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마한은 서쪽, 진한은 북쪽, 변한은 동남쪽에 위치

마한 54개국의 하나인 백제에 대한 문헌사료는 약 240종이 넘으며 삼한(三韓)에 대한 최초의 지나(支那) 기록은 『後漢書(후한서)』로부터 시작되는데 <후한서>는 삼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변한] 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해있다.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 천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황하) 사이에 있으며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황하)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모든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라고 하여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로 서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황하)를 경계로 하니”라고 하였으나 잘못된 곳으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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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44부
여기서의 바다라고 표현한 해(海)란 황하(黃河)를 뜻하는 것으로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삼한은 황하와 황하 사이가 될 수 없다. 서쪽은 황하와 경계한다고 설명해야 옳다.
필자의 이같은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권172 하(下)에 보인다. “서쪽의 바다(황하)를 경계로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각각 사방 4천여리”라고 밝히고 있다.
<후한서>의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황하와 경계를 한 것은 삼한 초기인 BC2241년의 상황으로 정확하다. 그리고 마한이 사방 4천여리라는 것과 진한, 마한, 변한이 각각 사방 4천리라는 기록은 엄청난 차이다.
다시 말하면 단군조선의 중심지인 산서성 남부를 중심으로 동서가 8천리요 남북이 8천리라는 것이다. 필자는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따른다.
삼한을 옛날에는 진국(辰國)이라 했다는 진국이 바로 단군조선(壇君朝鮮)을 일컫는 말이다. 낙랑과 예맥은 산서성에 있던 지명이며 단군조선 삼한의 왕성(王城)으로 마한의 왕성은 조양진, 변한의 왕성은 원곡에, 그리고 진한의 왕성은 평양(임분)으로 역시 산서성 남부에 위치하였다.

정리하면 삼한 초기에는 서쪽의 황하와 경계가 되었으며 백제가 속한 마한은 서쪽에 있었고 그 후 산서성 남서부로부터 황하를 건너 섬서성과 감숙성에 걸친 영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한이 삼조선으로 바뀐 것은 색불루가 단군조선 제22대 단군이 된 BC1285년 경으로 한반도(韓半島)는 황하(黃河)와 근접한 지역도 아니며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삼한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이 문헌사료에 의해 고증(考證)된 것으로 다음 <그림 8>에서 삼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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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45부
<晉書(진서)>에는 마한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에는 세개의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마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황하)로 경계를 이룬다. 마한은 산과 바다(황하) 사이에 있는데 성곽(城廓)이 없다.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으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수 천호로서 각각 거수(渠帥)가 있다. 마한의 풍습은 기강이 낮아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토굴)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고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 온 가족이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장유(長幼)와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라고 적고 있다. 인용문에 마한 사람들은 “땅을 파서 토굴(土室)을 만들어 거처한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後漢書(후한서)>, <晉書(진서)>, <通志(통지)>, <飮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通典(통전)>,<文獻通考(문헌통고)> 등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어 마한 사람들이 토굴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듯이 서역(西域)인 섬서성 기산(岐山)에 살던 주(周)나라 시조인 고공단부(古公亶父) 역시 토굴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한, 마한, 변한, 삼한의 초기 왕성(王城)은 모두 산서성 남부에 있었으며 산서성이 고구려의 핵심 영토였음을 필자의 학술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삼한이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주장, 비정, 추정, 추측해 온 제도권 식민반도 사학자들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토굴생활을 했다고 기록된 1차사료나 문헌기록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문헌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가 제시한 논거(論據)는 백제가 속해있던 마한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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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기홍): 마한의 도읍지 왕험성 즉 朝陽鎭 지금의 韓陽鎭을 구글이나 바이두 지도로 보면 서쪽이 망망대해처럼 低地가 보입니다. 다습한 기후 였을 땐 물이 방방했을 겁니다. 관작대라는 3층 루각이 있어요.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수천년 전부터 내려온 조양진(朝陽鎭)이란 지명을 한양진(漢陽鎭)으로 바꾸고 있는 중공의 역사왜곡에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경각심(警覺心)을 갖고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 아직도 한반도(韓半島)에 마한, 진한, 변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다고 믿고 있는 얼간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반도란 호칭은 일제가 만든 것이니 사용하면 안된다는 정신병자들도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한자는 동이배달한민족의 글자이고 뜻글자인 한자의 정확한 발음은 소리글인 한글이다. 그러므로 “바이두"라 발음도 적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것 자체가 아직 사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이다. ‘百度(백도)’라고 해야 한다.
