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 <구당서>, 그리고 <신당서>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된 고죽국에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를 봉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明史(명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朝鮮)은 기자(箕子)에게 봉(封)하여 준 나라이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일찍이 연(燕)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 말[초]에 부여(扶餘)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다. 혹은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한다. 평양(平壤)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곧 낙랑(樂浪)의 땅이였다. 그 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불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契丹)과 인접하였고, 서쪽에는 여직(女直), 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원(元)의 지원(至元) 연간(1335-1340)에 서경(西京)(平壤)이 내속(內屬)되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고 자령(慈嶺) 끝으로 경계를 삼았다.” 라고 하여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산서성(山西省)에 주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하였고 고구려가 그 땅을 영토로 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이 그 땅을 다시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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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14부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이 고씨(高氏)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불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가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망할 때까지 고구려는 이곳 산서성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고려의 서경(西京)이였다고 말해주고 있다. 한 가지 차이점으로, <隋書(수서)>는 삼군(三郡)을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明史(명사)>는 사군(四郡)을 설치했다는 부분이다. 본고에서는 이점은 다루지 않겠다.
고죽국의 위치를 확정 지을 수 있는 천연지형이 바로 수양산(首陽山)과 유수(濡水)이다. 그런데 북송 때 증공량(曾公亮) 등이 저술한 <武經總要(무경총요)>에 “수양산은 옛 고죽국의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대지명대사전>, 그리고 <대청광여도> 등 여러 자료에 수양산이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산서성이 고죽국임을 재차 확증시켜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지리서인 <원화군현도지>와 <괄지지>는 “중조산(中條山)이 수양산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현대지도에도 중조산이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죽국의 수양산인 오늘날의 중조산이 위치한 산서성이 고구려의 영토였음이 고증된 것이다.
고죽국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하천 유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수경주>에 “유수는 노룡산(盧龍山)에서 나온다. ...연(燕)을 나누어 요서군으로 두었으며 영지에 속한다. <魏土地記(위토지기)>... 비여성 40리에 유수가 있다. 남쪽으로 흘러 고죽성 서쪽을 지나 우측에서 현수(玄水)와 합류한다.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소유수라 하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이다. “흑룡산... 즉 옛 유수이며 오늘날의 난하다. 구양수가 이르길 난수(난하)가 탄산 동북에서 나온다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여 유수와 수양산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5>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유주와 영주의 위치 연구>(제8집)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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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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