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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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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와 이근안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1-12-30 (금) 11:23:29

<30대 후반의 한 남성이 발가벗겨져 있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고문대위에서 널부러진 그이 앞에서 잔혹한 미소를 흘리는 건장한 체구의 40대 남성이 있다. “너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버려야 바른 말을 해.” 그자는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이다. 극한의 공포와 탈진, 죽음보다 더 큰 고문의 고통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지 오래다. “살려달라고 빌라”는 악마의 회유와 생식기를 조롱하는 성적 모욕은 차라리 달콤한 천사의 목소리였다. 원하는 답변이 아닐때마다 고문은 이어졌다. 그는 악마가 원하는대로 모든 ‘죄’를 시인했다.>

  

▲ 이하 사진 한반도재단 제공

1985년 9월 어느날 밤 9시 뉴스는 흰 피부의 호리호리한 체구의 한 남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83년 이땅에 민주화의 봄이 오도록 염원(念願)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와해시키기 위해 청년 지도자인 김근태와 탁월한 이론가인 이을호를 악명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잡아들여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문(拷問)을 자행, 결국 김근태는 공산주의자이고, 민청련은 공산혁명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 규정하는 수사발표를 했습니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전두환 정권의 짜맞추기 수사를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관제언론의 뉴스는 거꾸로 듣는 지혜가 필요한 시절이었지요. 그러나 선비처럼 유약해보이던 그 30대 남성이 전율할 정도의 악독한 고문을 당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 민청련 초대 의장을 맡고 있던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11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번 고문이 시작되면 대여섯 시간이나 지속됐다고 합니다.

잠을 안 재우고 밥을 굶기는 건 기본이었고 비명을 너무 지르다 성대가 부어 말을 못하면 약을 투여해 목을 트이게 한 뒤 계속해 고문을 가했습니다.

충격적인 고문의 실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면회온 부인 인재근 씨가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확인하고 변호사와 해외 언론을 통해 이를 알렸기때문입니다. 인재근 씨는 당국의 적발을 피하기 위해 가수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독재 정권의 악랄한 고문 사실을 녹음해 미국 언론에 전했고 이는 곧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이가 당한 고문은 듣는 것만으로도 참혹했습니다. 발가벗겨진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짐승만도 못한 모욕을 받은 대목에선 마치 제가 당한 것같은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인들은 이듬해 1월 고문 경관 15명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1년 간 질질 끌다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변호인 측이 다시 재정(裁定)신청을 냈으나 2년 가까이 묵혀 있다가 민주화 이후 1988년에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고서야 서울고등법원이 재정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고문경감 4명이 특별검사에 의해 기소됐습니다. 그러나 김근태를 비롯한 수많은 운동권 인사들사이에 '고문기술자'로 악명높은 40대 남성은 경찰청의 비호(庇護)속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이 창간 기획으로 '인권 시리즈'를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취재기자였던 민주당의 문학진 의원이 김근태 고문으로부터 “이름 모르는 고문기술자는 이근X 인데 끝자가 '한' 같기도 하고... 경기도경 공안분실에 있을 것 같다. 얼굴 보면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끈질긴 취재 끝에 문제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을 얼굴사진과 함께 보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근안은 이미 종적이 묘연한 뒤였지요. 그는 무려 10년 10개월 도피생활을 하다 1999년 10월에 자수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2006년 11월에 출소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이 한국시간으로 30일 별세했습니다. 재야운동권 출신으로 그는 제도권 정치인이 됐지만 원칙과 양심을 수호하는 자세로 운동권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보기드문 정치인입니다.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으로 해마다 고문당한 9월이 오면 한두달 ‘고문 몸살’을 심하게 앓았고 2007년엔 많은 고문피해자들에게 발생한다는 파킨슨병 확진판정이 나왔습니다.

급기야 지난 11월 뇌정맥에서 혈전이 쌓여 병원에 입원했고 12월 10일 딸 병민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을만큼 악화됐습니다.



 

▲ 생일겸 발렌타인데이때 아내 딸과 함께 김근태 이사장 <사진=김근태 미니홈피>

저는 김근태 이사장을 볼 때마다 늘 이근안이라는 이름 석자가 떠오릅니다. 김 이사장이 반평생 정신적 육체적 고통속에 생을 마감하게 된 것도 고문이 상당한 원인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래로 자유와 민주 인권을 부르짖은 수많은 양심수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문의 악행을 가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이근안만큼 쇼킹한 자는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고문기술자라는 타이틀이 달렸을까요?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 그는 목사입니다. 수형생활중 신학공부에 열중, 2008년 10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김근태 이사장은 2004년 한 목사님과 함께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을 면회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근안이 “용서를 빈다”고 했을 때 망설이는 김 이사장에게 곁에 있던 목사님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가리실 영역 아니겠냐"고 말하자 ”용서한다, 건강하시기를 바란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훗날 한 기자가 왜 망설였는지 묻자 그는 “이근안 씨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눈물을 전혀 흘리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김근태 이사장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근안은 2010년 <일요서울>과의 두차례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하는 궤변(詭辯)을 늘어놓았으니까요.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 듣기에도 끔찍한 고문기술은 이근안의 전매특허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먹으로 몇대 쥐어박거나 유도 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 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고 하면 변명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심문이 안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고 변명했습니다.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아마 이런 일화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다..”

명색이 고문기술자인데 실수로(?) 남의 팔을 빠지게 한다구요? 가당치 않습니다. 거짓말도 앞뒤가 맞게 해야지요.

이근안은 강제심문은 있었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끔찍한 전기고문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근태 고문에게도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만 주었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후에 눈을 가린 뒤 맨발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나.”

그러나 1987년 펴낸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에서는 당시의 악몽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일요서울 기자가 이근안 목사에게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묻자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면서요.

이런 애국자(?)가 김근태 이사장에게 용서를 빌다니 잠시 머리가 혼미(昏迷)해졌던걸까요?

이근안은 70년대 후반 경기도 경찰청 공안분실장으로 있으면서 김근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수배 후 불법 체포하였습니다. 1981년 전노련 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자들을 전원 불법 체포하였습니다.

1985년 민청련 사건외에도 1983년 함주명 조작 간첩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문하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2003년 3월 31일에는 1984년 간첩조작사건에 간첩으로 몰렸던 전직 예비역 군인 출신 이장형 등이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반제동맹 사건 의혹도 받아왔습니다.

이근안은 1979년 이른바 성실한 근무로 청룡봉사상과 근정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1986년 10월 23일 경찰의 날에는 당시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도 수여됐습니다.

고문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거짓을 진실로 뒤바꿈하며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 자가 버젓이 훈장을 받았으니 자신의 행위가 애국이고 다시 태어나도 같은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근안씨, 한가지만 물읍시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심지어 당신같은 자도 법이 부여한 인권이 보호되도록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청년 김근태를 고문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구요?

“김근태 죽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올라가마, 그 때 네가 복수해라.”, “오늘이 9월 13일이다. 13일에 금요일인데 예수처럼 한 번 죽어봐라.”

민주화가 된지 20년도 넘었습니다. 공포의 고문기술자인 당신도 손톱밑에 작은 가시가 박히면 아파할 것입니다. 십수년간 고문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기위해서라도 ‘고문의 예술’을 체험해볼 의향은 없나요?

당신 말대로 김근태 이사장은 지난 27년간 고문 후유증의 고통속에 결국 예수처럼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라도 참회(懺悔)의 눈물을 흘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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