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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4~30부

제II장. 단군조선의 중심지는 산서성
글쓴이 : 김태영 날짜 : 2026-03-23 (월) 20:42:52

제II장. 단군조선의 중심지는 산서성

<고려사/지리지>에는 단군조선에 관하여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원래 삼조선의 옛 도읍지이다. 당요 무진년(BC2333) 신인이 하늘에서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기자의 41대손 준(準)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하여 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 험을 검이라 쓰기도 한다. 즉 평양이다.)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한무제 원봉2년(기원전 109)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4군을 정하였는데 왕험성을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진년인 BC2333년에 단군이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평양에 도읍한 전조선은 단군조선이고 그 후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했으며 끝으로 위만조선이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왕검이 세운 단군조선이 최초에 존재했기에 그 땅에서 기자가 다시 기자조선이라 했고 연나라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위만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고려사/지리지>에서 언급한 평양과 단군조선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사마천의 <사기>를 검토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나 www.historyofcorea.com 으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5부

<史記(사기)/朝鮮列傳(조선열전)>에는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城)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열[멸]한 뒤에는 요동의 국경지대(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는데, 한(漢)이 일어났으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북연)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漢]을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 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땅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蠻夷) 및 옛 연·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패수라는 하천을 경계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패수의 위치를 밝히면 그 지역이 조선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대륙에 있는 약 1,252개 하천을 설명하고 있는 <水經注(수경주)/十三州志(십삼주지)>에는 “패수가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패수현(浿水縣)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패수(浿水)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 있는 조선까지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남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에서 패수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하였음으로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서 패수를 건너 산서성 남부에 있는 낙랑인 조선현(朝鮮縣) 방향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패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라며 조선의 패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6부

제1절. 왕검단군의 고향 단향(壇鄕)은 왕옥산과 패수 부근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향(壇鄕)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왕옥산(王屋山)에서 패수가 발원하는데 이 패수를 예수(濊水) 또는 제수(濟水)라고도 한다.

제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제원시(濟源市)를 거쳐 흐른다. 그런데 단국(單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국(檀國)을 단국(單國)이라고도 한다. 서주(西周)가 봉한 나라의 하나이다. 지금의 하남성 제원시 동남에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남성 하내에 있는 제수의 동남에 있는 나라는 단군조선밖에 없으므로 이 단국은 단군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이 왜곡되어 있어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서주(1046~771BC)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상(商: 은)나라의 신하국이다. 서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패망시키고 자신의 동생들을 은나라의 영토인 하남성에 제후로 봉한 것이 주나라의 제후국들이다.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古今姓氏書辯證(고금성씨서변증)>이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의 <史記(사기)/管蔡世家(관채세가)>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문왕의 본명은 희창(姬昌)으로 희창의 자식들을 순서대로 적으면 백읍고(伯邑考), 무왕발(武王發), 관숙선(管叔鮮), 주공단(周公旦), 채숙도(蔡叔度), 조숙진탁(曹叔振鐸), 성숙무(成叔武), 곽숙처(霍叔處). 강숙봉(康叔封), 담계재(聃季載) 모두 10명이다.

문왕의 장자가 백읍고인데 아버지가 은나라 주왕(紂王)에 의해 유리(羑里)에 유폐되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주왕에게 뇌물을 주는 과정에서 주왕의 첩 달기(妲己)가 백읍고를 유혹하려 했으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자 달기는 백읍고가 자신을 덮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웠고 이로 인하여 화가난 은나라 주왕이 백읍고의 사지와 몸통을 토막내는 능지(凌遲)란 형벌로 죽였다.

때문에 백읍고는 아버지 문왕보다 먼저 죽었으며 그로 인하여 둘째인 무왕(희발)이 문왕을 계승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서주(西周)의 제1대 왕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과 www.historyofcorea.com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7부

문왕이 유폐된 유리(羑里)는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북쪽 9리이다. 역시 유리(牖里)라 한다. <사기/은기>에 주왕(紂王)이 서백(희창)을 유리에 가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으로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춘추전국 시기를 거치면서 지명이 옮겨져 왜곡된 곳이며 서백창을 가둔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북부 부평현(富平縣) 부근이다.

