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 위만이 망명하여 빼앗은 곳은 산서성 남동부에 위치한 원곡(垣曲)에 있던 번조선(변한)의 왕검성이며 왕검성(王儉城)과 산서성 서남부 노룡(창려) 지역의 조양진에 있던 마한의 도읍지인 왕험성(王險城)이 서로 혼동되어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고 잘못 전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위만은 왕험성이나 평양성에 도읍하지 않았다.
첫째, 한무제가 위만조선이라 하는 번조선을 멸했을 때 산서성 남서부는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 제6대 태조궁 무열제(114-19BC)가 이곳 요서에 10성을 축성하여 한나라 군사를 방비했기 때문이다.
둘째, 왕검성(원곡)에서 왕험성(조양진)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대략 380리라는 이유 때문이다. 위만이 1천명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 서쪽에 있는 조선으로 갔다는 그 패수에서부터 조양진(왕험성)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576리이다. 1천명이 도보로 576리의 먼 길을 갔다는 견해는 설득력도 논리성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왕검성은 번조선(변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남동부 원곡이며 왕검성의 왕은 지일(地一)로 평양성에 있는 태일(太一)인 왕검을 보좌하는 좌현왕이다. 진한, 마한, 변한의 도성(都城)이 있던 평양성, 왕험성, 왕검성의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6>과 같다.
평양(성)은 진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이고 왕험성은 마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최남서부 황하변의 조양진(朝陽鎭)이며 왕검성은 산서성 동남부 원곡(垣曲)으로 변한의 도읍지로 정리된다.
따라서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가 단군조선의 중심 지역이었고 단군조선의 강역은 아시아 전역을 총괄한다. 특히 산동성과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중심영역과 같고 산서성 남동부에서 산동성을 포함 하남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광동성 일대가 모두 변한땅이었다.
그래서 본고 제II장 제2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고 …”라고 기술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댓글(이병환): "첫째, 한무제가 위만조선이라 하는 번조선을 멸했을 때 산서성 남서부는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 제6대 태조궁 무열제(114-19BC)가 이곳 요서에 10성을 축성하여 한나라 군사를 방비했기 때문이다. " 여기 대로 한다면 고구려가 신라보다 먼저 세워진 것으로 되는것 같은데, 글을 잘못 읽은 것입니까?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글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읽었다. 고구려는 BC232년에 건국되었고 신라는 BC57년에 세워졌으니 고구려가 신라보다 176년 앞선다. 고구려 제6대 태조궁무열제가 요서(遼西)에 축성한 성(城)들은 지도를 참고하면 될 것이고 동이배달한민족사의 년대표를 다음과 같이 적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 한인시대(BC8936: 반고한인, 연등금선자 등) → 활동중심지는 감숙성
2) 한웅시대(BC3898: 태호복희, 소호금천, 염제신농, 구제치우,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곡고신) → 감숙성,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3) 단군시대(BC2333: 단군왕검, 고죽국(묵씨), 하, 상(은), 주) →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
4) 삼한시대(BC2241: 마한, 진한, 변한) → 삼한의 도성(都城)은 모두 오늘날의 산서성에 있었으며 왕험성(조양진), 평양성(임분), 왕검성(원곡)이다. 그러나 활동 지역은 마한은 황하 서쪽이고 진한은 임분 북쪽이며 변한은 산서성 남서부부터 대륙 남부전체이다.
5)삼조선시대(BC1285: 막조선(마한), 진조선(진한), 변조선(번조선: 변한)이며 삼한이 삼조선으로 이름만 바뀐 것이다.) → 4)항 삼한시대와 거의 같음
6) 사국시대 ⓵ 고구려(BC232) ⓶ 백제(BC213) ⓸ 신라(BC57) ⓹ 가야(가라/가라국/금관가야: AD42) <고구려> → 산서성(1만리 강토). <백제> → 3차례 천도했으며 시기에 따라 영토가 변하지만 대략 섬서성, 산동성, 호북성, 호남성, 복건성, 안휘성 남부, 운남성 등. <신라> → 역시 시기에 따라 영토가 변했으며 감숙성, 산서성,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절강성 일부이고 660년 백제가 패망한 후 백제의 영토를 모두 신라가 통치했다. 사천성, 운남성, 복건성, 강서성 등(사방 6천리 강역). <가야> → 절강성 전역과 강서성 동부 및 복건성 북부 지역(사방 2100리 강역)
7) 남북2국시대(AD698: 대진, 신라 → 대조영의 대진은 고구려의 고토(古土)를 거의 회복하였고 신라는 강소성으로 중심으로 주로 황하 남부를 관장했다. 대진과 신라의 국경은 위도 35도로 갈리는 황하와 비슷하게 있는 패수(니하)였다.
