을 둘러싸고 신자들 간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고 집권세력과 야당·시민사회의 방침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체제 유지’를 위해선 매우 신중하게 처신해야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일까?



 

하지만 예수님의 방침, 교회본연의 행동을 유보해가면서 지나치게 예민하게 ‘정치적 중립’을 걱정하는 태도야말로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런 생각과 함께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더 함께 하는 가난한 교회가 돼야한다’는 내용을 담아 ‘주교님 왜 호의·호식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주교님···’ 제목의 글을 쓰는 일이 불발하고 나서 나는 “내가 지나치게 완고한 성경적 원칙을 고집하고 있나? 오늘날은 ‘교회와 가난’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하나”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그런 가운에 몸과 마음은 다시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하 photo by NEWSIS

 


 

그러다 내 몸과 마음이 다시 활기를 띠며 교회로 다가가는 계기가 생겼다.바로 교황님의 출현이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부터 사제·신자들이 해야할 일에서 이 시대가 가야할 길에 이르기까지, 교황님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내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이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었던 바가 틀린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셨다. 나의 절망이 희망으로, 우울한 마음이 기쁜 마음으로, 비관이 낙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셨다. 도착첫날 주교님들을 만나 “교세가 신장했다고 승리의 월계관에 도취하지 말고 신앙을 더욱 채찍질하는 마음가짐을 가져달라”며 교회의 비대화·세속화에 일침을 놓으셨다. 가난한 교회가 돼야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이 가난을 창피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교회, 이같은 영적 웰빙을 피하라”고 경고 했다. 그리고는 가는 곳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말씀하시고 이들에게 우선 손을 내밀었다.

 

 

 

 


 

광화문 시복미사를 집전하러 오실 때에는 농성중이던 세월호 가족의 손을 잡고 그의 말을 경청(傾聽)하며 편지를 받아 고이 주머니에 보관하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이들을 만나 위로하는 당연한 일조차 꺼렸던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두고 교황님은 귀국 비행기에서 기자들에게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광화문 시복미사가 끝난뒤 가톨릭언론인회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나는 “예전에 쓰려다 불발에 그친 ‘주교님, 왜 호의·호식하십니까’ 제목의 글을 다시 쓰면 어떨까요?”하고 농반진반으로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이것도 기적이 아닐까? 예전엔 제지하던 분들이 “그거 좋겠는데요”하고 호응하는 것이었다. 다 교황님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같은 제목으로 글을 쓸 마음이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교황께서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우리 교회전체와 온 국민에게 ‘가난한 이’를 위주로 전한 메시지가 밀물처럼 큰 감동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가랑잎 하나가 교황님의 큰 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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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사목정보’ 2014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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