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린의 삶에서 마지막 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새로운 우주 비행 훈련에 대한 작업과 아카데미에서의 학업으로 보냈다. 소련 사람들과의 수많은 만남, 해외출장, 기자들과의 회담이 진행되었다. 우주비행사들의 수가 늘어났음에도 그 횟수는 줄지 않았다.
1963년 12월 20일 가가린은 우주비행사훈련센터의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비행하기를 원했다. 1963년 가가린은 미그 15UTI (이중 조정 ‘스파르카’-두 자리 연습기)’ 시스템이 장착된 교육-훈련용 전투기)의 비행 실습에 착수했다. 독자적 비행에 앞서 그에게는 비행사-교관이자 연대장인, 소련 영웅 블라디미르 세료긴과 함께 하는 마지막 두 번의 시험 비행이 남아있었다.
1968년 3월 27일 정밀한 의료 검사 후에 가가린과 그의 교관 블라디미르 세료긴은 기내의 좌석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10시 19분 이륙허가를 받고 무전기로 확인한 후 유리는 비행기를 이륙시켰다. 비행은 약 30분 정도 지속될 예정이었다. 약 12분 후 가가린은 갑자기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보고했고 기지로 되돌아오겠다고 허가를 요청했다.
그리고 1분 후 참사(慘死)가 벌어났다: 가가린과 세료긴이 탑승했던 비행기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항공기는 노보셀로보 마을로부터 3킬로미터 떨어진 블라디미르 주(州) 키르자츠스크 지역에 떨어졌다.
3일이 지난 후 세계는 영웅과 이별했다. 붉은 광장의 장례 행사 연설에서 소련과학아카데미 회장 M. V. 켈디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가린의 공적은 과학을 위한 위대한 업적이었고 그는 인류 역사에 새로운 시대, 우주로의 인간 비행의 시작, 행성간 소통을 위한 길을 열었다. 전 세계는 평화와 진보를 위한 소련 인민의 새로운 위대한 업적으로서 이런 역사적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81년 발렌티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을 추도(追悼)하며 <108분과 삶 전체>란 책을 집필하였다.
“1968년이 되었다. 그 해가 우리 가족에게 가장 끔찍한 해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 그녀는 회상했다. -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든 것이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어이없이 변해버리리라고... 3월 26일, 우리에게는 힘들었던 그 봄에 그는 병원에 있는 내게 찾아와서 집안일은 어떤지, 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날 16시에 그는 비행 전 훈련이 있었다. 그는 잠시라도 보려고 들렀던 거였다. 나는 그에게 ‘빨리 가요, 늦겠어요’라고, 그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발렌티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리 가가린이 죽은 후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다.
참사 조사를 위해서 국가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비행기 추락 장소에서, 그 후 세밀하게 수집된 모든 것들이 모스크바의 여러 전문기관에 제공되었고 대규모 작업이 수행되었다. 충분히 신빙성 있게 가가린과 세료긴의 비행기가 지상과 충돌한 시간과 여타 다른 변수(變數)들이 재구성되었다.
나무 꼭대기들의 절단면, 미그기 파편들의 분포 범위 축의 방향, 몇몇 지침 계기들의 눈금표시(눈금판들의 흔적)에 따라서, 전투기는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비행속도 시속 약 700킬로미터 속도로 50도 각도를 유지한 채 급강하 하여 지상에 추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면과의 충돌 순간의 감소 속도는 초속 145미터였다. 이는 평균 속도보다 두 배 더 빠른 속도였다. 승무원의 최후 행동들은 갑자기 발생하여 참혹한 파국(破局) 1분전에 이유 없이 심화된 비상 상황의 결과였다는 것을 모든 지표들이 보여주었다.
조사 위원회들 중 한 곳은 일관되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비행시간 내내, 지상과 충돌하기 바로 전까지, No. 18 기내에서는 계기부속품, 메커니즘, 시스템 등 예외 없이 모든 작업에서 어떤 고장이나 개별적 결함(缺陷)이 발생하지 않았다. 기계의 이런 완벽한 정상상태에 대한 ‘철두철미한’ 추정은 가가린의 참사에 대한 거의 모든 발표들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가정한다. 게다가 추락한 교육-훈련용 전투기의 잔해를 보면 일련의 계기 부속품들과 시스템의 작동 상태도, 눈금표시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지상과 비행기의 충돌 순간에 대한 것뿐이다. 1분 동안 무엇인가가 벌어졌고, 그 이상을 기체의 잔해로 재구성하기란 불가능했다. 교육-훈련용 전투기 기내에는 원시적인 자동기록장치도 없었다.
