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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문화방송․경향신문 입사후 신문사 사회부장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편집인(상무)을 역임. 한국신문윤리위원, 언론중재위원,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및 언론위원회 위원장, 한국카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숙명여대 홍익대 대학원 등에서 강의했다. 2007년부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최근 저서로 한국 언론의 문제점인 피동형저널리즘을 날카롭게 파헤친<피동형기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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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달랜 자비의 저널리즘..이광훈 선배

글쓴이 : 김지영 날짜 : 2012-06-19 (화) 01:14:53

이광훈 선배에게 편집국장 인사 발령이 나자, 경향신문 사람들은 너나없이 놀랐다. 1986년 10월의 일이었다.

견습 기수(期數) 문화가 강한 신문사 편집국 풍토에서 비견습기수 출신이 편집국장으로 발탁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는 문학 평론가로, 출판인으로 활동하다 36세의 늦은 나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했다. 그리고는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일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놀라면서 걱정하는 말도 뱉었다. “정·경·사는 어떻게 하려고···?” “스트레이트 지면과 조직을 장악할 수 없을텐데···”

신문사 편집국에서 기수 문화 못지않은 특징이 있다면 바로 ‘스트레이트 중심’ 체제다. (물론 방송사 보도국도 비슷하다). 1면 등 주요 지면에 당일의 스트레이트 뉴스를 많이 출고하는 부서, 즉 정치·경제·사회부가 신문제작 체제의 중심이다. 요즘은 스트레이트 부서니, 간지 부서니 하는 개념이 많이 사라졌다. 문화와 스포츠 분야만 하더라도 크게 성장했다. 국민 일상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됐고 그만큼 주요 스트레이트 뉴스도 많다.

하지만 1986년 쯤에는 확실한 정·경·사 중심 체제였다. 당시 우리나라 종합일간지 하루치 지면수는 겨우 12면 정도. 문화부나 체육부 등 비(非)스트레이트 부서에는 급하게 전해야할 스트레이트 뉴스가 적었다. 할당받은 지면도 적었고 관련 뉴스는 1면등 바깥지면보다 주로 속 지면인 간지에 배치했다. 그러다보니 ‘간지 부서’라 통칭했다.

신문 제작공정이 스트레이트 부서 중심이다보니 인사도, 인맥도 스트레이트 부서 중심으로 궤적을 그리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입사경력이 짧은 비(非)기수, 거기에다 스트레이트 부서 경험이 전무한 ‘이광훈’이라니. 놀라움과 걱정이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사권자도 걱정이 되었던지, 스트레이트 부서출신의 ‘강골’들을 부국장 등 간부진에 임명해 편집국장을 보좌토록 했다. 그리고 이 선배 재임기간동안 지면과 조직은 그 전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나은 점도 많았다. 당연히, 거기에는 편집국장을 보필한 편집국 간부들의 노력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선배의 존재 자체가 지면과 조직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리더십이란 그런 것이구나”하고 내가 실증적으로 깨닫게 된 것도 그때였다. 이 선배는 기수 출신에 스트레이트 출신인 간부, 급하고 까다로운 스트레이트 부서 기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 선배의 유머와 기지,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문예적 서정성, 인문적 세계관 등 ‘인간 이광훈의 자질과 품성’이 간단하지 않은 조직을 관리하는데에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품는 리더십이었다. 그러한 리더십은 데드라인을 앞두고 치열하고도 각박하게 돌아가는 신문제작 공정의 날카로운 톱니바퀴에 부드러운 윤활유 역할을 했다.

‘인문적 세계관’이라고 말했지만, 이 선배는 인문적 사유의 소유자답게 칼끝과 같은 시비지심(是非之心)과 함께 따뜻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정의와 자비라고 할까, 꼿꼿한 뼈대에 인간적인 피가 흘렀다.

‘글은 쓰는 사람의 재현’이라고 하듯이 이 선배의 글은 이러한 이선배의 품성과 스타일을 그대로 빼 닮았다. 그는 정치권력의 횡포와 부박한 염량세태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사정없이 비수를 꽂고 질타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은 그 사람처럼 언제나 따뜻했다. 직설로만 치닫지 않고 완곡어법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당사자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비수로 찌르면서도 이런 저런 처지를 감안하고 배려했다. 문학적 비유와 서정성은 그의 글을 일관되게 유지한, 표현의 얼개였다. 그것이 이광훈의 저널리즘이었다.

