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왕국(the kingdom of Corea)은 만주, 일본과 코리아해협(Strait of Corea)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비옥한 땅을 갖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9년전, 1856년 9월16일에 실린 뉴욕타임스 기사입니다. 대한해협(Korea Strait)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명칭이지만 일본은 '쓰시마 해협(對馬海峡)'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도 대마도를 경계로 북쪽의 바닷길만 '조선해협'이라고 쓸뿐이지요.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확인하듯 대한해협의 역사는 이처럼 깁니다. '한국해(Sea of Corea)'가 종적을 감춘 것은 서구인들에겐 의미가 모호한 '동해(East Sea)'를 혼용하는 사이에 일본이 식민시기 '일본해(Sea of Japan)'로 둔갑시킨 까닭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한반도 전체가 일본해 위에 얹혀 있는 형국이 되었고 독도 침탈의 구실도 내주고 만게 아니겠습니까.
Corea의 Korea 치환(置換) 시점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C가 K로 바뀐 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제국 대부분이 압도적으로 호칭하던 Corea를 왜 미국은 돌연 Korea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오랜 세월 한반도 지배의 야욕(野慾)을 갖고 있던 일본은 널리 알려진 Corea보다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한 Korea를 선호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19세기까지 유럽과 미국은 Corea를 '은둔의 왕국'이라 부르며 중국에 조공(租貢)을 바치는 사실상의 속국(屬國)으로 인식했습니다.
China와 영어 철자(綴字)가 유사한 Corea의 '친중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면 C보다는 K가 나았을테고 알파벳순으로도 Japan 뒤로 시종처럼 따라붙는 Korea가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Korea 확산에 가장 기여한 미국은 20세기 초엽까지 식민지를 열정적으로 개척한 제국주의의 일원에 불과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보듯 일본의 한반도 침탈(侵奪)을 철저히 묵인(黙認) 방조(幇助)한 미국이 일본의 입맛대로 Corea를 Korea로 바꾼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입니다.
1851년 창간된 뉴욕데일리타임스는 1857년부터 '데일리'를 빼고 현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해 12월22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코리아 왕국"을 소개하고 1858년 3월22일과 9월30일엔 프랑스가 조선의 왕과 맺은 조약, 조선 왕이 프랑스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뉴스들을 실었습니다. 1860년 1월23일과 6월2일자 기사에서 Corea로 호칭하던 뉴욕타임스는 1870년을 전후해 Korea를 혼용하기 시작합니다.
1871년 6월14일자엔 월터 그린넬(Walter Grinnell)의 흥미로운 여행담이 게재됐습니다. 국제교역 상인이자 자선가인 헨리 그린넬의 아들 월터는 1870년 겨울 만주 동쪽과 코리아(Korea)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야기를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들려주었지요. 기사에선 한국의 면적과 인구, 온돌문화까지 소개한 최초의 코리아 정보였습니다.
"월터 그린넬은 러시아 최남단 블라디보스톡 항에 도착해 관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한국인(Korean) 마을을 갈 수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근검절약을 하고 있었다. 집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고 2-3개의 방이 있었다. 땔감에 불을 붙여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들은 '온돌(heated platform)'에 매트를 깔고 그 위에서 먹고 자고 일을 한다. 코리아는 약 8만1천 에이커의 면적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독립된 왕국이지만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 8개 지방으로 나뉘었고 각각의 지방에 별개의 정부기관이 있다. 기후는 아름답고 삼과 아마를 재배하며 담배도 경작한다. 쌀은 북쪽 지방에서 발견되고 종이는 나무껍질로 만든다. 금속으로 된 연장을 쓰고 목수 등 기술자들은 대단히 영리하다. 국민들이 입는 옷은 흰색이며, 여성들은 머리를 틀어올려 금색과 은색의 방울이 달린 커다란 비녀를 꽂는다. 여자들은 열세살에 결혼하는데 아주 예쁘고 내성적이면서도 애교를 잘 부린다. 교육의 수준은 높고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다..."
◇ 美佛 등 조선침공과 청(淸) 황제의 비밀약속
열흘 뒤인 1871년 6월24일 뉴욕타임스는 '한국에 관한 사실들(Facts about Corea)'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합니다. 이번엔 Corea라는 옛 이름을 사용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이 Corea를 은둔의 왕국으로 놓아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Corea를 잘못 건드리면 중국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눈치보던 서구 열강들에게 중국의 통치자가 한반도를 바람앞의 등불로 만드는 충격적인 비밀약조를 한 사실이 뉴욕타임스에 의해 공개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청나라)의 통치자는 공친왕(恭親王)이었습니다. 도광제의 6남인 그는 바로 위 형인 함풍제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두명의 태후와 손잡고 정변을 일으켜 섭정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1867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평양 군민에 의해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한 것과 관련, 'Corea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므로 우리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이 자유롭게 응징해도 좋다'는 비밀 전갈(傳喝)을 미국에 보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콜톤 솔터 전 중국주재 영사의 육성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Corea는 중국의 속국이므로 Corea와 전쟁하면 중국이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중국의 섭정왕자 쿵(공친왕)은 1867년 영사업무로 베이징을 방문한 동안 벌링게임에게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 선원들의 학살에 유감을 표하고 '한국은 중국제국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독립된 나라이지만 옛날관습에 따라 명목상 조공을 바칠뿐이다. 미국은 그들을 자유롭게 응징할 수 있다'며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하이의 미국총영사가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전갈을 무시한 것은 커다란 실수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의 일방적인 도발(挑發)이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서양선박의 내항과 통상요구가 국법으로 금지된 것을 들어 출국을 요구했으나 도리어 관리를 감금해 폭행을 가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대포와 총을 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분개한 평양 군민들이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5년 후인 1871년 6월10일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5척의 군함을 강화도와 김포에 파병해 무력으로 개항을 시도합니다.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입니다. 불과 8시간의 전투에서 아군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반면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후 바로 보복에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1865년 링컨 대통령의 암살 이후 권력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탄핵(彈劾)을 받는 등 어수선한 국내정세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중국의 황제가 미국 등 열강의 유린(蹂躪)을 묵인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침공의 빌미가 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셔먼호 사건과 관련, 중국 황제의 입장을 베이징 주재 미국총영사가 간과하는 바람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중국만 믿고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약소국 정부의 무능으로 설움이 복받치는 대목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