“유리(羑里)는 <수경주>에 의하면 하나라는 하대(夏臺)라 하고 은나라는 유리(羑里)라 하고 주나라는 령어(囹圄)라 했는데 모두 환토(圜土: 둥굴게 둘러싼 감옥)이다”라고 적고 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주나라가 령어라 부른 땅에 대한 기록이 고금지명대사전, 고대지명대사전, 역사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령어의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하나라가 하대(夏臺)라고 칭했다는 하대 역시 기록이 없으나 하양현(夏陽縣)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나라가 하서현을 설치했다. 고쳐 하양이라 했다. 송나라는 생략했다. 고성(故城)은 오늘날의 섬서성 합양현(郃陽縣) 동쪽 40리에 있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합양현은 부평현과 상나라의 초기 도읍지인 대려(大荔)의 동북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유리읍(羑里邑)의 기록을 살펴보자. “유리읍(羑里邑)은 유리읍(牖里邑)이라고도 한다.” “유리읍(牖里邑)은 즉 미리읍(美里邑)이다”라고 적고 있어 유(牖)가 미(美)라는 것이다.

역시 미리읍(美里邑)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단서가 보인다. “미원보(美原堡)는 섬서성 부평현(富平縣) 동북 60리에 있다. 포성현과 접경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원현(美原縣)은 후위의 토문현(土門縣)이다. 당나라가 고쳐 미원현을 두었다. 원나라가 부평과 합병했다. 고성(故城)은 즉 지금의 미원보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nhistory.com 과 www.historyofcorea.com에서

 

댓글(이기홍): 지명대사전에 특히 송나라가 생략하였다는 지명이 많습니다. 그 리유를 뭐하고 보십니까?

답: 본래의 옛 지명들을 사실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송(宋)은 당(唐)과 달리 지명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하려 했다. 문(文)을 숭상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6명이 송나라 출신이라는 점이 잘 웅변한다.

송왕조는 고려왕조와 동시대의 나라로 고려땅에서 일어났으며 역시 문(文)을 중시한 고려가 있는데 당(唐)의 가탐(賈耽)처럼 지명을 왜곡할 수는 없었다. 지명을 가장 왜곡한 왕조는 명(明)이고 두 번째는 청(淸)이다. 그러나 후대에 오면서 대륙의 고려 지리지명들을 송의 영토로 왜곡되어 기록된 것은 사실이다.

북송의 대역사학자 구양수(歐陽修)가 <신당서>를 남기지 않았다면 요수(遼水)인 압록수(鴨綠水)의 위치를 알 수 없어 고구려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지 못했을 것이며, 남송의 라필(羅泌)이 지은 <로사(路史)>가 없었다면 단군왕검의 고향을 알 수 없었다.

동한(東漢)의 조엽(趙曄)이 지은 <오월춘추>가 없었더라면 단군조선의 역사를 구체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들 세 역사학자에게 감사하며 김태영학파(T.K.School)는 특히 구양수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구양수는 사마천(司馬遷)에 버금가는 역사학자다.

구양수는 “사(史)란 국가의 법전(法典)으로 후세에 근계(勤戒)를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가 바로 법전이라는 말이다. 육법(六法)이라 하는 헌법,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알지 못해서 불법, 탈법, 편법, 개판법이 만연(漫然)한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에는 대중이 공감할 진정한 민족사(民族史)가 없다. 그래서이다. 구양수의 교훈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공부하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또는 www.historyofcorea.com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8부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통설처럼 알려진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의 탕음현이 당시 주나라 문왕이 감금된 곳이 아니며 은나라의 마지막 도읍지인 하내의 조가(朝歌) 역시 역사 왜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상(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고