이선배가 편집국장에 임명됐을 때 나는 7년차 기자였다. 사회부와 정치부에서만 일한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기자였다. 입사 이래 줄곧 일에 쫓겨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거나 아니면 술로 피곤을 달래는 것이 신문기자 생활의 전부였던 때다. 나는 새로운 편집국장이 매우 낯설었다. 비기수 출신에다 간지 출신. 무엇보다 한마디 대화, 한 잔의 술도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 같았다.

그의 글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그 구조와 속도, 리듬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글이나 말씀의 서두를 대할 때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러나···? 결론부터 말씀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답답했다.

나는 어느새 체질 자체가 ‘스트레이트화’ 했던 것이다. 스트레이트 체질은 스트레이트 기사문장과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우선 역삼각형 구조다. 매사에 사실을 중심으로 결론부터 말하고 나서 그 다음부터 중요한 순서에 따라 언급하는 것이다.

비록 한때 문학청년이었다 할지라도 바람과 구름과 별을 이야기할 틈이 어디 있는가. 결론부터 재촉하고, 급하고, 여유가 없고, 서정이 메말라있고, 경쟁심이 강하고···. 내가 신문기자가 되어 몇 년이 지났을 무렵,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야이야, 니가 사람이 변했데이···”

그렇듯 나는 각박해져 있었고 이선배같은 분과는 체질상 맞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이선배의 굵고도 우렁우렁한 음성과 말의 고저·장단·강약·쉼은 내 귀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어릴적 큰집 사랑채에서 흘러나오던 집안 어른들의 음성 그대로였다. 이선배의 음성을 들으면 불현듯 고향이 생각나고 아득한 옛날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도 “고향이 경북 영주나 안동 부근인가 보다”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선배와 비로소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부장급이 된 이후다. 그리고 나는 이선배가 안동 풍산에 세거한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며 내 종고조모 중 한 분이 이 선배 집안에서 우리 집안(영주 무섬마을)으로 오셨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이 선배는 나와 점차 가까워지면서 틈만 나면 밥을 샀다. 나는 12년 연상인 이선배가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격의없이 꺼내며 거의 평교(平交)를 하듯이 상대해주는 것이 송구하면서도 좋았다. (사실 이선배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했다). 그리고 만날때마다 내 육신에 원초적 인자처럼 입력돼있는 경북 북부지방만의 정서와 전통, 문화를 모처럼 혼자 만끽하곤 했다.

“나도 이 선배처럼 사람을 나이로 대하지 말고 인격으로 대해야지···”하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이 선배는 가끔씩 문학평론가인 김화영 교수나 중앙일보에 계시던 권영빈 선배같은 분들과 각각 점심자리를 마련하고선 나를 불러주시기도 했다. 나는 김화영 교수가 집안의 먼 족형이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일면식이 없었다. 권선배 역시 뵌 적이 없었다. 모두 나보다 윗세대이고 워낙 고명한 분들이어서 나로서는 쉽사리 동석해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처지였다. 하지만 이분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도 언제나 동등한 인격으로, 동등한 말상대로 나를 대해주시는 것이었다.

내가 신문사를 나온 뒤, 내 주위에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고 없을 때도 이 선배는 여전히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밥을 샀다. 나를 대하실 때, 어조와 안색에 예전과 달라진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이 선배와 체질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속단이었다. 아직 세상을 덜 산 젊은 ‘스트레이트 기자’가 측은지심보다는 시비지심에, 자비보다는 정의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이제 어언 60 고개마루에 올라선다. 이쯤에서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과 갈 길이 동시에 보인다.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그림으로 눈에 들어온다. 고개마루에서 서서 보아도 나에게 정의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지나온 오르막 길과 달리, 나에게도 어느새 자비가 정의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 이제, 이선배를 온전하게 이해할 만한 때가 되니 이선배는 가고 안계시다. 갈수록 이 선배의 측은지심, 그 자비가 그립고 그립다. 이제 어디에서 그같은 자비를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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