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월드트레이드센터는 로워 맨해튼에서 우뚝 위용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작 그라운드 제로에 들어서면 역시 시선을 끄는 것은 거대한 두 개의 추모풀입니다.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쌍둥이빌딩의 ‘발자국(footprint)’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비단 이 추모 풀만이 아니라 공원형태로 꾸며진 주변의 풍경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맨해탄의 금싸라기땅을 이렇게 과감하게 녹지로 만드는 결단이 부럽기도 합니다. 9.11테러참사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서울에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나서 500여명이 숨지는 초대형참사가 있었습니다.
강남의 노른자위 땅인 이곳은 지금 고급아파트와 오피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광복이후 최대의 참사로 기록된 이곳에 변변한 추모공원하나 만들지 않은 당시 서울시의 몰상식이 저는 놀랍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라운드 제로의 추모 풀이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추모풀 한켠에는 각국어로 된 안내자료가 있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는 보이는데 한국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국력의 힘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세계 12대 강국이네, K팝이 난리네 떠들어대면서 이런건 또 왜이렇게 신경을 안쓰는지 답답합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 많은 사람들중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이들은 거의 없는듯 했습니다. 한국어 가이드북이 없어도 할 말이 없지요.
그러나 뉴욕 일원에 한국인이 50만이나 살고 연중 한국에서 오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는데 너무 무심한게 아닌가 안타까웠습니다. (일본의 경우 관광객의 비중은 잘 모르겠지만 살고 있는 숫자는 한인의 5분의1 수준입니다.)
관광의 패턴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 자유의 여신상, 월스트릿 등 몇몇 뉴욕의 아이콘을 주마간산식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일관하는데 이젠 좀 깊이있는 테마 관광으로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추모 풀 테두리에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생자들의 이름입니다. 9.11테러로 숨진 모든 희생자들의 이름이 동판형태로 풀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침묵속에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영어 스펠링이 낯익습니다. 프레드릭 한(Frederic Han) 성이 ‘Han’인 것을 보면 필경 한국인이겠지요.
9.11 테러로 한인은 12명이 숨지고 13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9.11 테러로 인해 자식을 남편을 딸을 엄마를 잃은 모든 유가족들의 아픔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들었습니다. 원 월드트레이드센터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건물 사이로 보니까 그 모습에서 얼핏 9.11테러때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던 여객기가 연상됩니다.
참혹한 비극의 현장에서 그때를 떠올리니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죄없는 많은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거대한 빌딩으로 돌진한 수천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란 말입니까.
두개의 추모풀은 말없이 검은 눈물을 흘리는듯 합니다.

무거운 가슴을 안은채 그라운드 제로를 벗어났습니다.
밖으로 나오면 한켠에 9.11테러 잔해 일부를 전시하고 관련 상품도 판매하는 코너가 있습니다.

벽에 걸린 성조기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Flag of Honor'. 자세히 들여다보니 희생자의 이름을 성조기로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9.11테러 12주기를 맞는 내년 9월 11일엔 그라운드 제로의 모든 공사가 완료될 것입니다.
테러 참사의 아픔은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 씻겨지겠지만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부디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