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나라 양제가 산서성에 있던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군사를 집결시켰던 탁군은 <그림 10>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도성이 있던 섬서성 서안 동쪽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의 하북성에 탁군이 있었다는 [대한민국]학계의 주장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지 못한 허구의 소설임이 극명하게 입증되는 대목이다.
“영양왕25년(614) 봄 2월에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도록 했다. 가을 7월에 양제는 회원진(懷遠鎭)에 행차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수양제가 행차한 회원진의 위치를 알아보자.
진(鎭)이란 “한 지역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주둔한 지역”을 뜻한다. 따라서 회원현의 위치를 찾으면 바로 그곳이 회원진이 된다.
회원현은 “명나라가 회원보를 설치했고 청나라가 회원현을 설치했는데 섬서성 유림부에 속한다. 중화민국이 개정하여 횡산현(橫山縣)이라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회원현은 황하 서쪽 섬서성 북부에 있는 돌궐 계민가한의 장막이 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회원진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고구려와 대치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회원진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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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31부
제27대 영류왕 11년(628)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태종이 돌궐의 힐리왕(頡利王)을 사로잡은 것을 하례하고는 봉여도(封域圖)를 올렸다.”
고구려의 제27대 영류왕은 돌궐의 힐리가한이 당나라 태종 이세민에게 사로잡힌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돌궐은 더 이상 고구려의 우방이나 중립국이 되지 않고 당나라의 속국이 되었음을 알리는 대목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영류왕은 고구려의 내륙 지도를 적국인 당나라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국의 지도를 적국에 넘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영류왕의 실책으로 인하여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을 고구려의 제28대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제28대 보장왕 3년(640) 겨울 10월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희, 영협 군사 4만명, 장안,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명과 전함 5백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황하)를 건너 평양으로 달려가게 하고, 또 태자 첨사 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보병, 기병 6만명과 난주(蘭州), 하주(河州) 두 고을의 항호군(降胡軍)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려가게 하여, 두 군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했으며...”
각주 제1항에서 밝힌대로 당시의 해(海)인 바다란 황하를 뜻한다. 여러 가지 문헌사료들을 읽어보면 황하라는 단어는 당나라 중렵 이후부터 서서히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인용문에서의 바다란 황하를 의미한다.
유주(幽州)는 제2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주인 산서성 남부를 일컫는 말이다. 내주에 대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황하를 사이에 둔 하남성과 산서성 사이의 황하 속에 위치한 우갈석산 지역의 섬주의 섬(陝)자를 내주(萊州)의 내(萊)자로 후대에 왜곡한 것이라고 믿는다.
고구려의 도읍지는 산서성에 위치하였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멸하기 위해 산서성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내주(萊州)는 산동성의 내주가 될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다. 유주가 산서성 남부인데 갑자기 멀리 2,200리 동쪽의 산동성 내주가 나온다는 것은 합리성도 논리성도 설득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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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32부
보장왕 4년(645) 봄 정월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세적의 군사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이세적의 군대는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매우 형세를 뽐내며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오는 것처럼 하다가 몰래 군사를 몰아 북쪽으로 가서 양쪽이 담이되어 있는 사잇길로 달려가서 우리가 생각지 않던 곳에서 나타났다.
여름 4월에 이세적은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에 이르니,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5월에 성은 함락되고 남녀 천명이 죽었다. 이세적은 나아가 요동밑에 이르고 황제는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펄이 2백여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으므로 장작대장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갈고 다리를 만드니, 군사들이 머물지 않고 행군하여 요택을 건너서 동쪽[서쪽]으로 갔다. ...황제는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결심을 굳게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으며...”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세적의 군대가 이르렀다는 유주(幽州)는 산서성 남부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유성(柳城)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자. <中國歷史地名大辭典(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유성은 일명 사향현(思鄕縣)으로 오늘날의 섬서성 람전현(藍田縣) 동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세적의 군대가 출발한 유성은 바로 당나라의 도성인 서안성(西安城)의 동남에 위치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주라고 표시한 타원형 안에 있는 유성현을 아래 <그림 12>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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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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