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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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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최고 리얼리티쇼, 칠레광부의 생환드라마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0-10-15 (금) 07:54:13

‘달 탐사선의 발사에 비할까요. 혹은 허드슨강에 비상착륙한 비행기나 월드컵 결승은 어떨까요. 칠레 광부 33명의 구출을 기다리며 눈을 TV에 모은 시청자들의 심경은 이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14일 뉴욕타임스는 A섹션 1면의 리드기사와 17면 전체를 칠레 광부들의 구조소식에 할애하면서 ‘리얼리티 TV’쇼에 비유했습니다. 하긴 이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며 극적인 드라마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 매몰된 칠레 광부들이 구조직전 지하갱도에서 칠레 국기를 배경으로 서있다.<이하사진 NBC-TV캡처>

무려 69일간 지하 700미터 지점에 매몰(埋沒)된 33인의 광부. 이들이 전원 무사히 구출된 것은 비단 칠레 국민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인류애를 가진 지구촌 전체의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붕괴 매몰사고로는 최장기간 최다인원의 기록과 함께 첨단(尖端) 과학장비와 전문가들이 동원됐고 수많은 얘깃거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그곳엔 냉철한 판단력과 리더십으로 규율을 만든 지도자도 있었고 60대 노인과 10대 소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전직축구스타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 외국인 노동자도 있었고 지상에서 퇴짜맞은 여자친구에게 지하에서 청혼해 성공한 전화위복(轉禍爲福)도 있었습니다.

두달이 넘는 기간을 700미터 지하갱도(地下坑道)에서 그들은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아무도 이들의 생사를 모르던 처음 17일간 막장의 리더 역할을 한 루이스 우르수아 씨(54)는 구조작업이 장기화될 것을 고려, 48시간마다 참치 두 스푼과 쿠키 반 조각, 우유 몇 모금만 먹으며 버티도록 했습니다.

  

건전지(乾電池)를 아끼기 위해 광부들의 헬멧에 달린 전등의 사용도 엄격히 제한했고 지하갱도 지도를 만들어 공간을 작업실·침실·화장실로 나눠 위생적으로 사용토록 했습니다. 오락을 맡은 광부도 있고, 간호사 출신 광부는 동료들의 건강을 점검케 했습니다.

추가 붕괴의 위험과 구조의 손길을 놓치지 않도록 3개조로 나눠 24시간 교대 근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구조된 이후 마지막으로 지상에 나왔습니다. ‘그들에겐 우루수아라는 행운이 있었다’는 워싱턴포스트의 평가가 더없이 어울리는 지도자였지요.

   

TV와 컴퓨터, 휴대폰 등 멀티미디어 기기를 통해 펼쳐진 스물두시간의 구조 드라마는 69일간 진행된 리얼리티쇼의 백미(白眉)였습니다. 뉴스전문 케이블 CNN이 자매채널(CNN인터내셔널)을 이용, 구조 과정을 릴레이 중계한 것은 물론, ABC, CBS, NBC, 폭스-TV 등 모든 공중파 방송들이 수시로 ‘브레이킹 뉴스’로 전하며 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 당겼습니다.

 

각본없는 드라마, 모두가 승자인 드라마로 시청자를 잡을 수 있는데 마케팅에 능한 TV매체들이 이를 놓칠 리 없습니다. 사실 CNN도 1987년 10월 텍사스의 한 타운 우물에 추락한 제시카라는 이름의 아기를 구출하는 58시간의 과정을 생중계하면서 오늘의 명성을 얻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니까요.

 

지름 26인치(66cm)의 작은 원통모양의 구조 캡슐의 이름은 ‘피닉스(Phoenix) 2’, 불사조(不死鳥)라는 뜻에 걸맞게 왕복 1마일(1.6.km) 구간을 서른세번 오가며 매몰 광부 전원을 무사히 구해냈습니다. 캡슐을 통해 지상으로 나온 광부들의 감동적인 몸짓도 세계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63세의 최고령인 마리오 고메즈 씨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범접하기 힘든 생명의 외경(畏敬)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사고 이전부터 그만 일을 쉬라고 졸랐다는군요. 그를 포옹하며 일으켜 세우는 부인과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딸의 모습도 뭉클하게 했습니다.

