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일정을 설악산에서 보낸 후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춘천으로 이동했습니다. 베어스 관광호텔에서 재외동포언론인협의회가 주관하는 국제심포지엄이 하루종일 열리기때문입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15개국 25명의 재외동포언론인이 참석한 가운데 <재외동포언론인이 바라보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강원도>를 주제로 6명의 발표자가 나섰습니다. 보도를 통해 전했습니다만 이번 심포지엄은 제가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행사 준비를 막후에서 도운 한국기자협회 이원희 부장이 사회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한 것은 기자협회와의 오랜 인연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88년부터 한국기자협회는 늘 친숙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한 신문사가 같은 프레스센터 건물에 있었던만큼 기자협회 멤버들과도 자주 접촉을 했습니다. 회장들은 2년 임기가 끝나면 이천구 사무처장을 비롯, 이영재 부장도 20년 넘게 얼굴을 안 사이였으니까요.
94~95년엔 소속사의 기협지회장도 맡아 한국기자상 수상자들과 베트남 여행을 하기도 했고 크고 작은 기협 행사에도 꾸준히 참석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미국에 와서 ‘글로벌 웹진’ 뉴스로 창간을 계기로 다시 기자협회를 만나게 됐고 올해만 두 차례 출장을 가게 됐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셈입니다.
첫 번째 주제발표를 한 김훈 유로저널 발행인은 2012년 런던올림픽 준비상황을 소개하며 평창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친환경 올림픽’을 강조했습니다. 김 발행인은 “올림픽이 겉으로는 강원도를 많이 바꿀 수 있겠지만 엄청난 적자를 남길 가능성도 적지 않다”며 “평창올림픽도 최우선 과제를 친환경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2014년 소치올림픽 준비상황을 발표한 김원일 러시아 모스크바뉴스 발행인은 “러시아 생태학자들은 소치올림픽 관련 건설을 환경에 부정적이며 야만적인 일로 지적한다”며 “평창은 소치를 보며 환경을 해치지 않는 올림픽 시설물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고직순 호주한국일보 발행인은 <올림픽 경기후 개발 및 사용극대화 방안>을, 김인구 호주한국신문 편집인은 <세계하나뿐인 강원, 자연과 사람이야기>를 통해 강원도 관광상품의 다양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재외동포언론인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이종국 워싱턴 한국일보 부국장은 “이 지구상에서 자기 돈을 들여 기쁜 마음으로 평창으로 달려올 유일한 그룹은 바로 7백만 재외동포”라며 평창의 성공을 위한 재외동포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후 세션에는 김남수 평창올림픽 유치위원회 기획처장이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의의 및 준비계획>을 통해 올림픽 인프라 확충계획과 기대효과, 향후 주요일정을 소개했습니다. '레임덕 현상'에 대한 이성춘 기자협회 고문의 특별강연도 이어졌습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저녁까지 남는 시간을 활용해 소양강 댐과 지역민방 GTB를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소양강 댐도 역시나 수십년만에 다시 가보는 곳입니다. 소양강 댐은 1967년 4월 착공해 1973년 10월 준공된 사력(砂礫) 댐으로 용량 20만kW의 수력발전소를 가동하는 다목적 댐입니다.
당시엔 아시아 최대규모의 댐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 댐덕분에 상류의 인제까지 배가 다닐 수 있어 관광산업에도 큰 몫을 했지요.
귀로에 들른 곳은 강원민방인데 동행한 한국기자협회 박기병 고문이 초대 대표이사를 맡은 곳이어서 특별히 탐방하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2001년 개국한 강원민방은 창립 10주년을 맞은 이달 G1으로 사명을 변경, ‘청정강원’의 녹색가치를 높이고 ‘세계속의 강원’을 만드는 글로벌 방송으로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오다가 소양강처녀 동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민가요라고 할 수 있는 ‘소양강처너’는 반야월 작사 이호 작곡의 노래인데 1970년 김태희가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이 노래는 90년대 들어 노래방 문화가 확산되면서 그야말로 국민 애창가요가 되었는데 소양강처녀의 실제 모델은 바로 춘천 출신 가수지망생 윤기순(당시 18세)이라는 처녀였다는 사실이 반야월씨의 술회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소양강처녀의 내력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memory&no=19656
그때의 사연이 소양강처녀 동상까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정작 동상은 이 일화의 무대가 된 곳을 선택하지 않고 대로에서 잘 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는데 박기병 고문은 “공무원들의 탁상행정으로 전혀 엉뚱한 곳에 기념물이 세워졌다”고 탄식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 ‘소양강처녀’ 동상이 세워진 인근에 기념탑과 각종 조형물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었습니다. ‘춘천대첩 기념평화공원’입니다. 춘천대첩을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바로 한국전쟁 발발당시 우리 국군이 승리한 첫 번째 중요한 전투를 말합니다.

아다시피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물밀듯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춘천에서만큼은 완강한 저항에 부딛칩니다. 6사단(사단장 대령 김종오) 7연대가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눈치채고 6.25 사흘전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남북한의 경계가 38도선이어서 지금의 경계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습니다. 춘천 바로 위가 38도선이었으니까요. 탱크와 자주포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화력에 상대조차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이때 유명한 무용담이 있습니다. 심일 소령이 지휘하는 5인의 특공대가 수류탄과 화염병을 탱크에 올라타 자주포에 집어넣어 2대를 폭파시킨 겁니다.
그 후 이 소식이 알려져 여러 곳에서 이런 육탄공격을 통해 북한군 전차를 많이 폭파시켰고 춘천에선 사흘을 버텨 27일 수원까지 가려 했던 북한 측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600명, 북한군 8000명이 전사, 국군의 대승리로 귀결되었습니다.
결국 서울 함락이후 후퇴했지만 UN군이 시간을 벌어서 국군과 함께 대구 일대에서 필사적으로 북한군을 막을 수 있었고 이 춘천대첩이 아니었다면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전쟁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춘천대첩에는 적지않은 학도병의 희생이 있었는데요. 박기병 고문도 열아홉살의 나이에 참전, 춘천대첩의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당시 춘천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박 고문의 이름은 다른 전우들과 함께 기념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중에는 중국 심양에서 온 조선문보의 윤청 국장이 감회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 국장의 아버지는 조선족으로 훗날 중공군이 북한을 위해 투입될 때 참전했다고 합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이라는 역사의 아픔속에 또다른 비극의 희생양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때까지 전선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을지도 모를 박기병 고문에게 윤 청 국장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해원(解寃)의 악수를 나누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베어스 관광호텔에서는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마련한 만찬이 거행됐습니다. 알려진대로 최문순 지사는 MBC 기자로 시작, 언론노조연맹 위원장에 MBC 사장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최문순 지사와의 인연도 있습니다. 기자 생활 초기 제가 축구 담당을 할 때 최 지사 역시 MBC에서 축구담당 기자로 운동장에서 자주 만난 사이였거든요.
88년 서울올림픽때 최문순 기자가 박종환 대표팀감독의 전격적인 사퇴소식을 특종보도한 것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결정적인 한방을 잘 터뜨린 민완기자였지요. 이듬해 2월에는 태국서 열린 킹스컵에 당시 럭키금성 팀과 동행해 출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언노련 위원장 시절 한번 만난 적은 있지만 상당히 오랜만의 반가운 회포를 풀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