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거 대한국민 독립의지 떨친 세기의 사변’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는 대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떨친 것은 물론, 일본의 위선과 잔혹성을 고발하고 종국엔 제국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세기의 사건이었다.
특히 미국은 당시만 해도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은 선린관계(善隣關係)였지만 ‘안중근의거’를 계기로 일본의 실체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일에 가장 앞장선 것은 미국의 양심적인 미디어들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의 보호국이 된 한국 국민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 시절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가련한 존재였다. 그러나 총리직을 무려 4번이나 수임하는 등 사실상 일본의 정권수반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육혈포’로 처단한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동방의 작은나라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 월스트리트저널, 샌프란시스코콜, 데일리캐피탈, 더벨맨, 모닝타임스, 엘파소헤럴드, 하와이가제트까지 미전역의 주요 매체는 물론, 호주의 브리스베인쿠리어, 싱가포르의 더스트레이츠타임스 등 세계 각국의 영어권 매체들이 신속하게 보도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뉴욕타임스의 경우 의거 당일 하얼빈발로 속보를 전한 것은 물론, 다음날 하와이의 한인애국회가 의거를 칭송한 성명서 전문을 ‘이토 사살 찬사(Praises Ito's Slayer)’라는 제목으로 “이토가 2천만명의 한국인을 노예삼았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또한 10월30일에는 ‘한국인 애국자들(Korean Patriots)’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의 한국 정책은 우리가 필리핀에서 하는 것처럼 한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일본의 방법이 우리보다 더 잔혹하고 국민교육과 자치를 위한 목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일본의 통치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의 처지에 연민(憐愍)의 정을 보이는 미국언론의 우호적인 보도는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인들이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피난처가 되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훗날 헨리 정같은 이들은 미국 언론에 기고문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홍보활동으로 우호적인 여론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이토처단 뉴욕한인 결부는 음모” 1912년 NYT 보도
그러나 초기 미주한인들은 한국인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려는 일본의 계략과도 싸워야 했다.
1912년 7월29일 뉴욕타임스에 눈길끄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토의 죽음에 뉴욕한인 관련없다. 일본성명 부인, 테라우치음모’라는 제목으로 당시 뉴욕한인회장 김식헌의 주장에 관한 보도였다.
내용인즉 일본의 친다 주미대사가 한국에서 테라우치 총독에 대한 살해시도는 앞세 스티븐슨 저격사건과 안중근의사의 이토 저격과 관련한 음모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스티븐슨 저격사건은 1908년 3월21일 일본통감부 외교고문이었던 친일파 미외교관 스티븐슨이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황실과 정부는 부패했고, 한국인은 우매해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데서 촉발됐다.
재미 한인단체 대표들이 스티븐슨을 찾아가 기자회견 내용의 철회를 요구했지만 스티븐슨이 거절하자 격분한 전명운의사와 장인환의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을 향해 떠나려는 스티븐슨에게 총을 발사해 사살했다.
이듬해 10월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탄압의 강도를 더욱 높이면서 1910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테라우치 총독을 살해하려했다는 날조극을 벌여 당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윤치호, 전덕기 등 신민회 간부 및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대거 투옥(投獄)시켰다.
일본은 스티븐슨과 이토저격에 테라우치 총독살해미수가 미주한인들도 연루돼 있다는 날조극으로 미국에서의 대한국여론을 악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김식헌 뉴욕한인회장이 친다 대사에게 보낸 전문 전체를 공개하며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테라우치 총독의 살해기도가 이토와 스티븐스 살해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당신들이 주장한 것과 또한 수 년전 이완용에 대한 살해기도도 그에 따른 것이라고 한 것은 허무맹랑한 거짓이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자백은 일본경찰의 고문에 강요 된 것이다. 몇 년전 일어난 사건(이토 저격)은 당신도 아다시피 개인의 한국인에 의한 것이다. 나는 일본정부가 고문에 의한 자백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한국은 잔혹하게 탄압을 받고 있다. 한국정치인들은 고문에 의한 자백을 하고 있다. 그것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문명국가가 아닌 부끄러운 나라로 세계가 인식할 것이다.”
1919년 3월1일 한반도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의 독립열기를 이해하면서도 과격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뉴욕타임스는 4월24일 ‘코리아’라는 사설에서 한국인의 역량을 재평가하고 주류 언론으로는 처음 한국의 독립을 공식 지지했다.
“(삼일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실질적으로 우수하며 지성적이라는 것이 입증됐다.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스스로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독립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지만 이번 운동을 통해 대단히 애국심이 많고 통제력이 있으며 잘 조직돼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중략)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여 제국화의 길로 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한반도의 2000만 명을 친구로 만들 것인지 적으로 만들 것인지는 일본에 달려 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통치는 일본의 이익을 훼손할 것이다. 미국 또한 한국의 독립이 성공적인 해결책이며 한국인들이 자체 정부를 갖도록 개혁되야만 한다.”
▲ “한국여성 98명 집단처형” 워싱턴타임스 일제 만행 특집보도
한국에 대한 미언론의 특별한 관심은 1922년 3월5일자 워싱턴타임스의 특집보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날 워싱턴 타임스를 펼쳐든 미국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본이 98명의 무고한 한국여성들을 집단처형하는 등 잔인무도한 만행(蠻行)들이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신문 한면 전체를 채웠기 때문이다.
‘총과 대검으로 98명의 여성 대량학살’이라는 제목과 함께 일본헌병들이 눈을 가린채 무릎꿇린 여성들 코앞에서 사살하는 장면과 일본도로 한 남성의 목을 베려는 장면 등은 미국 독자들에게 일본제국주의가 얼마나 잔학한지 고발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기사는 미국인 사업가 로버트 워드가 1919년 수원 제암리 집단학살사건과 1920년 일본이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습격, 3600명을 학살한 간도 참변 등 직접 목격했거나 수집한 자료들을 르뽀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서른두살 청년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1911년 10월 청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는 이른바 ‘신해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신해혁명은 한국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주어 상해임시정부 수립 등 가열찬 독립투쟁을 낳게 했다.
‘안중근 정신’을 계승하는 독립투사들의 항거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1932년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의 잇단 폭탄투척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대사건이었다.
그해 1월8일 이봉창의사는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昭和) 일왕을 겨냥해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심장부에서 감행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같은해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왕의 생일연(天長節))이 열렸을 때 윤봉길의사가 일본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물병모양의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다. 이 거사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총사령관과 가와바타 사다쓰구 일본거류민단장이 죽고, 무라이 총영사 무라이 등 일본의 고위인사들이 대거 중상을 입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윤봉길의사와 1924년 일왕 저격을 시도한 백정기의사 등 3인의 유해는 해방후 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한국에 봉환돼 효창원에 묘가 조성됐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10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해 ‘허묘(虛墓)’로 남아 있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지난 2008년 뤼순형무소 인근 묘역을 발굴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2010년 EBS가 안중근순국100주기를 맞아 편성한 특집방송에서 당시 발굴은 잘못된 정보로 엉뚱한 지역을 탐사했으며 진짜 매장지는 형무소 동쪽의 제1죄수묘역이라는 유력한 증언과 각종 자료들을 제시한바 있다.
안중근의사와 관련한 미국언론의 자료들을 다수 발굴한 재미언론인 문기성(53) 씨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묘’ 옆에 조성된 안중근의사의 허묘를 방치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올들어 하얼빈 역사 현장에 ‘안중근기념관’을 개관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안중근의사의 유해(遺骸) 발굴이 다시 이뤄지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09:22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