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빛과 바람소리
낙엽을 태우네 눈보라를 태우네
땅끝에서 퍼지는 깊은 바다소리
태양을 비추네 하늘의 비추네
살아 숨쉬는것조차 힘에 겨워 이렇게 해가 저물길 기다리네
이제 도망가지 않아 마주서서 이렇게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네
어린 여자아이의 젖은 눈 사이로 흘러나오는 회색 빛깔
청춘을 버린 채 몸 팔아 영 팔아 빼앗겨 버린 불쌍한 너의 인생아
오늘따라 하늘이 유달리 무겁습니다. 연회색 하늘에 그보다 짙은 회갈색 구름이 정처없이 흘러가는게 보입니다.
알리라는 처음 듣는 가수 이름이 요 며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굽니다. 아직도 알리하면 불세출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떠오르는 저로선 예명(藝名)을 특이하게도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개 뉴스를 검색해보니 방송프로인 <불후의 명곡2>를 통해 차세대 디바로 기대를 모으는 84년생 신인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14일만 해도 알리는 요즘 말로 개념을 완전 상실한 가수였습니다. 지난 2008년 조두순에게 무참히 유린당해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나영이를 소재로 한 노래를 발표했기때문입니다. 알리는 이 사회의 성폭행 범죄에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해 자작곡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네티즌은 이 노래의 가사중에 ‘어린 여자아이의 젖은 눈 사이로 흘러나오는 회색 빛깔, 청춘을 버린 채 몸 팔아 영 팔아 빼앗겨 버린 불쌍한 너의 인생아’라는 부분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실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뒷부분의 가사는 가해자인 범인을 묘사한 것이라 하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이 노래의 제목이 ‘나영이’였고 처음부터 가수와 기획사가 ‘나영이’ 사건을 통해 성범죄에 경종(警鐘)을 울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홍보를 한 사실입니다.
명백히 이 노래는 나영이 사건을 마케팅으로 활용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아직도 어린 나영이(현재 11살)와 그 가족에게 또한번 큰 상처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날 배우 김여진은 지인의 트윗에 리트윗한 글에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본인이 주목받고 싶어서겠지. 나영이를 생각했으면 이런 곡을 만들지 않았겠지.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을 생각했으면 노래 제목부터 그렇게 안지었을걸. 어줍잖게 정의로운 척 하지마’라고 냉소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16일 알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하면서 분위기가 반전(反轉)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기자회견에 나온 알리는 3년전 자신도 성폭행 피해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와 함께 “나영이와 나영이 부모님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의도가 어떠했든 이번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아픈 상처를 되새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고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나영이'라는 곡은 앨범을 준비하면서 가장 애착이 가고 소중했지만 가장 조심스럽기도 했던 곡이다. 나영이에게 자신을 믿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알리는 지난 2008년 6월 평소 알고 지내던 모단체 후배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가슴 속 깊이 숨겨둔 사연에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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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얼굴을 주먹으로 맞아 광대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었고, 실신한 상태에서 택시에 태워져 끌려가 당했다. 그 후배는 구속돼 재판을 받다가 풀려난 뒤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의 처벌을 받았고, 상해죄는 목격자가 없는 등 증거부족으로 무죄판결 났다. 저는 죄질에 비해 처벌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그 후배는 무죄라고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1심 형량대로 형이 모두 확정됐다. 하지만 범인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해 지금은 민사소송 중이다.”
알리는 “당초 아버님 말씀대로 평생 비밀로 하고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의 응어리가 너무 아픈 채 지워지지 않았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범죄피해자가 된 나영이의 마음이 저의 마음과 너무나 흡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나영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고 성폭력범죄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여자로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평생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털어놓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네티즌의 들끓는 분노가 작용했을법 싶습니다. 기자회견을 열기전만 해도 방송에서 퇴출시키라는 강경한 목소리가 이어졌기때문입니다.
만일 알리가 계속 입을 다물었다면 자칫 가수로서 생명이 끊어질지도 모르고 다행히 살아남는다해도 앞으로 이른바 ‘개념상실가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평생 감추고 싶은 비밀을 털어놓아야 했던 알리에게 연민(憐憫)의 정을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알리의 기자회견이후 대부분의 여론은 동정적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은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비밀은 숨겨둔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용했다는 비판입니다. 나영이 사건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피해당사자와 가족을 위해선 자꾸 거론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안그래도 평생 안고가야할 상처인데 그것을 제목과 노래로 발표하다니요. 알 리가 똑같은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알리는 같은 상처를 안고 있기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더욱 그것을 보듬어야 하고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합니다. 더구나 나영이는 끔찍한 비극을 당했을 때 불과 여덟살이었고 이제 사춘기로 접어드는 열한살 나이의 어린 소녀입니다.
비록 나영이가 가명이라 해도 그 당사자와 가족들은 나영이라는 이름이 거론될때마다 쓰라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영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버젓이 발표하다니요. 나영이는 아무나 막 건드려도 되는 존재인가요? 내 약점을 숨기고 남의 약점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비겁했고 본인의 말마따나 너무 치기어린 행동이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당사자가 그러한 제목의 노래를 발표할 생각을 해도 주위의 어른들이나 최소한 가수를 통해 돈을 벌려 한 기획사가 냉정하게 판단하고 당사자에게 미칠 악영향, 사회적 파장 등을 고려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노이즈 마케팅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알리의 소속사는 나영이를 음원(音源) 사이트에서 삭제하고 오프라인으로 발매된 앨범을 전량 수거후 폐기처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덧나버린 상처,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 네티즌의 제안대로 차제에 나영이의 제목을 알리로 바꾸고 정면 대응을 한다면 더욱 호소력을 주고 사회적 경종의 파급효과도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리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알리 역시 파렴치한 범죄에 무참히 희생된 하나의 여성이니까요. 충격적인 비밀을 어렵게 고백은 했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워 노래하라는 것은 너무나 가혹(苛酷)한 주문입니다.
세상의 범죄중에서도 성폭력은 가장 잔혹한 인격살인이요, 본인과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악랄(惡辣)한 범죄입니다. 알리도 말했듯 도대체 대한민국의 법은 어떻게 생격먹은 것이길래 이런 자들이 고작 1~2년 형을 받고 그나마 집행유예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자애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성폭행 범죄자는 최소한 일급 살인에 준하는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특히 피해자가 미성년이거나 항거불능의 심신장애인이라면 영원히 세상과 격리(隔離)된다는 공포를 가증스런 범죄자들에게 안겨줘야 할 것입니다.
알리의 나영이 파문은 이땅에 얼마나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숨죽인채 고통스런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여전히 하늘은 우울한 빛입니다. 이런 때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좋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