😎 후삼국시대(898) <후고구려(궁예)> → 섬서성 북부, 산서성 중남부, 하남성 하내의 송악군(복양), 귀주성 등. <후백제(견훤)> → 복건성 상주(안계) 출생하였으며 복건성, 광동성 등. <신라> → 강소성 금성(강녕), 절강성, 사천성 등
9) 고려시대(918) → 황하 이남의 신라 옛 영토와 지금의 하북성 산해관을 지나는 세칭(世稱) 고려 만리장성까지로 사방 6천리 강토였다. 고려는 대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지 못했다.
10) 한반도시대(1394) 이성계가 대륙의 6천리 고려의 강토를 명나라 주원장에게 빼앗기고 쫓겨와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했다. → 한반도
11) 대한제국시대(1897) → 한반도 ◆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간도협약: 1909년 9얼 4일 한일병합: 1910년 8월 22일, 안중근의사 이등박문 사살 1910년 10월 26일
12) 식민지시대(1910년 8월 22일) → 한반도
13) 대한민국(1919 ∼ 현재) → 한반도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또는 <시근경 I>(2021)과 <사근경 II>(2025) 참고.
댓글(이기홍): 後裔는 권력의 正統性 與否라면 단군조선의 계승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봐야 할까요? 辰韓에서 신라로 이어진다고 봐야 할까요?
논평: 누가 “後裔는 권력의 正統性 與否”라 했는지 모르겠다. 김태영학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후예란 종족이란 뜻으로 혈통이 같아야 한다”고 했다. 후예는 즉, 후손(後孫)이다.
이낙연, 이상민, 이만희는 전주이씨로 이성계(李成桂)의 후예이고 이성윤은 연안이씨로 이무(李茂)의 후예이며 이재명은 경주이씨로 신라의 알평(謁平)과 이거명(李居明)의 후예이다. 이렇게 같은 혈통으로 이어져야 후예라 하는 것이다.
<700년 부여국의 허구와 동명왕•고주몽 관계 연구>(제21집)(2024)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해모수(解慕漱)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며 주몽의 성씨는 해(解)가 아니라 고(高)다. 그러므로 주몽은 해모수의 후예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고씨(高氏)는 전욱고양의 후예이며 전욱고양은 소호금천씨의 아들이니 결국 고주몽은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것이다.
또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제44대 구물단군이 BC425년에 국호(國號)를 대부여(大扶餘)로 고친 것이고 산서성 북부 하북성 장북(張北)에 있던 부여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북부여(北扶餘)라 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북부여를 이었다고 할 수 없다. 방향상(方向上) 북쪽에 있으면 북부여, 동쪽에 있으면 동부여, 남쪽에 위치하면 남부여라 한 것이다. 그리고 태원(太原)에는 졸본부여도 있었다.
고추모(高鄒牟)가 북부여의 도성인 부여성(장북)으로부터 엄사수(淹㴲水: 안고리호)를 건너 남하(南下)하여 산서성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하는 졸본부여(태원)에서 고구려를 세웠다.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이름이 바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단군조선에서 대부여로 국호가 바뀐 것으로 같은 혈통이 왕위를 승계한 것과는 다르다.
여러 차례 이야기 하였지만 삼한인 마한 55개국의 하나인 백제가, 진한의 12국의 하나인 고구려가, 그리고 변한 12국의 하나인 신라가 강성해져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된 것이다. 신라는 본래 감숙성 난주(蘭州)에서 태동하여 산서성 단군조선의 진한인 평양성(임분)에 제1의 금성을 쌓고 지내다가 고구려에 밀려 왕검성인 원곡으로 천도했으며 다시 고구려에 밀려 지금의 강소성 강녕(江寧)에 제2의 금성을 쌓고 지내다가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했다.