비극은 수많은 사건 해명 가설(假說)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결정적이지 못했다. 1968년에 국방성 제13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소좌 이고리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는 항공참사 조사 단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계산한 미그-15 훈련용 전투기 운행 궤도를 기반으로, 참사가 이미 지상에서 비행기가 밀폐되지 않은 결과로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가가린의 운전석 환기장치 코크가 끝까지 잠겨있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고도 4200미터에서 ‘8자 비행’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을 때에서야 조종사들은 이것을 감지(感知)하였다. 감지한 후 그들은 지침대로 비행을 중단하고 비행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긴급히 착륙해야 했기에 세료긴은 조종(操縱)을 자신이 담당했다. 그는 정상 쪽으로 비행기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쿠즈네초프의 의견에 따르면, 과부하와 저산소증의 초기작용이 조종사들을 무력화시켰다. 비행기는 초당 145미터의 속도로 밑으로 추락했다. (1975년부터 의료진들은 조종사들에게 초속 50미터 속도 이상으로 하강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기내에는 압력이 눈사태처럼 높아졌다.
- 그들은 훈령용 전투기 미그-15가 4100미터에서 2000미터까지 상승했던 그 14초 동안 비행기 조종 능력을 상실하였다. - 이것이 쿠즈네초프의 설명이다. - 그와 같은 경우들은 미국인들에게서도 발생했었다.
15초 후에 비행기는 지상으로 추락하였다.
3월 27일 비극의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들 중 한 명인 중장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벨로체르코프스키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훈련용 전투기 미그-15는 근처를 지나가던 비행기의 회오리 기류에 빠져들어 통제를 상실하였고 나선형으로 급강하하여 추락했다. 이런 가설을 유명한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도 지지하였다. 1992년 S. M. 벨로체르코프스키의 책 <가가린의 죽음, 사실과 추측>이 출간되었다.
5년이 지난 후 같은 저자는 이미 새로운 책에서 참사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새로운 논거들로 보충하고 있다. 아카데미 회원 S. P. 코롤레프의 오른 팔인 아카데미 회원 보리스 체르톡은 이것에 중요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복잡한 대규모의 체계 안에서 이런 저런 가능한 가설들이 부정되는 원인들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아직까지는 벨로체르코프스키와 레오노프에 의해 연구된 가설이 ‘가장 믿을 만한 것’으로6 여겨진다.”
냉전에서 우주적 풍요로...
그 참사의 상황은 이렇듯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에 어떤 일이 발생했든 간에 분명한 한 가지는 지구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유리 가가린의 비행 이후 반세기 동안 우주에는 약 500명이 다녀갔다.
전체 우주 강국 당 겨우 1년에 10명씩이지만, 수많은 전문적 우주비행사와 우주비행가들이 2-3번씩, 몇몇은 4-5번씩이나 그 이상의 비행을 수행하였다. 2011년 봄까지 러시아 (구소련), 미국, 중국의 우주비행장에서 약 280회의 유인우주선 발사가 실행되었다.
현재 먼 우주로의 유인 조종 연구 분야에서 가장 전망 있는 계발 분야들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관할(管轄) 하에 있다. 냉전은 종식되었고, 그것은 미국과 러시아 간의 협력 조정을 가능하게 했다.
중국은 우주로 사람을 보내는 강국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고, 알려진 바대로, 미래에는 달에 유인 비행을 실행할 계획이다. 일본과 인도는 달과 화성 연구에 대한 독자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유럽도 달과 다른 행성들로의 비행과 연관된 ‘오로라’ 계획을 발표하였다.
우주과학 분야에서의 한-러 협력도 의미를 가진다. 2004년 가을부터 2005년 봄 사이 한국 대통령은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러시아와 한국은 우주 분야의 협력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고 공동 연구 센터를 설립하였다. 러시아 기술의 원조로 한국은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이후 발사계획을 갖고 있다.
비록 나로호-1의 발사가 몇 번 실패했지만(2002년에 체결된 합의 사항에 따르면, 러시아 측은 한국 미사일을 위해서 액체 연료로 작동하는 첫 단계를 생산하고, 한국은 자국의 노력으로 두 번째 단계와 미사일용 유효부하(100킬로그램의 인공위성)를 생산한다), 2008년 4월 8일 바이쿠르로부터 ‘소유즈 TMA-12'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출발하였고 그 우주선에는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여성우주비행사 이소연이 타고 있었다.
이소연의 비행 덕분에 한국은 자국민이 지구 궤도에 다녀온, 세계에서 36번째 국가가 되었고, 우주로 여자 우주비행사를 보낸 7번째 나라가 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 우주 탐험의 결과들은 한국 내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다. KARI에서는 비록 한국이 주변국들인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늦게 우주 클럽에 가입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최근 그 국가들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KARI 에서 언급하는 대로, 이소연의 성공적 비행은 우주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연구소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는 하이테크놀로지 우주연구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던 한국의 위치를 격상(格上)시키는데 협조할 수 있다.
현재 러시아 우주과학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주 프로그램들에 재정 지원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그 결과 관련 업체들의 재정난이 심각하다. 그러나 러시아 우주 과학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런 복잡한 조건에서도 러시아 학자들은 21세기 우주 시스템들을 계획하고 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보통 러시아인’의 업적에 대해 또 다시 들을 수 있게 될지도. 가가린이, 초등생, 기술전문학교 학생, 조종사,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였던 자기 자신을 그렇게 부르길 좋아했듯이...
babo.ivan@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