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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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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간산 꼬레아<10> 처량맞은 독립문 우왁스런 아파트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2-04-08 (일) 01:49:50

   

마포에서 나고 서대문에서 자란 제게 어린 시절 가장 익숙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獨立門(독립문)입니다. 녹번동에서 무악재를 지나 서대문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만나던 독립문. 독립의 기개와 당당함이 느껴져야 할 독립문은 역사적 배경과 시대의 상황을 알 리 없는 어린 눈에도 왠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웅장하고 화려한 파리의 凱旋門(개선문)을 사진으로 접하고 독립문이 개선문을 모방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작고 초라한 독립문은 후진국의 표상인양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독립문은 솔직히 그 태생부터가 독립적이지 못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후 건설이 시작되었던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미 조선의 국권은 주변 열강에 의해 휘둘리고 개화파와 수구파는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독립문은 독립협회를 앞세운 서재필의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입니다. 그 자리는 본래 중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있었습니다.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새롭게 일본이 조선의 후견국이 되었음을 상징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독립문이 독립국의 조선의 기개를 말해준다면 일제가 식민지배후 독립문을 보수해주는 등 성심껏 관리해줄 이유가 없었겠지요. 조선의 입장에선 도적을 피했더니 강도를 만난 격이라할까요.

    

독립문이 세워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이기도 했던 이완용은 재정의 5분의 1을 기부하는 등 독립문을 세우는데 앞장섰고 당대의 서예가답게 한글과 한자로 된 현판을 쓴 장본인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구한말 대신을 지낸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썼다는 말도 하지만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것이 유력합니다.

 

▲ 이완용 www.ko.wikipedia.org 

그런 배경속에 독립문은 1896년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높이 14.28미터, 폭 11.48미터로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자 현판은 북쪽, 한글 현판은 남쪽에 새겨졌고 현판 바로 아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 기둥 윗부분만 철거한 덕분에 마치 독립문의 장식처럼 남게되었습니다.

  

독립문에 관한 구슬픈 역사는 건립후 82년이 지난 1979년에 이어집니다.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 있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이전한 것입니다. 본래 길 정중앙에 위치한 독립문을 현재 이대후문과 연대 사잇길로 금화터널을 뚫으면서 옮겨버린 것이죠.

 

당시 이전을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역사적 유적지를 교통불편을 이유로 옮긴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당연한 말입니다. 저는 독립문의 이전을 당시 지배층의 한심한 역사의식때문이라고 치부합니다. 구슬픈 역사이든 오욕의 역사이든 독립문은 독립문입니다. 그것은 소중히 보호되야하고 두 번 다시 국권을 잃지 말아야할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는 거대한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교통에 불편하니 옮길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이태리나 그리스를 여행한 이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조상 잘 둬서 관광수입으로 먹구 산다”구요. 그러나 저는 이들 나라의 후손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유적지의 돌 하나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유적지를 생명처럼 아끼는 보존의식을 가진 이들이 혜택을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독립문도 납작 들어서 옮기는 천박한 역사의식을 가진 후손들이 언감생심 무슨 조상 탓을 하겠습니까.

 

독립문을 옮기려 했을 때 지금처럼 기자였다면 단호한 논평을 썼을텐데 안타깝게 그시절 저는 삿된 논란에 비분강개한 애송이 재수생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잇는 고가도로가 완만한 S자로 휘어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후일담입니다만 서울시는 당시 이전 반대의견에 부딛치자 고가도로가 독립문 머리위를 지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대문 방향으로 S자를 그리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만들고보니 독립문과 몇미터 떨어지지 않았고 더욱 보기가 흉물스러웠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누가 창문열고 침이라도 뱉으면 독립문 머리에 떨어질만큼 가까웠습니다. 자연스레 이전찬성의견이 대세를 이뤘고 결국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고 말았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서울시는 일단 저지르고 보자, 결국 옮기게 될거라는 계산을 했겠지요.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연결하는 고가도로를 지날 때마다 전 독립문을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한심한 후손을 만나는 바람에 제 자리에도 못있고 해체된후 옮겨져 재조립된 사적지의 애달픈 운명때문입니다.

 

독립문이 있던 자리 한가운데는 ‘독립문지’라는 작은 표지판을 심어놓고 맨홀뚜껑같은 것으로 닫았습니다. 구슬픈 역사의 현장인줄도 모르고 오늘도 무심한 차량들은 그것을 밟고 달릴 뿐입니다.