따라서 진한에서 신라가 이어졌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신라가 진한에서 변한으로 천도한 이유 때문에 사서(史書)에는 진변한 또는 번진한 등의 용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고로 진변한에서 신라로 이어졌다가 적절한 기술이 되겠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댓글(이기홍): 後裔는 권력의 正統性 與否라면 단군조선의 계승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봐야 할까요? 辰韓에서 신라로 이어진다고 봐야 할까요?
논평: 누가 “後裔는 권력의 正統性 與否”라 했는지 모르겠다. 김태영학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후예란 종족이란 뜻으로 혈통이 같아야 한다”고 했다. 후예는 즉, 후손(後孫)이다.
이낙연, 이상민, 이만희는 전주이씨로 이성계(李成桂)의 후예이고 이성윤은 연안이씨로 이무(李茂)의 후예이며 이재명은 경주이씨로 신라의 알평(謁平)과 이거명(李居明)의 후예이다. 이렇게 같은 혈통으로 이어져야 후예라 하는 것이다.
<700년 부여국의 허구와 동명왕•고주몽 관계 연구>(제21집)(2024)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해모수(解慕漱)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며 주몽의 성씨는 해(解)가 아니라 고(高)다. 그러므로 주몽은 해모수의 후예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고씨(高氏)는 전욱고양의 후예이며 전욱고양은 소호금천씨의 아들이니 결국 고주몽은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것이다.
또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제44대 구물단군이 BC425년에 국호(國號)를 대부여(大扶餘)로 고친 것이고 산서성 북부 하북성 장북(張北)에 있던 부여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북부여(北扶餘)라 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북부여를 이었다고 할 수 없다. 방향상(方向上) 북쪽에 있으면 북부여, 동쪽에 있으면 동부여, 남쪽에 위치하면 남부여라 한 것이다. 그리고 태원(太原)에는 졸본부여도 있었다.
고추모(高鄒牟)가 북부여의 도성인 부여성(장북)으로부터 엄사수(淹㴲水: 안고리호)를 건너 남하(南下)하여 산서성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하는 졸본부여(태원)에서 고구려를 세웠다.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이름이 바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단군조선에서 대부여로 국호가 바뀐 것으로 같은 혈통이 왕위를 승계한 것과는 다르다.
여러 차례 이야기 하였지만 삼한인 마한 55개국의 하나인 백제가, 진한의 12국의 하나인 고구려가, 그리고 변한 12국의 하나인 신라가 강성해져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된 것이다. 신라는 본래 감숙성 난주(蘭州)에서 태동하여 산서성 단군조선의 진한인 평양성(임분)에 제1의 금성을 쌓고 지내다가 고구려에 밀려 왕검성인 원곡으로 천도했으며 다시 고구려에 밀려 지금의 강소성 강녕(江寧)에 제2의 금성을 쌓고 지내다가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했다.
따라서 진한에서 신라가 이어졌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신라가 진한에서 변한으로 천도한 이유 때문에 사서(史書)에는 진변한 또는 번진한 등의 용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고로 진변한에서 신라로 이어졌다가 적절한 기술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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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병환): 이성계가 한반도로 들어 왔다면 일월오봉도의 배경이 된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한반도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답: “일월오봉도”는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림이란 ‘색, 붓, 연필 등을 사용하여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화선지에 묘사한 창조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림은 사실을 기록하고 문헌에 기록된 사실을 고증(考證)하는 역사가 아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의 배경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마치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작품 ‘이삭줍는 여인’에 나오는 세 여인이 누구이고 그 배경이 어디인가를 묻는 이치와 같다. 그 답은 오직 밀레밖에 모른다.
하물며 일월오봉도는 작가의 이름이 없어 누가 그린 것인지조차 모르는 출처 불명의 그림이다.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학자란 1차사료가 되는 한 장의 그림을 보고도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추론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함께 추적해 보자.
산서성(山西省) 남서부에는 중조산맥(中條山脈)이 황하와 천연염지인 운성염지(해지解池) 사이를 따라 길게 뻗쳐 있으며 지금의 영제시(永濟市)에 있는 이곳 중조산의 하나가 오노산 혹은 오노봉(五老峰)인데 다섯 개의 봉우리란 의미의 산은 이곳뿐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옛날 인도사람들은 이 오노봉 지역을 해(日)가 뜨는 곳이라 하여 진단(震旦)이라 했는데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일월오봉도가 탄생하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해가 뜨는 곳이니 달(月)도 뜰 것이 아닌가. 해, 달, 다섯 봉우리, 우연일치인지 모르겠다.