광부 중에는 유일한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볼리비아에서 온 카를로스 마마니 씨(24)입니다. 그를 영접(迎接)하고자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까지 날아와 새로운 직업과 집도 주겠다고 약속했다지요. 생환의 기쁨과 함께 예상치 못한 행운들이 쏟아져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빅토르 자모라 씨(34)는 생환직후 임신의 몸으로 애태운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에스테반 로하스 씨(44)는 아내에게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교회에서 예식을 올리겠다며 애틋한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조금 복잡한 가정사로 세인의 이목을 끈 사람도 있습니다. 요니 바리오스 씨(50)입니다. 그가 구조캡슐에서 나온 후 뜨거운 포옹을 한 여인은 아내가 아니라 애인이었습니다. 사는게 뭔지..

 

그와 28년을 산 아내 마타 살리나스 씨는 기자들에게 “나는 집에 가서 남편을 기다리겠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다시 봐서 행복하다. 만일 그가 다시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더군요.

가장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카메라기자들을 바쁘게 만든 주인공은 마리오 세풀베다 씨(39)입니다. 그는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가하면 지하 갱도에서 줏어온 돌멩이들을 대통령과 구조대원에게 기념품으로 건네고 칠레 방송사와도 원기왕성하게 인터뷰를 하는 등 단연 시선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기자들에게 주문한 것은 “우리를 스타처럼 대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초록의 점퍼와 오클리 선글래스를 착용한 그는 진짜 스타처럼 멋져 보였지만 “나는 그냥 마리오 세풀베다. 일을 계속하고 싶을뿐”이라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라울 부스토스 씨(40)는 올해 두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지난 2월 칠레 대지진때도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거든요. 당시 칠레 남부 탈카후아노의 조선소에서 일한 그는 두달전 산호세 광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지 두달만에 매몰사고를 당했습니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헷갈립니다.

프랭클린 로보스 씨(53)는 축구스타 출신으로 이목(耳目)을 끌었습니다. 80년 아타카마 클럽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한 후 95년 은퇴할 때까지 라 세레나, 산티아고 원더러스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올림픽 대표로도 활약했고 강력한 프리킥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www.wikipedia.com

은퇴후 택시 기사로 전업한 그는 산호세 광산에서 광부 겸 트럭 운전사로 일했는데 생환직후 기자들 앞에서 축구공 묘기를 선보이며 왕년의 솜씨를 과시했습니다. 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품에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선물한 아디다스 축구공이 안겨 있었습니다.

로보스 씨의 아들뻘인 최연소 지미 산체스 군(19)은 열렬한 축구팬이기도 하다는군요. 그는 여자친구가 임신해 9월까지만 광산에서 일하고 좀더 벌이가 좋은 일을 할 계획이었는데 그만 엄청난 사고를 만났습니다. 어머니 노르마 라구에스 씨는 아들이 캡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아들을 낳은 것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갱도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엘비스 팬 에디손 페냐 씨는 현장에서 뉴스를 진행한 TV 앵커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제일하우스 롹’ 앨범을 선물받고 함박 웃음을 지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11월 7일 열리는 뉴욕마라톤에 참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6마일 달리기를 해서 ‘러너(Runn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의 출전을 뉴욕시 마라톤조직위가 섭외중이기때문입니다.

 

아참, 69일간의 기적의 드라마가 필경(畢竟) 책과 드라마, 영화로 쏟아져 나올텐데요. 집필 작가는 걱정 안해도 될 모양입니다. 빅토르 세고비아 씨(48)가 69일간의 사투(死鬪)를 700미터 지하 갱도 안에서 일기쓰듯 계속 기록하고 있었거든요. ^^

당분간 이들의 얘기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더러 잡음도 흘러나올 수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럽겠지요. 불굴(不屈)의 의지로 ‘감동의 리얼리티 쇼’를 선사해 준 33인의 광부들과 구조대원, 모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敬意)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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