둘째,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는 단군조선의 핵심 영토이며

셋째, 탕왕이 상(商)나라를 세운 최초의 도읍지인 상원(商原)은 섬서성 대려현(大荔縣) 북쪽 10리로 상나라 영토이고

넷째, 상주(商州: 지금의 상낙), 상현(商縣), 상남(商南) 등의 지명이 모두 섬서성에 있으며

다섯째, 문왕의 감금지를 주나라는 령어(囹圄)라 했는데 령어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며

여섯째, 하양현을 합양현이라고도 하는데 섬서성 서안 동북부에 위치하고

일곱째, 유리(牖里)를 미리(美里)라고도 하는데 미원보(美原堡)와 미원현(美原縣)은 섬서성 부평 부근이며

여덟째, 이들 모든 지명들은 주나라의 도읍지인 기산현(岐山縣)과 주지(周至)가 있는 섬서성에 위치하며

아홉째, 상나라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은이라 했으며 옛날에는 상(商)과 은(殷)으로 함께 불렸으며

열 번째, 반경이 천도한 은(殷)이라는 곳은 호(毫)이며 오늘날의 황하 이남 하남성에 위치한 언사현(偃師縣) 서쪽인데 이곳에 있던 은나라를 주나라 무왕이 멸한 것으로 사실상 은의 마지막 도읍지는 하남성 낙양(洛陽)이고

열한번째, 상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김씨이며 조상인 소호금천씨가 개척한 땅인 섬서성에 도읍을 정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열두번째, 상나라의 도읍지에서 멀지않은 지역에 주나라 문왕을 감금하여 감독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열세번째, 탕왕의 무덤은 섬서성에서 황하만 건너면 지척에 있는 오늘날의 산서성 영하현(榮河縣)이며

열네번째, 따라서 상나라는 섬서성과 산서성 남서부의 영토를 다스렸다는 점 등이다. 본고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아무튼 무왕은 문왕의 둘째이고 관숙선에게 관나라, 주공단에게 노나라, 채숙도에게 채나라,조숙진탁에게 조나라, 곽숙처에게 곽나라, 강숙봉에게 위(衛)나라를 봉했다.

이들은 모두 황하 이남의 하남성에 있었던 나라이다. 따라서 단국(檀國)을 서주가 봉한 나라들의 하나라는 것은 역사 왜곡이자 날조이고 조작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라며 다음 <그림 2>에서 단군조선의 핵심 영토인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 그리고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향(壇鄕)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29부

제2절. 평양성, 왕검성, 왕험성의 위치

왕검단군의 신설(神說)은 삼신(三神)과 오제(五帝)인데, 삼신은 태일(太一: 진한, 왕검자신), 천일(天一: 마한, 우현왕), 지일(地一: 변한, 좌현왕)이라 하여 왕검 자신이 태일로 진한이 되고 변한과 마한으로 하여금 왕검 자신을 보좌하는 우현왕과 좌현왕으로 정하여 인간 세상의 제도를 창시하였다.

단군조선이 진한, 마한, 변한으로 된 것은 “경자 93년(BC2241)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삼한은 64족을 포함하였다”라고 <단군세기>에 기록이 보인다.

한(韓)이란 글자는 유목민이나 유목민이 사는 땅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생하여 임금이나 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치 한(忓), 한(汗), 한(扞), 간(干) 등이 임금이나 왕으로 사용된 용례와 같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여 ‘干’을 왕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음은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추장이나 돌궐의 임금을 호칭할 때 ‘汗’이라 했음도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와같이 왕검단군이 진한이 되고, 웅백다(熊伯多)를 마한이라 하고, 치두남씨(蚩頭男氏)를 변한으로 삼아 [변한으로 하여금] 우(處: 순임금)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그 후 제22대 색불루단군(1285∼1237BC) 때에 비로소 삼조선 즉 진조선(진한), 막조선(마한), 번조선(변한)이라 하였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색불루단군 때인 BC1285년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했다. 조선이란 관경(管境)을 말한다”라 적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과 www.historyofcorea.com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30부

진수가 지은 <삼국지>에 “한(韓)[백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고 …한에는 세 종류가 있으며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 단군조선)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방군이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알아보자.

