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도 집나가면 고생한다더니 미국서 살면서 정작 영어를 한국에서 배우는 경우가 왕왕 생깁니다. 2년전 한국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옷을 엣지있게 입네” “그정도면 괜찮은 스펙이야” 이런 말을 하는데 어리둥절하더군요.
엣지(edge)와 스펙(spec)이 그 대목에 어울리는 적확(的確)한 뜻인지는 둘째치고 영어를 우리 말에 제멋대로 갖다붙이고 그걸 미디어가 유행어로 만드는 행태에 장탄식(長歎息)이 나왔습니다.
언제부턴가는 조금만 단어가 길어도 줄여말하는게 대유행입니다. 미국드라마를 ‘미드’로, ‘우리 결혼했어요’를 ‘우결’로, ‘미녀들의 수다’를 ‘미수다’로, 개그콘서트’를 ‘개콘’으로… 등등, 긴 단어를 간결하게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지나칠 정도이니 유행에 민감치 못한 입장에선 하루 상관으로 바뀌는 암구호(暗口號)를 대하는듯 합니다. ‘슈스케’만 해도 전 처음엔 무슨 일본 연예인쯤 되는줄 알았더니 ‘슈퍼스타 케이’ 더군요.
스폰도 저를 헷갈리게 한 단어입니다. 스폰(Spawn)이란 제목의 SF액션영화는 알겠는데 ‘스폰카페들이 개설되고 스폰만남을 알선한다’는 한국의 뉴스들에 갸우뚱하다가 그것이 스폰서(Sponsor)를 줄인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세자를 굳이 두자로 줄이는 이들의 심리란...)
하지만 스폰은 스폰서와 미묘한 차이가 있더군요. 후자가 우리가 아는 ‘후원자’ ‘프로그램 광고주’의 뜻이라면 전자는 만남을 댓가로 일정한 돈을 지급하는, 쉽게 말해 돈주고 애인되는 그런 부도덕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스폰이 남자간의 관계에도 성립이 된다는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뭐 동성애를 말하는건 아니구요. 신재민 문화관광부 전 차관이 스폰계의 전설이 될 것 같다는 얘기때문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SLS그룹 이국철 회장이 신 씨의 스폰이라는건데 그 수준이 어마어마합니다. 이 회장의 폭로발언을 감상하시죠. 경향신문 기사를 토대로 했습니다.
“2002년 가을 신 전 차관이 언론사(한국일보)에 재직할 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당시 내가 운영하던 회사에서 만든 전동차를 홍보하는 기사를 써준 데 감사하는 표시로 신 전 차관에게 현금을 건네면서 ‘호형호제’(이회장이 네살 적음)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그날 저녁 3000만원을 신 전 차관에게 직접 갖다줬다..신 전 차관에게 언론사 재직 시절 내내 월 평균 300만~500만원씩을 건넸고, 2004년 4월 다른 언론사(조선일보)로 옮긴 후 2006년 10월 퇴사할 때까지도 월 500만~1000만원씩 줬다...지난 대선 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의 선거조직인) 안국포럼에 급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신 전 차관이 가져간 돈만 10억원에 이른다. 3000만~1억원씩 수십차례에 걸쳐 가져갔다..이 대통령이 당선되면 회사 일을 돕겠다는 취지였다...신 전 차관은 대선 직후부터 2008년 2월까지 대통령 당선자 정무·기획1팀장으로 있을 때도 월 1500만~5000만원을 받아갔다..신 전 차관이 문화부 차관으로 재직하던 1년6개월 동안 싱가포르 법인 명의의 법인카드도 제공했다.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보면 적게는 매달 1000만원, 많게는 2000만~3000만원씩 사용했다..”
이거 참 읽기도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천만원, 이천만원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줄줄이 사탕처럼 나옵니다. 근데요. ‘그날 저녁 3천만원을 건네면서 호형호제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라굽쇼?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홍길동도 울고 갈 일입니다. 서얼차별(庶孼差別)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피눈물을 뿌린 홍길동한테 미안하지도 않은지...그정도 돈이라면 호형호제가 다 뭡니까, 더한 것도 해줄텐데 말이죠.
아무튼 이 회장의 폭로내용을 토대로 신 씨가 받은 돈의 총액을 계산하면 최소 20억9900만원, 최대 41억5700만원이 됩니다. 근 10년에 걸쳐 수십억원을 받았으니 스폰의 전설이 되고도 남는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신 씨는 “법적으로 책임질 짓을 한게 없다. 왜 그렇게 과장되게 말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본인도 검찰수사를 원한다니 추이가 자못 기대됩니다만 ‘과장’이라는 표현을 쓴걸 보면 받기는 받은게지요.
그런데 신씨가 생각하는 과장과 우리가 생각하는 과장의 ‘스펙’도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촌지(수천만원의 뇌물을 마음의 정표를 뜻하는 촌지-寸志로 써야하는게 글로 먹고사는 제 입장에서 참 괴롭네요)를 대통령 당선자 정무기획팀장시절은 물론, 문광부 차관 재직중에도 계속 받았다는건데... 천성관 전 검찰총장 내정자가 ‘스폰’ 의혹으로 낙마하는 것을 보면서도 금품수수를 멈추지 않았으니 이토록 엄청난 배짱이라면 신씨의 과장이란 단어는 저같은 범부(凡夫)따위가 생각하는 수준이 아닐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신 씨가 스폰 기간과 액수에 있어서 역사에 기록될만하다고 놀라워하는데.. 글쎄요. 한국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중앙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 등 잘나가는 언론 경력에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금빛 찬란한 꼬리표의 그가 과연 무뇌아처럼 구린 돈을 덥썩덥썩 받아먹었을까요?
이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필경 신 씨는 이 회장을 혈육보다 더 가까운 동생(동생돈을 받아먹은 것도 죄가 됩니다만)으로 생각했든지, 그 정도 촌지수수는 MB 정권에선 일상적이었든지, 둘중 하나이겠지요.
신씨는 문화부 장관으로 낙점됐을 때 양도세 탈루 의혹, 위장전입, 부인의 땅투기 의혹, 증여세 의혹에 이어 부인이 친구회사에 위장취업한 의혹 등등 자고일어나면 불거지는 의혹들로 ‘걸어다니는 비리백화점’, “공직자의 자격은 커녕, 국민 자격도 없다”는 비아냥속에 사퇴한 바 있습니다.
비단 신 씨가 아니어도 MB정권하의 고위공직자 인사를 보면 ‘그나물에 그밥’이요,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는 말들이 꼭 어울립니다.
그중에서도 소위 언론인출신이라는 인사들의 구역질나는 행태를 볼 때마다 저는 언론인 타이틀을 뒷간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필봉을 휘둘러? 그런건 개나 주라고 해!’하고 말입니다.
잘나가는 매체에서 허울좋은 기자노릇으로 대권후보군과 이런저런 연을 맺으며 호시탐탐 정계 진출을 노리는 ‘폴리포터’들. 좋은 자질을 갖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구린내 나는 이들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직업선택의 자유로 바라보기엔 대중에 가하는 역기능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이들을 척결(剔抉)할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