문헌사료에 오노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을뿐더러 오노봉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어 자신있게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문헌사료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역사학자의 교육적인 추측(Educational guess)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오노봉에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오노봉 남쪽이며 황하의 북쪽에 고구려의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황궁인 영락궁(永樂宮)이 위치한다.
그게 전부이다. 의구심이 해소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은 www.historyofcorea.com에서
댓글(이기홍): 고려를 뒤엎고 리씨조선 협력하지 않는 가문은 대륙에 남았을 거고 그 반대는 반도로 이주해 왔을 겁니다. 수 천리를 도보 또는 배로 생필품과 가솔을 끌고 이동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닐 겁니다. 明이 강남에서 건국하고 元의 섬서성 大都를 점령하자 고려의 신진사대부는 그 때부터 환란을 피해 천도를 계획하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반대가 심하자 역성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환부역조는 그 와중에 많았을 겁니다. 특히 토박이들은 당연하겠지요. 아직은 소설입니다.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영어속담에 Barking up the wrong tree.란 말이 있다. 헛다리 짚었다는 뜻이다.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한 것은 고려 시기가 아니다. 그 당시에는 환부역조할 필요도 없었고 환부역조한 사람도 없었다. 고려의 왕족인 왕씨(王氏)들을 모조리 도륙(屠戮)낸 사람이 바로 이성계와 정도전이다. 이 와중에 왕씨의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성씨를 바꾼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는 지금 약 3천5백만이 환부역조한 자들이다. ‘토친세(土親洗)’를 일컫는 말이다. 토는 ‘토착왜놈’ 친은 ‘친일파놈’ 그리고 세는 ‘세탁왜놈’의 뜻하는 것으로 김태영학파가 만든 신어(新語)이다. 토친세의 후손(後孫)이 3천5백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의 개혁인지 모르겠으나 이재명은 절대 개혁을 하지 못한다. 두고보자!
나는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김녕김씨(金寧金氏)다. 김녕김씨에는 충의공파(忠義公派)란 파가 있다. 경상도에 살고 있는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약 90%가 환부역조한 자들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의 행위(行爲)로만 가능하다. 나무에 사과가 달리면 사과나무이고 앵두가 열리면 앵두나무인 이치(理致)와 같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는 것이 유전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척결(剔抉)이 어려운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란 없다. 그래도 가정해 보자. 만약 반민특위(反民特委)가 그들을 척결했더라면 5.16, 5.18, 그리고 12.3은 없었다. 척결이란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꼭 죽여야 할 사람들을 죽이지 못한 역사가 한스럽다. 그래서 역사학자 김태영은 이승만과 김대중을 몹시 비판한다.
댓글(이병환): 저희 본관은 재령이고, 선조는 대륙이 싫어 이성계보다 먼저 경남 모은으로 와서 은둔을 했지요. 그리고는 '고려동학'이라고 담장을 쌓으시고, 여기는 고려 땅이라고 한 것이었는데, 증손 대에 이르러 조선 조정으로 출사를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중시조는 갈암 이현일이지요. 숙종조에 이조판서를 한 반년 정도 하시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당하셨지요. 그리고 내려 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는 저의 3종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보니 군자금 모집에 연루되어 옥고를 2년 반 치르시고 나오셔서 얼마 못사시고 돌아 가셨지요. 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개월 지나서 태어난 유복자지요.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진즉부터 속칭 뼈대있는 집안의 후예임을 알았다. 독자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재령(載寧) 이씨의 시조는 이우칭(李禹偁)인데 본래 경주이씨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6세손 이주복(李周復)의 둘째 아들이다.
가문을 빛낸 인물은 많지만 이씨조선 선조시기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치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및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운룡(李雲龍)과 세칭 7현자로 알려진 대학자 이현일(李玄逸)이 있다.
이현일은 1679년 숙종5년에 정계에 나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고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현일의 동생 휘일(徽逸) 역시 학문이 높았다. 벼슬에 천거되었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이신(李申)은 고려 공민왕(1370∼1393) 시기 사헌부 지평으로 이성계의 추대를 적극 반대한 댓가로 유배 도중에 생을 마친 의로운 인물이다.