입으로는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비판하면서 행위(行爲)는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직 배움이 없는 무식의 소치(所致)라 하겠다. 배움을 영어로는 Learning이라 한다. Learning을 한글로 풀이하면 학문, 학식, 지식, 박식 등을 터득하는 기능이라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Learning 즉, 학문, 학식, 지식, 박식이란 “자신의 행동이 바뀜”을 뜻하는 것이다. 행동이 바뀌지 않은 사람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닠콜라 테슬러(Nikola Tesla)처럼 14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명문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학문, 학식, 지식, 박식한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영백과사전(Britannica Encyclopedia)에 나온 Learning의 정의(定義)이다. “When an organism can perceive and change its behaviour, it is said to learn.” <Britannica> Vol.7,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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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47부
단지 <삼국지/위지>에만 마한 55개의 나라를 열거하고 있으며 이들 이름들 중에 목지국과 자지국은 없고 대신 월지국(月支國)이 있을뿐이다. 따라서 마한 55개국을 기술한 <삼국지>가 1차사료가 됨으로 <삼국지>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월지국(도)은 서역국으로 감숙성 돈황(燉煌)과 기연산(祁連山)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전국시 월지는 융(戎)의 땅이고 한(漢)나라 초에는 흉노 휴도왕과 곤사왕의 근거지이다”라고 하였다. 마한이라고 하는 이 지역은 옛 서융(西戎) 땅이고 진(秦) 때는 월지국이며 한(漢)나라 초에는 흉노의 땅이었다.
진(秦)나라는 도읍지가 섬서성 함양(咸陽)으로 마한지역에 위치한 나라이며 진은 융족(戎族) 속에서 성장하였고 목축을 하는 부족이었다. 그러다가 주(周)에 의지하여 융(戎)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융과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주나라에 대해서 알아보자. 주나라를 세운 고공단부(古公亶父: 문왕의 아버지)도 서융(西戎)으로 섬서성 기산(岐山)에서 처음 나라를 열었다. “주는 나라 이름이다. 은나라 시기 고공단부(古公亶父)가 빈(邠)에서 기(岐)로 옮겨 처음으로 국호를 정했다.
그 땅은 오늘날의 섬서성 기산현이다. 전하길 무왕까지 기산현에 있었다. 무왕이 상(은)을 멸하자 천하는 주나라가 되었으며 호경(鎬京)이 도읍지가 되었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서북 18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의 빈(邠)이란 섬서성 함양을 뜻한다.
정리하면 고공단부가 빈에서 기산으로 옮겨 주(周)나라를 세우고 그의 손자 무왕이 은(상)을 멸하고 도읍지를 기산현에서 호경으로 옮겼는데 호경은 지금의 장안현 서북 18리에 있다는 것이다.
“호경은 호읍(鎬邑)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 풍호촌(豐鎬村) 근방에 있다. 주 무왕이 여기에 천도하였다. 평왕(平王)은 동쪽으로 천도하였으며 그 땅은 서융(西戎)의 차지가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섬서성 지도에는 호경, 호읍, 풍호촌 등의 지명이 지워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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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48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여 호경의 위치를 추적하면 섬서성 장안의 서북으로 주지(周至)란 지명으로 이해된다. 주나라의 호경(鎬京)을 서안이라고 통설처럼 알고 있으나 서안이 아니다.
섬서성 호경 즉, 주지에 있던 주(周)나라 무왕으로부터 12대인 유왕(幽王)은 BC771년에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죽고 유왕의 아들 평왕이 다음 해에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주왕실을 높이고 융(戎)과 적(狄)을 물리치는 것이 패주(霸主)들의 원칙이 되었다.
이때부터 화하족과 이민족의 확실한 구별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이민족이라 한 것은 동이 9족을 일컫는 말이다. 진(秦)과 주(周)가 모두 같은 서역 즉, 마한 지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진과 주도 마한의 일국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논자는 진나라와 주나라도 단군조선 삼한 중의 하나인 마한에 속한 한 개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첫째, 진과 주는 마한지역 범주 안에 속한 나라이고
둘째, 진이나 주 역시 융족(戎族)이었으며
셋째, 주나라 유왕을 죽인 견융은 단군조선을 가리킨 것이고
넷째, 진시황 정(政)의 성씨는 김씨이며
다섯째,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사람이 많았으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아 진한에 흡수되었다는 사실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마한땅에 있던 진(秦)과 주(周)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진한·변한과 가까웠기 때문에 진나라의 난을 피해 섬서성에서 동쪽인 산서성으로 피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 진한과 변한이 있었다면 수 천리의 육로와 지금의 황해를 건너 섬서성 진나라에서 한반도 먼 곳까지 피난 올 필요가 없다. 진한·마한·변한은 서로 가까운 대륙에 위치했기에 가능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백제의 백자를 ‘伯’인 ‘맏백’, ‘우두머리백’자로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백제가 산서성 남부에서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섬서성 동쪽인 요서(遼西)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백제(伯濟)에서 백제(百濟)로 표기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본고의 주제인 신라의 강역을 밝히는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휴도왕국(休圖王國)의 위치에 주목하면서 월지국, 곤사왕국, 휴도왕국, 주나라 기산, 진나라 함양, 황하 등의 위치를 다음 <그림 9>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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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