“대방현은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다. 공손도가 대방군을 두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건안(建安: 196-200) 중에 공손강이 둔유(屯有)를 나누어 염현(鹽縣)이 있는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을 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염현의 위치를 알아보자.

“염지는 산서성 해현 동쪽에 있다. 안읍현 남쪽이다. ...두우의 주(注)에 염(鹽), 염지(鹽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기주이자 요동이라 하고 유주이면서 요서인 수양산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의 남쪽이 바로 대방군이었다.

이들 지명은 모두 당시 바다(海)라고 하는 황하(黃河)와 인접한 지역이다. 이곳 산서성 남부에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초기의 왕성(王城)이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대방군의 위치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 <그림 3>과 같다.

이병도는 <眞番郡考(진번군고)>란 그의 논문에서 대방군이 한반도 황해도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함께 확인해 본 바와 같이 대방군은 황해도가 아닌 산서성 남부에 위치했음으로 이병도의 주장은 틀렸음을 입증할 수 있다.

진한은 단군이 직접 관할하던 곳으로 북쪽이며 마한은 단군을 보좌한 우현왕이 있던 곳으로 서쪽이고 변한은 단군을 보좌한 좌현왕이 있던 곳으로 동쪽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과 www.historyofcorea.com 에서

 



댓글(이병환): 위에서 환도성이라든가는 표기가 되어 있는데 평양성도 있다면 대방군이 결국 다 삼한의 아래에 존재했다면 이병도는 무슨 근거로 황해도에 대방군이 존재했다고 왜곡을 했습니까? 그리고 선생님 풍수지리에 보면 좌청룡 우백호 했는데, 역시 좌현왕 우현왕 했다면 풍수지리가 엄청 오래된 모양입니다. 전에 저도 풍수지리 책을 읽어 보았는데, 옥룡자 도선으로 시작이라고 나왔습니다만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질문이 애매모호하지만 답하자면 이병도는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이병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학자(史學者)라는 자(者)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학자가 되려면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둘째, 읽은 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理論)을 세워야 하며 셋째, 저서를 남겨야 한다.

그런데 학자의 필수요건인 다독(多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는척하려 하니 헛소리, 잡소리, 군소리, 그리고 근거없는 설(說)로 주접밖에는 별도리가 없지 않겠나. 제아무리 많은 저서를 집필해도 여러 종류의 책을 다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저서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된다. 저서에 담긴 저자의 이론이나 주장이 영구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지 문헌기록은 없으나 풍수지리는 유사이전(有史以前)부터 있었던 것이라 이해한다. 풍수(風水)라는 단어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동진(東晉)의 곽박(郭璞: 276∼324)이 지은 <장서(葬書)>에서다. 곽박은 “기(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 그래서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방법이 풍수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김태영학파(T.K.School)의 견해는 다르다. 기(氣)란 소리(音: Sound)이기 때문에 바람이나 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바람도 소리이고 물도 소리이니 흩어지고 머므르지 않는다.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곽박은 아주 박식(博識)한 사람이다. 동이배달한민족의 중원(中原)인 오늘날의 산서성 남부에 있는 문희현(聞喜縣)에서 출생하였으며 동양 최초의 지리서라고 할만한 <산해경>의 주(注)을 단 사람이다. 일부 학자들은 곽박이 <산해경>의 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 827∼898)은 신라말의 승려로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기는 하나 풍수지리의 시조(始祖)는 아니다. 김태영학파(T.K.School)는 곽박을 풍수의 창시자(創始者)라 이해한다. 아무리 박식하다 할지라도 후세에게 저서(著書)를 남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곽박은 풍수를 다루는 최초의 저서 <장서>를 남겼다.

생사진리, 음양오행, 길흉화복, 빈부귀천, 생자주택, 사자장지, 풍수지리 모두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김태영학파의 논문 참고는 www.coreanhistory.com 또는 www.historyofcorea.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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