관향(貫鄕)이 된 재령(載寧)은 오늘날의 복건성(福建省) 포성현(蒲城縣)이다. 복건성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다가 660년 패망 후 신라 땅이 되었으며 신라가 고려에 귀속되자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복건성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의 고향이기도 하다. 복건성 용암시(龍岩市) 서쪽에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이 바위를 집 삼고 삼베옷을 입으며 풀뿌리를 캐먹다 생을 마친 개골산이 있다.
재령이씨가 한반도로 피신한 시기는 아마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이른 시기이거나 늦어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때가 아닌가 싶다.
경상도에 살면서도 ‘토친세’가 아닌 재령이씨 가문의 의기(義氣)를 지키고 있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아무나 방사성 물질과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했다. 선조들의 충의용행(忠義勇行)의 뜻을 받들어 대대손손 가문의 전통을 지켜주기 바라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42부
제III장. 삼한은 산서성에 위치
한(韓)은 한(汗)이나 간(干)처럼 왕을 뜻한 것으로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왕검 자신이 태일(太一)로 진한(辰韓)이 되고 왕검을 보좌하는 왕에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어 마한(馬韓)은 천일(天一)로 우현왕이라 하고 변한(弁韓)은 지일(地一)로 좌현왕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한은 단군조선의 핵심 영토인 산서성 남부로 진한은 평양(임분), 마한은 조양진, 변한은 원곡에 각각 왕성(王城)이 있었다.
예부터 인도인(印度人)들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을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진단(震旦)이라 하였는데 문헌사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을 진단(震旦)이라 칭했으며 〈繙譯名義集(번역명의집)〉에 이르길 동방이 진단이며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옛날에 진단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東方)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역사상 동방은 황하강이 세로로 나뉘는 경도 110도 동쪽을 일컫는 말로 현재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한반도를 지칭한 말이 아니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동방의 등불”에서의 동방 역시 황하 동쪽의 산서성을 노래한 것이며 이곳 산서성에서 단군조선, 진한, 마한, 변한,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 그리고 고려가 나라를 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반도에 단군조선를 비롯하여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 가야, 고려의 도읍지들이 있었다는 1차사료와 문헌자료는 전무하다. 때문에 한반도를 동방이라 했다는 주장이나 개연성은 문헌사료상 근거없다.
<天中記(천중기)>에는 “진단은 총하(蔥河)의 동쪽으로 해가 처음 떠서 비추는 동쪽 모퉁이라서 옛날 얻어진 이름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총롱산(蔥聾山)은 지금의 오노산(五老山)이다. 산서성 우향현 서남이다. <山海經(산해경)>에 총롱산 가운데는 큰 계곡이 많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노산은 오노봉(五老峰)이란 이름으로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한 중조산의 일부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총하(蔥河)는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의 황하가 굴곡하는 구간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산서성 남부에 단군조선의 삼한인 진한(평양), 마한(조양진). 변한(원곡)이 위치한 지역이며, 마한인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인데 <攻媿集(공괴집)>에 “백제는 진단지역에 있으며 모두 54개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백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삼한의 하나인 마한지역이 진단지역임을 고증해주고 있다.
진단(震旦)의 ‘震’자는 벼락이란 의미이고 ‘旦’자는 해가 돋는 곳이란 뜻으로 진단이란 두려움과 권위을 떨치는 곳으로 왕검단군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 삼한과 오노산(봉) 등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7>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댓글(이병환): 선생님 바쁘시다는데 침노하다는 것을 보니 생각나서 여쭙습니다. 지금 태풍 페이파가 올라 오는 모양이던데 옛날 역사교과서에서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평정하러 갔다가, 니하까 도까(신풍)이란 바람이 불어 와서 일본 정벌에 실패 했다고 나오던데 당시 고려와 몽고의 국경과 일본을 치러 갔다고 하는데, 현재의 일본이 맞는지요? 임성태자가 백제가 망하고 난 후에 일본 열도로 들어 갔다고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이것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 폭풍(暴風)은 크게 셋으로 구분한다. 첫째, 태평양과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것을 Typhoon(타이푼: 태풍)이라 하고 둘째,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폭풍을 Cyclone(싸이클로운: 선풍)이라 하며 셋째, 멕시코만에서 부는 폭풍을 Hurricane(허뤼케인: 허뤼케인)이라 한다. 이들 모두 계절에 따라 부는 사나운 바람이다.