 

3호선 지하철을 이용해서 독립문역에서 내렸습니다. 요즘 서울의 지하철역은 특색있게 꾸며놓은 곳이 참 많은데요. 독립문역은 독립의 컨셉에 맞춰 각종 태극기 디자인 장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구한말이후 명멸한 수십종의 태극기 문양을 시기와 종류별로 역사 벽에 부착해 놓았습니다.

 

 

그 옆에는 작은 태극기들을 나무처럼 형상화해 미니 쉼터로 꾸며놓았습니다.


태극문양에 누군가 낙서를 해놓은건가 하고 봤더니 그게 아니라 당시 학도병들의 이름과 각오들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멀리 독립문이 보입니다. 오른쪽에 독립관이 았고 순국선열을 기리도록 조성한 참배구역엔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독립문은 또다른 역사의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와 함께 2009년 조성된 서대문 독립공원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세운 형무소입니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1907년 감옥을 세웠습니다. 당시 500여명의 旣決囚(기결수)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이었다고 합니다. 1908년 10월 21일, 500년간 사용된 鐘路(종로)의 典獄署(전옥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를 옮겨와 京城監獄(경성감옥)이라 부르고 유관순 열사와 손병희 선생 등 숱한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고 고문 처형되었습니다.

 

 

해방후 이곳은 1946년 경성형무소로 개칭되었고 서울형무소(1950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1967년) 등의 명칭을 거쳐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가 투옥됐지만,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은 물론,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잡범 등 80여년간 35만명이 스쳐간 참으로 한 많은 곳이었습니다.

 

 

고교시절 선생님 한 분이 아이들이 말을 안들으면 농담삼아 “너희들 현저동 101번지 맛좀 볼테냐?” 하셨는데 서울구치소의 주소가 바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였다는 기억이 추억속에 살아나네요.

 

   

서대문독립공원이 조성되고 이곳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되어 유료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중고생들의 교육현장이 되기도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겉모습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곳엔 3.1운동때 유관순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이 보존돼 있고, 윤봉길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시면 여러분의 자녀 손을 잡고 한번쯤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등 일대를 둘러보는동안 가슴 한켠에 답답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곡절많은 우리네 근대사의 아픔이 떠오른 탓도 있지만 사실은 마뜩찮은 주변의 風光(풍광)때문이었습니다.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면 기괴한 장승처럼 시선을 방해하는 건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층아파트 들입니다.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를 에워싼채 금화터널 방향으로 무지막지하게 솟아있는 고층 아파트들. 사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참으로 보기 거북했습니다.

   

시선을 반대인 인왕산쪽으로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왕산과 키자랑이라도 할 셈인지 수십층 아파트가 도열해 산봉우리 끝만이 간신히 보입니다.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야 뒤로는 아름다운 인왕산이 있고 앞으로는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에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으니 최고의 환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 독립공원을 찾는 이들은 아파트에 포위된것처럼 답답함과 현기증이 느껴집니다. 마치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이들 아파트 단지의 장식 조형물이라도 된것같아 불쾌감이 생깁니다.

 

인왕산 등 서울의 아름다운 산세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도록 허가한 서울시 고위공무원들의 따귀라도 갈기고 싶습니다. 아파트를 지어도 주변 환경이 毁損(훼손)되지 않게 저밀도 중밀도 아파트로 지어야지 수십층 고층아파트가 웬말입니까.

 

고가도로에 방해된다고 독립문을 납작 들어올린 인간들이나 서대문독립공원을 아파트단지 정원처럼 만든 인간들이나 오십보백보가 아닐까요.

  

90년대 중반까지 강남에서 남산방향으로 한남대교를 건너면 하얏트 호텔 오른편에 거대한 2개동의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외국인아파트로 불린 것들입니다. 박정희 정권때 지어준 것인데 거주민이야 남산을 뒷동산처럼 놓고 즐겼으니 좋았겠지만 서울시민들에게는 남산을 가린 거대한 흉물이었습니다.

 

   

외국인 아파트는 94년 남산제모습찾기 운동에 따라 철거됐지만 막상 인왕산 주변은 이렇게 무분별하게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니 서울시의 일관성없는 행정에 대해선 그저 혀를 끌끌 찰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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