태풍은 대개 7∼10월 사이에 태평양과 남중국해에서 부는 폭풍으로 자연적인 현상이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식의 주술(呪術)로 바람을 불게 하지는 못한다. 무당들의 주술이나 무당굿이 12.3반란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치와 같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처럼 뜻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우연일치(偶然一致)로 일어난 자연현상을 신풍이라 한 것뿐이다.
지난번에도 같은 질문을 하여 답한 기억이 난다. “현재의 일본에 쳐들어갔다고 해서 신풍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에 대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라고 물어 “대답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라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8월 15일 댓글에서이다.
고려와 몽고가 일본을 정벌한 것은 두 차례로 1차는 1294[1274]년 10월 6일∼10월 21일과 2차 1281년 5월 21일∼7월 7일의 사건으로 1361년 고려가 홍건적에게 도읍지 개경(開京: 하남성 복양)이 공격을 받기 전이고 1392년 이성계에게 망하기 전의 일로 강남이 고려의 영토인 시기이다.
려•몽이 전선(戰船)을 만들고 정벌을 준비한 곳은 강남(江南)으로 오늘날의 대륙 강소성, 안휘성, 그리고 강서성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서 전선을 만들고 군사가 집결하였으며 강남은 한반도와는 무관하다.
일본의 전신인 왜(倭/왜노/왜노국)가 일본열도로 들어가기 전의 왜국(倭國)은 오늘날의 복건성 해단도(海壇島)와 대만섬(臺灣島)에 있을 때이다.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가 대만에 있던 왜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들어간 것은 대략 537년경이고 왜는 670년에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고쳤다. 대만에 남아있던 왜가 완전히 철수하여 일본열도로 들어간 것은 제3대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미쓰) 때인 1605년경이다. 그러므로 1605년까지 대만에는 왜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려•몽이 1차 일본정벌은 사실상 대만에 있던 왜를 정벌한 것이고 2차 정벌은 지금의 일본열도 서남쪽에 위치한 구주(九州: 큐슈)을 정벌한 것이다. 이렇게 1차와 2차 정벌은 서로 다른 지역이다.
1차 정벌의 출발은 지금의 광동성 합천(서한徐閒)으로 보이고 2차 출발은 절강성 창원(소흥紹興) 지역으로 판단된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서 출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반도는 1394년 이후부터 이씨조선 왕조의 도읍지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정벌을 시도한 시기는 7월과 10월 사이로 태풍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때였다. 따라서 하늘이 일본을 돕기 위해 신풍(神風)을 일으켜 고려와 몽고의 정벌을 막았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한 잡담(雜談: Gossip)이다.
논문 열람은 www.coreanhistory.com 또는 www.historyofcorea.com에서
댓글(이기홍): 흉노의 左右賢王은 단군조선의 三韓과 어떤 관계일까요?
답(김태영학파): 동족(同族)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관계이다. 동이배달한민족은 오늘날의 감숙성 아이금산과 기연산 지역에서 시작하여 동진(東進)하였다. 감숙성 약수 부근에 살던 한인(桓因)과 삼묘(三苗)의 후예들이 넓게 분포하여 살았으며 이들을 하나라 시기에는 훈육(獯鬻), 상(은)나라 시기에는 귀방(鬼方), 주나라 시기에는 험윤(獫狁), 한나라 시기에는 흉노(匈奴), 위•수•당 시기에는 돌궐(突厥), 송나라 시기에는 거란(契丹),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는 달단(韃靼) 등으로 칭(稱)했다.
흉노란 이름이 사용된 것은 한(漢나)라 시기인 BC206∼AD220년 사이를 말한다. 단군조선의 삼한은 2241∼1285BC 사이이니 대략 하(夏)나라 때인 2070∼1600BC로 이 시기에는 훈육이라 불리던 때이다.
삼한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의 다른 명칭이니 당연히 좌현왕 우현왕은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王儉)으로부터 창시된 호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좌•우현왕이란 호칭은 흉노라고 불리기 전인 훈육(獯鬻)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흉노라고 불리던 한나라 무제(武帝) 시기에도 감숙성 무위(武威)에는 휴도왕국이 있었고 장액(張掖)에는 곤사왕국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김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김일제(金日磾)가 휴도왕의 태자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단고기>의 오류 비판과 지리지명 고증>(2023)을 참고하기 바란다.
논문 열람은 www.coreanhistory.com 또는 www.historyofcorea.com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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